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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일과 불안

남편, 아이, 강아지, 그리고 애완돌?

by 홍차영차 2018. 4. 3.

남편, 아이, 강아지, 그리고 애완돌 그 다음은?

-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 2, 3장 -



‘애완돌’ 키우는 사람들

애완돌(pet rock) 키우는 사람들이라고 들어보셨나요? 비싼 수석도 아닌 애완돌을 사람들은 왜 키울까? 조금 더 조사해보니 애완돌은 이미 1975년부터 미국에서 팔리고 있었다. 처음 애완돌을 판매한 사람은 3개월에 150만개의 돌을 팔아서 백만장자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검색창에 ‘애완돌’을 쳐보면 제법 많은 곳에서 애완돌을 팔고 있다.


“애완동물을 키우려고 했는데 출장이 잦은 편이라 항상 돌봐야 하는 강아지나 고양이를 키우기가 부담스러웠다. 손이 덜 가고 죽지도 않아 평생 함께할 수 있다는 점에서 동물보다 돌멩이가 낫다.” (조선일보, 2016. 4.30일 기사 인터뷰)


현상을 자세히 살펴보다보면 그 현상이 일어난 이유를 알 수 있다. 애완돌 키우는 사람들은 지금 우리가 마주치고 있는 ‘자유와 전통의 구속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는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시일 것이다.

전근대사회와 현대사회를 비교해보면 이전 시대 사람들의 삶이란 가업, 마을, 고향, 종교와 같은 전통적 결속들에 의해 결정되었다. 그것들은 한편으로는 제약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친숙함과 보호, 확실한 정체성을 제공한다. 반면 현대 사회에서 개인들은 전통과의 단절로 모든 것을 스스로 선택할 자유를 얻게 되었지만, 이는 동시에 물리적 안전, 정서적 안정과 함께  확실한 정체성도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말한 이후 지금까지 계소해서 사람들은 함께 살아갈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확증하고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자유를 원하지만 동시에 삶을 나눌 누군가를 바란다. 누군가와 함께 있고 싶고, 친근함과 애정을 발견하고 싶지만 역으로 책임과 의무로 인해서 자신의 자유를 구속받고 싶어하지 않는 ‘개인들’이 남편(아내), 아이, 애완견에 이어서 애완돌을 키우면서 빈틈을 메우려고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삶의 의미와 실존적 좌절

마음의 안식처와 항구이자 구속이었던 교회와 국가가 힘을 잃게 되면서 이제 사랑스런 가족, 낭만적 부부애가 최후의 보루가 되었다. “이제 신은 죽지는 않았더라도 최소한 도시에는 없기 때문에 오직 사람만이 실존적 의미의 원천으로 남게 되었다.”


뛰어난 성취를 이룬 여자들은 ... 그 성취가 자신에게 명성과 재산과 멋진 연인을 가져다 줄 거라고 믿는 겁니다. 하지만 후유, 우린 결국 사정은 정반대란 걸 알게 되죠. 우리가 이룬 그 모든 것들을 가지고 사랑의 백화점에 가 보세요. 그걸로 우리가 살 수 있는 건 우리에게 위협을 느끼는 남자, 오그라든 페니스, 그리고 자포자기뿐이죠. (에리카 종, <낙하산과 키스>) p123


‘뛰어난 성취를 이룬 여자들’의 상황이 바로 ‘개인들의 일대기’를 살아가야 하는 현대인들이 맞닥트린 현실이지 않을까. 일반적인 추세로의 개인화여성의 개인화, 이어서 기대수명의 연장으로 인해서 (1970년에) 결혼한 커플들은 이제 43년 이상을 함께 살아야 한다. 남녀 누구라도 50년이나 되는 기간동안 다른 사람의 감정적인 부분을 보살펴 줄 ‘마누라’가 되려 하지는 않는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에서 왔는가? 라는 아주 오래된 철학적 주제들”이 우리의 생활 속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는 삶의 특별한 의미를 추구하는 것을 넘어 ‘실존한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고, 실존이란 결국 다른 사람과 연결되어 있음이라는 사실이 다양한 방식(심리학, 생물학, 철학)으로 증명되고 있다.


사랑에 대한 재정의가 필요해

정확한 질문은 그 해답을 포함한다. 질문을 뾰족하게 만들고, 이에 대해 말을 만들어내야한다. 우리는 가족이란 무엇인지, 사랑이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일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물어야 한다. 이 사회는 협동과 생존이 가능하도록 하는 규칙을 스스로 만들고 동시에 스스로 그것에 복종해야할 운명에 처해있다. 확고한 규준이 줄어들수록 우리는 더욱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그런 규칙들을 만들어야하고, 외부의 권위가 부재할 때 커플들은 서로 의사소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나는 가정이 성소, 즉 재미와 즐거움만이 넘쳐나는 장소라고 보지 않는다. 그보다는 가장 야만스러운 피조물인 인간이 다른 사람들과 비폭력적이고 비파괴적인 방식으로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는 것을 배우는 곳이다. ... 함께 사람 사람에게 자신을 완전히 드러내고 동시에 한 사람이 그의 개성, 인간사, 희망과 공포를 알아감으로써 그가 만들어 내었던 이미지를 수천 개의 조각들로 깨버리는 일은 ... 오래 걸리고 매우 고통스러운 경험이다. 이런 의미에서 결혼과 가족 생활은 ... 삶의 오물통과 마주하기에 훌륭한 장소이다.

그래서 나는 26년 동안의 결혼 생활을 하고 나서 결혼의 목표가 행복이 아니라는 결론을 얻었다. 결혼은 증오심을 극복할 뿐 아니라 증오할 수 있는 곳, 웃고 사랑하고 의사소통하는 것을 배우는 곳이다. p172


너무 어렵고 진지하다고 생각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직면한 현실은 ‘평등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자신의 고유성을 펼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묻고 있다. 이 시도가 새롭고 실험적이어서 두려움을 줄 수 있지만 삶 그 자체의 의미를 재정의한다면 충분히 해볼만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오히려 서로에게 의지하는 것, 책임을 나누어지고 가족을 부양하며 양성간에 노동을 분담하고 살림을 꾸려나갈 수 있는 실제적인 능력을 공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푸코의 이야기로 마무리해보자. <주체의 해석학>에서 푸코는 ‘자기 배려’라는 개념을 이야기하면서 이전과 다른 새로운 주체형성에 도전할것을 이야기했다. 여기서 자기 배려란 우리들 각자가 지금 형성되어 있는 ‘개인의 유형’에 예속되지 않고, 자기를 하나의 예술작품-정해지지 않은 유일무이한 것-으로 만들 수 있도록 새로운 형태의 주체화에 도전하는 기예이다. 이런 모습을 위해 우리는 부단히 자기 삶의 새로운 형태를 모색하고 변경하는 과정을 지속해야 한다. 두려워하지 말자. 자신의 삶을 유일하고 독특한 예술품으로 만들어 가는 것, 한번도 되어보지 못한 나 되어보기! 이런 실험을 친구와 함께 한다면 흥미진진하지 않겠는가?


2018. 04.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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