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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

나는 의식한다, 그래서 나는 사랑한다

by 홍차영차 2020. 8. 5.

나는 의식한다, 

그래서 나는 사랑한다





호수

: 공부하다보면 다른 친구의 해석과 글에 매혹될 때가 있다. 그리고 함께 세미나를 하다보면 내 생각과 그의 생각을 구분하기 어렵다고 느낄 때도 있다. 그래서 가끔은 다른 친구의 글을 계속해서 읽고 다시 써보면서 각인시키는 방식을 쓰곤한다. 이번에 스피노자 <에티카>의 의식과 무의식에 대한 글은 다시 쓰기보다는 친구의 글 그대로를 여러번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5부 신에 대한 지적 사랑의 해석이 너무나 마음에 든다.








 


가끔 생각한다. 스피노자의 철학을 접한 사람들 가운데 그의 ‘평행론’[각주:1]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스피노자에 따르면 자연의 모든 사물에는 그에 상응하는 각각의 관념이 존재한다. 연필에는 연필의 관념이, 책상에는 책상의 관념이 있다. 연필은 단일한 물질로 이루어져 있지 않고 연필심과 나무 그리고 대개 겉면의 칠이 있으니, 이 각각에 대한 관념 역시 따로 존재한다. 더 큰 사물들로 시선을 옮겨보면 지구에도 화성에도 온 우주에도 각각 대응하는 관념이 존재한다.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정도만 다를 뿐 모든 개체에 영혼이 있다고 말하는데, 이른바 만물에 마음이 있다는 범심론(汎心論, panpsychism)이다. 언뜻 원시 종교가 연상되기도 하지만 소수의 현대 학자들 역시 범심론을 꾸준히 지지해왔다. 가령 현대 의식 연구에서 중요한 학자로 손꼽히는 분석철학자 데이비드 차머스는 어쩌면 의식이 자연의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구성요소, 즉 질량·중력·에너지 같은 물질이나 힘 또는 차원일 수 있다는 흥미로운 가능성을 제기한다.[각주:2]

그러나 사실 스피노자가 평행론을 통해 주장하는 것은 단순히 범심론이 아니다. 각각의 사물에 대응하는 각각의 관념이 존재한다는 것보다 앞서는 명제는 관념들의 질서가 사물들의 질서와 동일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관념들도 사물들처럼 인과적 자연법칙에 따라 구성되고 작동된다. 이는 또다시 놀라운 주장을 낳는데 바로 세계가 철저히 ‘가지적’이라는 것이다. 연필을 예로 들면, 연필이 연필이게 하는 모든 물질적(연장적) 특성에는 각기 대응하는 관념들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관념들을 통해 연필의 특성과 구조를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의 정신이 세계의 인과적 질서를 부분적으로나마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이 세계가 가지적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스피노자에게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무한하고 영원한 절대자의 본질을 구성하는 속성들 가운데 하나다. 사유는 신의 속성이다.[각주:3] 절대자인 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무수히 많은 속성들 가운데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또다른 속성은 당연히 물질(연장)이다.




인간은 몸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자, 세계에는 이렇듯 무수한 관념들이 존재한다. 이렇듯 많은 사물들이 펼쳐져 있는 것만큼 이렇듯 많은 관념들이 있다. 내 정신 역시 내가 가진 신체에 대응하는 한 관념이다.[각주:4] 하지만 세계에 사물들에 대한 무수한 관념들이 질서지어 존재한다고 해서 내가 이 관념들을 통해 사물을 곧바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관념들을 직접적으로 갖는 존재는 절대자인 신뿐이다. 그렇다면 신과 다른 나는 내 신체와 외부를 어떻게 지각할까? 내 신체를 통해서다. 내 신체는 외부 물체와 끊임없이 마주치고, 그 흔적(변용)이 신체에 남는다. 이 흔적에 대한 관념을 통해 나는 비로소 내 신체와 외부 물체의 본성을 부분적으로 반영하는 관념을 갖게 된다. 세계에는 모든 실재에 대응하는 관념들이 질서지어 존재하지만 인간인 나는 반드시 내 신체의 변용을 통해서만 세계에 대한 이해에 다가갈 수 있다. 모든 관념을 소유한 신은 사건의 원인과 결과를 발생적으로 이해하지만, 나는 신체에 남겨진 사건의 결과만으로 세계에 대한 인식을 채워나간다.

