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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일과 불안

유동하는 세계로부터 온 편지

by 홍차영차 2019. 4. 14.

견고한 세계에서 액체 근대로

 

이제 우리는 어떤 것이든 오래 지속되는 것들을 참지 못한다. 무료함 속에서 결실을 일구는 법을 우리는 이제 모른다. 따라서 모든 질문은 이렇게 응축된다. 인간 정신은 스스로 만들어낸 것들을 과연 정복할 수 있을까? - 폴 발레리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전단력이 가해지면 다른 부분에 대한 한 부분의 위치에 계속적이고 회복할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나는데 이 변화가 바로 유체의 고유한 특성인 흐름을 형성하게 된다. 이와 반대로 고체는 전단력이 가해지면 비틀리고 구부러진 채로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의 원제목은 <액체근대로부터 온 편지>이다. 바우만은 왜 지금의 세계를 액체근대(Liquid Modernity)라고 부를까? 사실 근대는 그 시작부터 어떤 액화의 과정이었다. 마르크스 역시 <공산당선언>에서 부르주아 자본주의 시대를 ‘견고한 것들을 녹이는 것melting the solids’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언급했던 ‘액화과정’은 바우만이 지적하고 있는 ‘액체근대’와 분명하게 다른 점이 있다.

새로운 질서를 만들려면 기존의 것들을 제거해야 한다. 즉 기존의 액화과정은 항상 새로운 틀, 좀더 단단한 구조, 체제, 질서를 놓기 위한 작업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놓인 새로운 질서는 이전의 질서보다 더 견고해야만(고체적이어야만) 했다. 이런 방식으로 봉건 질서는 부르주아 형상을 따라 새로운 자본주의 질서를 만들어냈다.

여기에 차이가 있다. 바우만이 지적하고 있고, 바로 우리들이 맞닥뜨리고 있는 현실은 더 이상 아무런 질서, 규칙, 틀을 제시하고 있지 않다. 계속해서 앞선 질서를 무너뜨리지만 이는 새로운 질서를 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유동하는 세계를 방해하는 경계와 담을 무너뜨리기 위해서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이라도 살 수 있는 소비의 자유가 넘쳐나는 액체근대에서 점점 공급이 부족해지는 것은 사람들이 안정적인 지향점으로 선택할 수 있는 행동 유형들, 규약들, 규칙들뿐이다.

 

원형감옥에서 탈원형감옥으로 : 속도-시간, 가벼움-이동성

근대국가에서 정치와 권력은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헤어질 것 같지 않았던 국민국가를 유지시키기 위한 평화로원 보이는 한 쌍이었다. 하지만 유동하는 세계에서 정치적 통제는 점점 힘을 잃어갔고, 이로부터 해방된 권력은 불확실성의 근원이 되고 있다. 국가기관은 계속해서 자신의 기능을 다른 곳(민간)으로 이전시키고 있고, 국가는 더 이상 개인의 안전, 복지, 윤리, 건강에 책임지지 않는다.

푸코는 근대 권력의 속성을 가장 잘 표현한 것으로 벤담의 ‘원형감옥’을 예로 들었다. 탑 위에서 감시하는 자들과 저 아래에서 감시받는 죄수들! 죄수들은 감시를 받고 있기 때문에 움직이지 못한다. 반면에 이 시기에는 무엇에 대항해야 하는지, 친구들이 누구인지 판별하기는 쉬웠다. 하지만 원형감옥 모델은 더 이상 유동하는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 

원형감옥은 분명 힘의 관계에서 반목의 상태를 묘사하지만, 또한 이는 상호결속의 모델이었다. 일을 시키고, 공부를 시키려면 감시자-감시받는 자는 ‘상호’ 묶일 수밖에 없다. 지속적인 대립이지만, 감시자와 감시받는 자는 항상 가까운 거리에 있어야 한다. 하지만 액체 시대에 감시자는 더 빠른 속도와 이동성을 획득하면서 순전히 접근 불가능한 영역으로 도망가버렸다. 오늘날 전지구적 엘리트들은 이득을 취하고 지배하지만 행정, 관리, 복지와 같은 잡무는 떠맡지 않는다. 이제 향상과 진보를 뜻하는 것은 더 가볍고 쉽게 이동가능한 것들이다. 원형감옥의 종말은 결국 ‘상호 결속 시대의 종말’을 의미한다.

 

불확실한 시대의 생활 양식, 모두스 비벤디(Modus Vivendi)

이제 누구도 질서 확립, 질서 유지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고 책임도 지지 않는다. 공간적인 냄새를 풍기는 ‘공동체’라는 말은 이미 오래된 낱말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불확실성이 넘치는 지금이야말로 공동체와 철학을 고민해야하는 시대인 것 같다.

푸코는 ‘비판’을 “이런 식으로 통치받지 않으려는 기술”로 정의했다. 사람은 통치와 권력을 떠나서 살아갈 수 없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나는 이런 대가를 치르고서는 살지 않겠다, 이런 방식으로는 살지 않겠다는 ‘자기 비판’이다. 푸코가 마지막 시기에 고민했던 것이 바로 이런 문제였다. 탈원형감옥의 시대에, 아무런 행동양식과 규범들이 주어지지 않는 시기에 개인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근대 이전에는 사람이 살아가는 다양한 방식들이 존재했다. 하지만 과학의 시대, 자본주의의 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인간이 배운 삶의 방식은 하나로 압축된다. 법에 예속되는 방식! 그리고 이런 ‘법에 예속되는 주체’를 형성하는 것은 수십 년이라는 아주 오랜 기간이 걸리는 인간 역사에서 매우 기괴한 삶의 방식이라는 점이다.

푸코의 연구에 따르면 가장 다양한 주체 생성 방식이 탐구된 시기는 로마 제국 시대였다. 2000년 전 모든 경계가 허물어졌던 전지구화된 시기였다고 말할 수 있다. 로마 제국 이전까지 서구인들은 작은 공동체 속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살아가기 위해 따로 뭔가를 배울 필요가 없었다. 각각의 공동체가 살아가는 것이 다양한 주체형성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국 시대에 다양한 생활 양식들은 파괴되었고, 바로 이때 서구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다양한 스토아 학파의 계열들이 이때 나타난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그들이 ‘공동체’를 이루며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의) 생활양식으로서 철학을 탐구했다는 점이다.

 

액체시대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공포를 자신의 원동력으로 삼고 있다. 아마도 인류가 계속해서 희망을 품고 연구해왔던 영구운동기관perpetuum mobile이라는 이상적 모델과 가장 가까운 것이 바로 공포와 공포로부터 유발된 행동들이 뒤얽혀 스스로를 재생산하는 현재의 정치 메커니즘이 아닐까. “통찰력이 뛰어난 사람”에게서 받은 편지가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는 힘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삶을 살아가는 데 더욱 힘이 되는 것은 그 길을 함께 걸어갈 친구들이 아닐까.

 

2017.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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