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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

왜 정서와 느낌을 구분해야 할까?

by 홍차영차 2021. 9. 17.

안토니오 다마지오는 왜 정서와 느낌을 구분하려고 했을까

: <스피노자의 뇌> 3장 느낌

 

 

나는 정서를, 신체의 행위 역량을 증대시키거나 감소시키고 촉진하거나 억제하는 ‘신체의 변용들’이자 동시에 이러한 ‘변용들의 관념들’인 것으로 이해한다. (스피노자, <에티카> 3부 정의 3)

 

<스피노자의 뇌> 1장부터 4장까지 똑같은 텍스트를 함께 읽고 토론했는데, 전혀 다른 추론이 나왔다. 코알라샘은 3, 4장 발제를 하면서 이렇게 질문했다. “안토니오 다마지오는 왜 이렇게까지 정서와 느낌을 구분하려고 할까?” 나는 저자자 결과적으로 무의식과 신체성을 강조하고 싶어한다고 생각했고, 친니샘은 의식과 이성을 행동과 정치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이라는 추론을 했다. 이런 다른 추론이 나온 것은 저자가 의심했던 것처럼 우리의 추론 능력이란 인지적 능력보다 정서 및 느낌에 더 많은 영향을 받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170쪽) 이게 바로 세미나의 묘미이고, 우리가 변화하고 확장되는 방식인 것 같다.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읽어 본 사람들이라면 정서(emotion)와 느낌(feeling)을 구분하는 안토니오 다마지오에게 조금 당황할 것이다. 물론 스스로도 “정서와 느낌을 따로따로 조사한 우 우리는 다시금 둘을 하나로 합쳐 정서로 되돌려 놓고자 한다”(159쪽)고 말하지만.

스피노자에게 정서(Affect)란 항상 ‘신체들의 변용’인 동시에 ‘변용들의 관념’이다. ‘동시에’라는 말이 중요하다. 스피노자의 ‘정서’ 정의와 결부시켜 생각해보면 <스피노자의 뇌>에서 정의하는 정서emotion은 ‘신체들의 변용’이고, 느낌feeling은 ‘변용들의 관념’이라고 쉽게 나눌 수 있다. 안토니오 다마지오 스스로 “둘을 하나로 합쳐 정서로 되돌려” 놓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왜 이 둘을 나눠야만 했을까? 이렇게 나누면서 무엇을 강조하고 싶었을까?

느낌을 갖기 위한 조건들을 살펴보면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첫째, 어떤 개체가 느낌을 갖기 위해서는 ‘신체 내부를 표상할 수단’을 가져야만 한다. 신경계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둘째, 신경계는 신체 구조 및 신체 상태를 지도로 나타낼 수 있어야 하고, 신경 패턴을 심적 패턴(심상)으로 전환시킬 수 있어야 한다. 셋째, 느낌의 내용이 전통적인 의미의 주체에게 알려져야 한다. 즉 의식이 필요하다.

4장까지 안토니오 다마지오가 느낌에 대해 여러번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은 느낌은 지각이라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정의에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 저자는 느낌이 1) 신체의 특정 상태에 대한 지각이며, 2) 이 특정 상태에 일어나는 마음의 상태에 대한 지각이라고 말한다.

느낌은 의식이 지각하는 관념이다. 자연스럽게 2장에서 정서가 느낌에 선행한다고 하는 말이 이해된다. 여기에서 정서emotion이란 신체 구조, 신체적 반응, 신체의 특정 상태를 말하기 때문이다. 생명이 자신을 유지하기 위한 항상성 운동으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정서라고 말할 수 있으며, 신경계, 의식 없이도 ‘정서’는 일어난다. 인간 이외의 동물, 식물, 사물에서도 정서가 발생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느낌은 다르다. 의식이 있는 존재에게만 가능하다.

 

여기까지 살펴보면 왜 저자가 느낌과 정서를 구분하려고 했는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느낌의 핵심이 지각, 의식이라면 의식 이전, 지각하기 이전의 무언가가 있다는 말이 된다. 스피노자에게 모든 개체와 개체의 변용은 관념을 갖고 있다.(사유속성과 연장속성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신체 반응, 신체 구조, 신체의 특정 상태에 대한 관념 역시 존재한다.

우리의 일상 생활이나 활동을 보면 우리는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신체 반응이나 구조, 특정 상태를 의식하지 못한다. 우리는 밥을 먹으면서 신체의 일부에게 음식이 잘 내려가서 소화되기까지를 의식적으로 명령하지 않고, 호흡을 하고 걷는 것조차도 아무런 의식 없이 이루어진다. 가끔 과도한 긴장과 의식으로 자신의 호흡이나 걸음걸이가 인식될 때면, 자동적 반응으로 이루어지던 신체 동작들이 어색하고 힘들게 일어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느낌은 신체 상태의 지각”이라는 똑같은 문장을 읽었음에도 친니샘과 나는 다른 추론을 했다. (이 추론이 맞고 더 추론은 틀리다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 문장이나 사실fact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전에 내가 어떤 관념들을 갖고 있었는지, 또한 내 신체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었는지(정서)에 따라서 다른 결론에 다다를 수 있다. 최근 내 관심은 언제나 신체성과 무의식, 정신의 발견에 고착되어 있어서 다른 것을 보지 못하고, 나에게 발생하는 새로운 관념들과 경험들을 이것들과 엮어서 생각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나에게는 다른 문장들보다도 아래와 같은 문장들이 더 깊게 새겨지는 것 같다.

 

욕구 시스템은 포착하기 어렵거나 쉽게 포찰할 수 있는 수많은 변화들을 생성한다. 이 변화들은 궁극적으로 욕구를 실현하기 위한 일상적인 준비 과정이다. … 이찌되었든, 우리의 체내 환경에 빠른 속도로 화학적 변화가 일어나고, 모호하게 규정된 우리의 소망에 맞추어 심박과 호흡이 변화하고, 혈액의 흐름이 재분배되며, 비록 실제로 실현될 가능성은 적지만 당신이 취하게 될지 모르는 다양한 움직임에 맞추어 근육이 준비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우리 몸의 근골격계의 긴장이 재배치된다. 실제로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존재하지 않았던 긴장이 새로이 나타나고 이상한 이완 상태가 나타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에 상상이 등장한다. 이제 소망은 더욱 분명해진다. 화학적/신경적 보상 기구가 완전 가동에 들어간다. 그리고 당신의 신체는 궁극적으로 쾌락의 느낌과 관련된 행동의 일부를 전개한다. 이것은 매우 활발하며 또한 뇌에서 신체를 감지하고 인지적 활동을 지지하는 영역에 분명하게 지도화된다. 욕구의 목표에 대한 생각은 기분 좋은 정서를 만들어 내고 그에 따라 기분 좋은 느낌을 낳는다. 이제 욕망이 당신을 온통 사로 잡는다. (<스피노자의 뇌> 1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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