스피노자를 몸의 철학자라고 할 수 있다면 이렇듯 신체가 인간이 세계에 대한 이해에 다가갈 수 있는 일차적 장소임을 강조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일차적이라 함은 신체가 외부를 인식하는 통로라는 의미에서만은 아니다. 사실 신체는 단지 외부를 인식하는 관문의 역할만 하지는 않는다. 내 몸은 그 자체로 세계의 작동 원리를 품고 있다. 몸을 이루는 부분들의 생김과 사라짐, 몸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속도가 빚어내는 역동적 관계들, 몸이 바깥과 마주치며 흔적을 남기거나 흔적이 남겨지는 방식, “이러저러한 만남, 배치, 결합”, 이 모든 것이 자연의 질서 즉 필연적인 기계론적 인과법칙을 따른다. 스피노자가 “사람들은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고 했을 때 이 몸은 “자연의 신체”[각주:5], 즉 필연적인 기계론적 인과 질서를 그 안에 품고 있는 장소로서의 몸을 말한다. 그리하여 들뢰즈는 이렇게 “신체는 우리가 그것에 대해서 갖는 인식을 뛰어넘는다”고 강조한다.[각주:6]



의식과 무의식

그런데 들뢰즈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우리가 신체의 능력들에 대한 인식을 획득하고자 하는 것은, 그와 평행하게 의식을 벗어나는 정신의 능력들을 발견하여, 그 능력들을 비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선언한다.[각주:7] “의식을 벗어나는 정신의 능력들”이란 뭘까. 평행론에 따라 정신은 신체의 모든 변용에 대한 관념들이 질서를 이루고 모여 있는 장소다. 그런데 의식은 신체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 보지 못한다. 내 감각은 신체의 모든 부분을 포괄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우리의 의식은 신체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부분적으로 지각한다. 그리고 부단하고 절박하게 이 부분적 지각에 기초해 인식한다. 하지만 그것은 자주 잘려나간 인식이다. 들뢰즈는 의식을 혼동된 상상의 장소로 무의식을 기계론적 법칙을 따르는 질서정연한 필연성의 장소로 대비시킨다. 의식은 “환상의 장소”로 “평가절하”된다. 중요한 것은 “신체의 미지(未知)에 못지않게 근원적인 사유의 무의식”을 발견하는 것이다. 

‘사유의 무의식’이란 뭘까. 잠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비(非)의식적 존재를 떠올려보자. 가령 돌멩이에게는 ‘의식’이 있을까? 평행론에 따르면 돌멩이의 신체에 대응하는 관념이 존재한다. 돌멩이가 무언가와 충돌해 일부가 깨지면 이것은 신체의 변용이며, 돌멩이의 정신에는 이 신체 변용에 대한 관념이 존재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 돌멩이에게도 우리와 같은 의식이 있을까? 마트롱은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에서 물체의 통합성과 복합성에 따라 영혼의 등급을 나누고 각 영혼이 의식적 존재일지 여부를 가늠한다. 마트롱의 분류에 따르면 돌멩이를 ‘잘 통합되어 있지만 덜 복합적인 물체’이고 이러한 물체는 의식이 없거나 없는 거나 다름없는 영혼을 갖는다.[각주:8] 돌멩이는 사실상 무의식적 존재다. 의식이 없는 돌멩이는 우리와 달리 혼동이 없을 것이다. “외부 원인들에 의해 일정하고 규정된 방식으로 존재하고 작동하도록 전적으로 결정된 피조물”[각주:9], 즉 완벽하게 수동적인 존재지만 의식이 없는 돌멩이에게는 슬픔도 없다. 넓게 봤을 때 온 우주는 인과적 필연성을 따르는 하나의 거대한 기계다. 기계에는 혼동이 없다. 의식이 없는 기계에게는 합성과 해체에 따른 기쁨도 슬픔도 없다. 들뢰즈가 의식을 평가절하하고 무의식을 옹호할 때 그는 그 어떤 의식도 없이 그저 홀로 작동되는 기계로서의 실존 상태를 옹호하는 것일까. 인간에게 그러한 존재가 되라는 것일까.




