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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니체와 비극

by 홍차영차 2020. 11. 18.

니체와 비극 - 변증법적 사유의 극복

: 질 들뢰즈 <니체와 철학> 1장







키워드 : 비극의 탄생, 디오뉘소스 / 아폴론, 헤겔의 변증법적 사유, 비극적 사유, 아낙시만드로스
 



니체는 ‘고대 그리스의 비극’에서 근대 사유의 핵심인 ‘변증법적 사유’를 극복할 수 있는 실마리를 발견했다. 변증법적 사유란 우리의 삶과 세계가 순조롭게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모순과 대립을 통해서 발전했다고 보는 사유 방식이다. 이런 방식으로 삶을 바라보게 되면, 존재는 항상 해결해야 하는 문제, 죄가 되어 버린다. 니체가 바꾸고자 하는 것은 하나의 산봉우리가 아니라 그 산봉우리를 바치고 있는 토대 전체였다.

들뢰즈에 따르면 니체는 초기에서부터 ‘비극적 사유’를 발견했지만, 초기와 후기의 ‘비극’에 대한 사유에는 분명한 변화점이 있다. 초기 작품인 <비극의 탄생>에서 니체는 아낙시만드로스가 전제하는 ‘존재는 부정의’라는 명제를 부정하지 않았다. 아낙시만드로스에 따르면 우주는 순수한 1차 물질, 원소로 존재했다. 하지만 세계가 형성되면서 개체가 존재하기 위해서 원소와 원소가 만나야 했다. 즉, 존재가 탄생하기 위해서 우주적 질서, 우주적 도덕이 망가져야했다. 존재는 그 탄생 자체가 부정의로부터 출발한다. 그렇기에 우주적 도덕을 회복하기 위해서 죽음, 해체는 필수적이다. 한 마디로, 아낙시만드로스에게 “탄생은 범죄이며, 성장은 일급의 강도질”일 뿐이다.

니체가 보기에 그리스인들은 존재 자체가 불의, 현존 자체가 유죄임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책임은 인간이 아닌 신들에게 있다. 내가 지금 저지른 부정의는 내가 아니라 신 - 예를 들어, 불화의 신이나 술의 신 디오뉘소스, 신들의 질투 - 때문이다. 하지만 그 행위에 대한 결과는 또한 인간이 책임지는 오묘한 방식! 아직까지 가책이나 양심의 문제라는 세련된 방식은 그리스인들에게는 고안되지 않았다.


삶을 미학적 현상으로 본다면 존재 혹은 작품은 디오뉘소스와 아폴론간의 대립 혹은 화해를 통해 생산된다. 세계 전체의 통일성은 디오뉘소스적(비이성)인 힘과 의지 속에서 작동하고 유지되지만, 이것이 현실에서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는 아폴론적(이성)인 개체화 과정이 필요하다. 들뢰즈가 보기에 이러한 모습은 비극을 하나의 화해, 일시적인 동맹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비극의 탄생>에서 보이는 니체의 사유는 디오뉘소스 - 아폴론이라는 대립/모순의 극복을 통한 발전이고, 결국은 변증법적 사고의 연속일 뿐이다. 니체는 이런 변증법적 사고를 넘어서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이제 문제는 죄 있는 존재를 어떻게 정당화할 것인가가 아니라 현존 그 자체가 유죄인가 무죄인가로 넘어간다.

존재 자체가 유죄라는 방식을 정당화하는 가장 세련된 모습은 기독교에서 나타났다. 아담과 이브의 죄가 계속해서 후손의 후손에게 넘어갔고, 그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신 스스로가 십자가에서 죽었다. 인간에게는 원죄에 대한 속죄의 방법이 영원히 사라졌다.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자신의 존재 자체를 원망하면서 살 수밖에 없다. 유일한 방법이라면 자신에게 고통을 가하는 것, 자신을 책망하고, 가책하는 것뿐이다.


니체는 원한의 사고, 복수의 사고가 깔려 있는 서구 형이상학에 대항하여 완전한 가치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삶을 정당화하는 철학이 아니라 삶 그 자체를 긍정하는 철학!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차라투스트라가 1, 2, 3부에 걸쳐 넘어가는 과정이 바로 이런 가치의 전환이었다. 이후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와 후기 작품인 <안티크라이스트>, <우상의 황혼>은 그 마지막 시도였던 것 같다.

니체는 이제 현존 그 자체를 긍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존재는 정당화해야하는 무엇이 아니고 그 자체로 정당하다고. 여기서 헤라클레이토스의 생성의 철학이 나온다. 존재는 어떤 것에 선재하는 것이 아니고, 생성하고 차이를 만들어 낼 때 존재한다. 어떤 것도 그대로 있는 것이 없으며, 언제나 변화하고 있는 것 그것이 존재다. 니체에게 핵심은 디오뉘소스와 아폴론의 대립과 극복이 아니라 디오뉘소스 자체에 대한 긍정으로 넘어간다. 삶에서 마주하게 되는 고통은 없어져야 할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껴안고 살아가는 것이 된다.  언제나 무엇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것을 불안으로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항상 새로운 것을 생성하고, 그것 자체를 놀이로 기대하는 것이 니체가 미학으로서 삶을 보는 관점이다.

니체는 항상 망치를 든 철학자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사람들은 니체가 자신이 들고 있는 모든 가치들과 믿음들을 부숴버리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고 반항하기도 한다. 매번마다 가치전환을 말하고 모든 것을 파괴하려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지만, 니체의 망치는 삶 자체를 부정하는 것, 삶을 처음부터 불의라고 만드는 것들에 대해서만 작동할 뿐이다. 니체는 삶을 놀이로서, 언제나 유희로서 바라보고 살아갈 수 있기를 원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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