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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에관하여

시쓰기와 논리적 글쓰기

by 홍차영차 2018. 12. 9.

2018년 문탁네트워크 축제 첫날 저녁에 김기택 시인의 "시 쓰기의 즐거움"이란 특강이 있었다. 논리적 글쓰기가 아니라 왠 "시 쓰기"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신기하게도 열린 마음으로 강의를 잘 들을 수 있었다. 한 마디로, 김기택 시인의 특강은 강의 그 자체가 '시쓰기'의 행위였다. 

사실 특강 내용은 문탁에서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시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는 행위이자 동시에 말로부터 해방되려는 시도"이다! 2시간동안 진행된 강의는 이 말을 여러가지 방식을 통해서 체감할 수 있도록 진행되었다. 행위로서의 글쓰기.





말(언어)을 하면 언어가 죽는다. 왜냐하면 전하려는 것이 개념(언어) 안에 잡혀버리기 때문이다. 사실은 전할 수 없는 (나만의) 느낌을 쓰(전하)려다보니 오해가 생기기도 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려고 애를 쓰면서 읽다 보면 미쳐버리기도(사사키 아타루) 한다.

하지만 놀라운 점은 호메로스의 시대로부터 지금까지 아주 오랫동안 이런 비효율적이면서 이기적이고 쓸모없는 글쓰기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사람들이 시를 읽지 않는다고 하지만, 시를 쓰고자(전달할 수 없는 것은 전)하려는 욕망은 여전하다고 아니 SNS와 같은 방식을 통해서 자신의 생각을 전하려는 욕망은 더 커진것 같기도 하다.


특강이 끝나면서 느낀 점은 우리가 에세이에서 하려는 작업은 결코 시쓰기와 다르지 않구나라는 생각이었다. 우리 역시 각자가 세미나를 하면서 느낀 '개인과 공동체'에 대한 감각들을 적으려고 하기 때문이다.퇴근길인문학 시즌 3에서 <미하엘 콜하스>, <곰에서 왕으로>,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를 읽으면서 우리 각자의 마음 속에 새겨진 흔적과 각인들을 자신들의 말로 적어내려는 시도는 김기택 시인이 이야기한 '시쓰기'와 다르지 않다.내 마음속에 만들어진 아주 작은 균열들을 감지하고, 아직 잡힐 정도가 아니지만 잡으려는 노력들이 바로 우리의 에세이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난생 처음 가야금 연주에 맞춰 국악인 '진도 아리랑'과 '꽃이 피었네'를 연습하고 노래부른 것처럼 이번에도 모두가 에세이쓰기의 즐거운 고통을 지나면서 쓸모없음의 쓸모(장자)를 경험하는 시간이 되면 좋겠고, 우리 각자에게 "싱싱한 혼란"(정현종)을 일으키는 시간이 되기를 바라봅니다.


몇년 전에 읽었던 알튀세르의 <마주침의 유물론>을 읽었던 기억, 충격이 떠오른다. 알튀세르는 철학사, 그것도 '유물론의 은밀한 흐름'이라는 어쩌면 너무나 지루하고 어렵고 추상적인 내용을 이렇게 시작한다. 마르크스를 이야기 하면서도 이렇게 아름답게 글을 써내려갈 수 있구나라는 충격과 감동이랄까. 논리적인 글쓰기와 시쓰기는 서로 다른 형식으로 전하려는 다양한 시도일 뿐이다!





비가 온다.

그러니 우선 이 책이 그저 비에 관한 책이 되기를.

말브랑슈는 "왜 바다에, 큰 길에, 사구에 비가 오는지" 자문했다. 다른 곳에서는 농토를 적셔 주는 이 하늘의 물이, 바닷물에는 더해 주는 것이 없으며 도로와 해변에서는 사라져 버리기에.

하늘이 도운 다행한 비이든 반대로 불행한 비이든 이러한 비가 문제인 것은 아니리라.

(<마주침의 유물론>, 루이 알튀세르)



2018. 1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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