상상과 기쁨, 자유로움으로 가는 징검돌

들뢰즈가 스피노자의 철학을 순수 긍정의 철학이자 기쁨의 철학으로 본다는 점을 생각할 때 분명 그건 아닐 것이다. 묘하게도 <에티카>의 마지막 정리에 ‘의식’이라는 말이 다시 등장한다. “있는 그대로 고려된 현자는 마음의 번뇌가 없고, 어떤 영원한 필연성에 의해 자기 자신과 신과 실재를 의식하기 때문에 결코 존재하기를 그치지 않으며, 오히려 항상 진정한 마음의 만족을 지닌다.” 들뢰즈 역시 스피노자가 우리에게 제기한 중대한 실천적 문제를 이 마지막 정리에서 찾는다. 실천적 문제는 “어떻게 자기 자신, 신, 그리고 사물들을 어떤 영원한 필연성에 따라 의식할 것인가”다.[각주:10] 그러니까 의식은 환상의 장소에 지나지 않지만 인간의 치열한 분투의 과정 끝에서 자기 자신과 신과 실재를 어떤 영원한 필연성의 관점에서 보는 장소로 거듭난다는 말이 된다. 내가 집중해야 할 부분은 무의식이 아닌 의식이다. 우리는 의식에서 일어나는 상상과 기쁨에 따라 움직인다. 그것이 삶의 실험이다. 

앞서 말했듯 우리는 오로지 신체 변용의 관념을 통해 신체를 ‘의식’할 수 있다. 신체 변용은 원인이 알려지지 않은 결과로서의 흔적일 뿐이기에 초기 우리의 의식은 주로 잘려나간 인식이다. 아기는 자신의 뺨을 할퀸 것이 자신의 손톱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그저 할퀴어진 피부에서 오는 얼얼한 감각만을 느낄 뿐이다. 아기는 운다. 누군가 다가와 피부를 어루만져 준다. 아기는 또 운다. 이번에는 누군가 입에 젖병을 물려준다. 아기는 운다는 행위와 불편의 해소를 일종의 인과관계로 연결 짓는다. 이렇듯 인간의 시작은 혼동된 상상으로 차 있다. 하지만 이 상상은 전적으로 부적합한가? 그렇지 않다. 우는 행위가 타인의 도움을 불러오는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지만 그 행위에는 분명 적합한 무언가가 있다. 우는 행위가 애정어린 손길과 만족감이라는 결과를 불러온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지만 간접적인 원인은 된다. 지금 아기에게 울음은 삶의 실험이다. 때로는 아기 울음소리를 귀찮아하는 무정한 어른에게 찰싹 손찌검을 당할지 모른다. 돌처럼 나무처럼 그저 가만히 있었다면 당하지 않았을 일이다. 지금으로서는 울기가 아기의 코나투스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이다. 힘껏 울어야 한다. 그리고 아기는 언제까지나 아기로 머무르지 않는다. 그의 신체와 정신은 성장한다. 어느 시점에서 그는 우는 것이 자신에게 언제나 이로움을 가져다주지는 않았음을 본다. 울면 불편이 해소된다는 생각은 부적합한 관념임을 깨닫는 것이다. 그는 여전히 울 때가 있지만 자신의 도울 다른 방법들도 터득한다. 새로운 앎을 매번 힘껏 시도한다. 그는 자신의 신체의 변용을 통해 얻은 새로운 관념들을 통해 새로운 인식들을 터득해나간다. 처음에는 막연했던 세계의 질서는 조금씩 또렷해진다. 

그 질서란 어쩌면 스피노자와 들뢰즈가 암시하는 것처럼 내 정신 속에 언제나 질서 있게 연관 지어져 있었지만 이전의 내 의식에는 채 잡히지 않았던 관념들의 질서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나는 노력한다. 나는 내게 나쁜 마주침을 최대한 피한다. 나는 적합한 인식을 넓혀가고 그 앎을 통해 내게 기쁨을 주는 일과 가능하면 더 마주치려 하고 슬픈 마주침은 피한다. 나는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종종 슬플 테지만 한걸음 떨어져보면 그것이 순리라 여겨지기에 이내 슬픔의 부적합성을 이해할 것이다. 나는, 모든 존재는, 늘 부단하고 절박하다. 그 과정에서 차차 내 의식 속 관념들의 질서는 점차 내 정신 안에 있되 의식에는 잡히지 않았던, 말하자면 무의식 속 관념들의 질서와 비슷해져간다. 어느 시점에는 마치 유교에서 말하는 종심(從心)의 경지처럼 마음을 따라도 도에 어긋나지 않는 때가 올지도 모른다.



