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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일과 불안

할 수 있음에서 하지 않는 능력으로

by 홍차영차 2018. 4. 11.

할 수 있음에서 하지 않는 '능력'으로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 4장






실존하는 것도 능력이라고 할 수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기가 없는) 밤에 자고 (태양이 떠오르는) 아침에 일어난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전기가 없던 시절에 질문할 필요가 없었다. 깜깜한 밤에 뭘 할 수 있을까. 그냥 자는 수밖에. 하지만 전기가 시골 촌구석까지 다 공급되는 지금 저녁 9시에 자고, 5시에 일어나는 사람이 있을까? 할 수 있는데 하지 않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과거에 그냥 살아가면 충분했던 일들이 ‘능력’이 되고 있다. 왜냐하면 자연스러웠던 일들을 유지하는 데에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낮에 충분히 일하고, 사색하고, 놀기가 그리 쉽지 않다. 바깥에 나가 삽질을 하던지 도끼질을 하고, 마음껏 토론하고, 신나게 소리 치며 놀 수도 그럴 기회도 거의 없다. 정신과 몸이 충분히 활동하지 못하니 푹 잘 수도, 일찍 일어날 수도 없다. 수면도 기술이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그들은 현미경을 통해 존과 내가 유리접시에 든 우리의 배아들을 보게 해주었기 때문에 나는 정말로 그것을 믿게 되었다. 그렇다 우리는 우리의 아이를 가질 수 있다, 저기에 그들이 있다.” 218

“우리는 거의 성공할 뻔 했다. 첫 단계들은 잘 진행되었다. 아마 다음 번에 더 잘할 수 있을 거야.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어.” 기술적 가능성은 은밀하게 유혹하는 힘이 있는 것이다. 219




출산과 양육의 문제에서도 마찬가지다. 현미경을 통해서 총천연색의 세포뿐만 아니라 정자와 난자를 볼 수 있게 되었고, 수많은 의학적 시술들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사회적 압력으로 작용한다. 이런 실정이다보니 과거에는 불임이 ‘운명’의 문제였을지 몰라도 이제는 적어도 어떤 의미에서는 의도적인 결정(능력)의 문제로 변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임신에 대한 최신의 방법들을 시도해 보지 않고 포기하는 사람들은 모든 책임을 감수해야 하는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처치가 진행되어 갈수록 채혈은 점점 고통스러워진다. 바늘이 찌를 때마다 내 몸이 침범당하는 것 같다. ...... 하지만 호르몬과 함께 희망도 투여된다. 남편과 나는 더욱 신경이 예민해지고 긴장되어 간다. 10일째부터 우리는 더 이상 관계를 가질 수 없었다. ...... 우리는 희망에 들떴고 우리의 희망은 매일매일 초음파실의 어둠침침한 곳에서 자라고 있었다. 우리는 전적으로 그것에 좌우되고 있었다. 217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힘들고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불임치료를 왜 (선택)했을까? “이제 해볼 것은 모두 다 해봤다. 이제 홀가분한 마음이야.” 사회가 요구하는 모든 처치들을 시도했으니 이제 주변의 가족과 사회가 주는 압력으로부터 해방될 권리를 얻게 된다(고 느낀다). 여성들은 자신들이 불임치료를 하고 싶은지에 상관 없이 새로운 사회적 통과의례를 거쳐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자가용이 있는데 걸어다니기, 냉장고와 전자렌지가 있는데 냉동식품을 사지 않기, 텔레비전이 있는데 책읽기를 어떻게 가능하게 할 수 있을까. 물론 자동차, 전자렌지, 텔레비전과 출산, 양육의 문제는 전혀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근본에 놓여 있는 전제들은 상당히 비슷한 것 같다. 기술이 점점 더 사람들은을 수동적인 존재로, 무능력의 존재로 만드는 듯 하다.

있는 것들을 모두 부정하라는 것이 아니다. 과학기술이 삶을 유예시키는 상황을 그냥 보고 있지 말고, 삶을 역동성 있게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그 노력은 이전의 노력과는 다를 것이다. 기술이 무엇인지 진보가 무엇인지 능력이 무엇인지 다시 고민해야 할 시기이다. 이제는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것이 능력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무언가를 하지 않는 것이 능력이 될 수 있다. 알면서 모른체하기가 필요하다.


2018. 0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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