사랑, 욕구가 아닌 욕망을 갖는 의식적 존재의 특권

그러면 양태로서의 인간에게 삶은 그저 지나가는 곳일까. 그가 느끼는 기쁨과 사랑은 신호등과 같은 도구에 그칠까. 인간의 삶은 ‘본질’에 집중할 때 혼란을 지워낸, 정념을 초월한 그 무언가가 될까. 아니, 현자가 되어도 그가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한 혼란은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의식적 인간이 갖는 변하지 않는 실존 조건이다. 이 모든 일이 우리가 의식적 존재이기에 일어나는 일이다. 돌멩이의 코나투스도 나무의 코나투스도 그 나름의 조건에서 언제나 자신의 한계 끝까지 간다. 실존하기를 그치는 순간까지 코나투스의 분투는 끝나지 않는다. 인간은 가장 무력한 상태로 태어나지만 실존이 주어진 그 순간부터 그의 코나투스는 언제나 자신의 한계 끝까지 간다. 의식적 존재라는 실존적 조건 속에서 인간은 때로는 겪고 때로는 행할 것이다. 의식적 존재이기에 때로는 아프고 때로는 기쁠 것이다. 돌멩이와 나무의 코나투스는 곧 욕구다. 인간의 코나투스는 여기에 의식이 더해서 욕망이 된다. 인간은 이렇게 욕망을 갖는 의식적 존재이기에 사랑이라는 것을 할 수 있다.

이 사랑은 인간을 특별한 자리에 데려다놓는다. 스피노자는 5부 정리 17에서 “신은 정념을 갖지 않으며, 어떠한 기쁨과 슬픔의 정서도 그를 변용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신은 이 세계의 모든 관념을 곧바로 갖고 있다. 그는 이 세계를 완전히 이해한다. 신은 그 자체로 완전하기에 더 큰 완전성으로도 더 작은 완전성으로도 이행할 수 없다.[각주:11] 신은 슬픔으로 괴롭거나 기쁨으로 즐겁지 않다. 그런 그에게 사랑이 있을까? “사랑은 외부 원인에 대한 관념을 수반하는 기쁨과 다른 어떤 것이 아니”[각주:12]라고 스피노자는 말했다. 외부 원인을 가질 수 없는 신이 어떤 종류든 사랑을 한다는 일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그런데 5부 정리 35에서 신은 “자기 자신을 무한한 지적 사랑으로 사랑한다.” 이상하지 않은가? 기쁨도 슬픔도 모르는 신에게 이 사랑의 감정은 과연 어디서 왔을까. 신과 사랑을 연결하는 고리는 인간이다. 신이 자기 자신을 무한한 지적 사랑으로 사랑할 때 이 사랑은 “바로 5부 정리 32의 따름정리에서 우리가 지적 사랑이라고 부른 것”[각주:13]이다. 그리고 스피노자가 정리 32의 따름정리에서 지적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은 다름 아닌 인간인 “우리가 신을 영원한 것으로 이해하는 한에서 생겨”난 사랑이다. 신은 자기 자신을 직접 사랑할 수 없다. 신은 인간을 통해 비로소 사랑할 수 있다. 사랑은 우리가 의식적 존재이기에 갖는 특권이다. 우리는 의식적 존재이기에 상상하고 기뻐하고 사랑한다. 이것이 우리 삶의 실험이다.














  1. <에티카> 3부 정리7.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은 실재들의 질서와 연관과 같은 것이다.” [본문으로]
  2. 차머스는 조회수 백만을 육박하는 테드 강연(“How do you explain consciousness?” 2014.7.14)에서 청중에게 “지구 같은 전체적인 집단은 어떨까요? 캐나다는 그 자체로 의식을 지닐까요?” 라고 묻는다. 테드 강연: https://www.youtube.com/watch?time_continue=3&v=uhRhtFFhNzQ&feature=emb_logo (한국어 자막 버전은 https://www.youtube.com/watch?v=yVsX30ms578) [본문으로]
  3. 2부 정리 1. [본문으로]
  4. 2부 정리 13. [본문으로]
  5. 3부 정리 2 주석. [본문으로]
  6. 들뢰즈, <스피노자의 철학>, 33쪽 [본문으로]
  7. 들뢰즈, <스피노자의 철학>, 같은 쪽. [본문으로]
  8. 마트롱,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 97쪽 [본문으로]
  9. <스피노자 서간집>. 331쪽 [본문으로]
  10. <스피노자의 철학>, 47쪽 [본문으로]
  11. 5부 정리 17 증명. [본문으로]
  12. 3부 정리 13 주석. [본문으로]
  13. 5부 정리 35 증명.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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