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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일과 불안

가족을 위협하는 사랑

by 홍차영차 2018. 3. 28.

가족을 위협하는 사랑?

-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 1장 -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 제목이 모든 것을 말한다. 울리히 벡과 엘리자베트 벡은 “사랑이 혼란에 빠져 있다는 것이야말로 현 상황에서 지극히 정상적인 상태”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랑은 가족 관계를 튼튼하게 만드는 요소이고, 또한 사회를 안정되게 하는 강력한 요소가 아닌가. 물론 사람들이 살다보면 성격 차이 혹은 실수로 이혼에 이르게 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의 전제 역시 사랑으로 하나되는 가족이 아니였던가. 그런데 사랑이 우리 사회의 위험으로 떠오르고 있을뿐 아니라 가족을 위협하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울리히 벡은 근대 이후 지속되는 강력한 ‘개인화’의 파도와 남녀 양성의 ‘평등화’가 사랑을 위험한 것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요청들로 인해서 오랜 시간에 걸쳐 남녀에게 요구되어왔던 관습과 규범이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남녀의 성별 분업은 오래전부터 있었다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분명히 산업 사회의 성별분업은 극히 현대적인 형태이다[각주:1]. 

봉건사회의 해체로 인해서 개인이 출현하게 되었고, 이 개인들은 자신의 생존을 스스로 책임져야했다. 이렇게 첫번째 개인화의 파도로 남성은 일을 하고 여성을 가정을 지킨다는 핵가족이라는 셀이 만들어졌다. 화폐로 보상받는 노동을 하는 남성과 그림자 노동으로 불리는 무보수 노동으로 남성을 돕는 여성, 그리고 예비노동자로서 가족에서 키워지는 아이들로 구성된 가족! 이러한 성별 분업(임금노동과 그림자 노동)이 없었다면 근대 산업사회는 이렇게 깊게 뿌리내리지 못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성별 분업이란 오랜 전통의 잔재가 아니라 산업 사회의 토대로 작동하고 있다.


클림트[각주:2], The Virgin 1913


19세기에 튼튼하게 작동했던 이 토대가 20세기를 지나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제2의 개인화의 파도인 여성의 개인화가 형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법적으로 동등한’ 권리가 여성에게 주어졌다. 그중에서도 특히 여성들은 ‘동등한 교육기회’를 갖게 되면서 성별 분업이라는 산업 구조의 토대에 대해 질문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질문은 핵가족으로 유지되고 있는 가족 형태에 대한 생각에도 영향을 미쳤다. “한 여성이 글을 일을 수 있게 된 순간 여성 문제가 등장했다.” 

사랑으로 결혼했고, 가족이 되었다고 하지만 이제 사랑은 사랑만의 문제가 아니다. 사랑, 결혼, 가족을 이야기할 때면 동시에 직업, 법률, 문화, 경제를 함께 언급해야 한다. 사랑한다고 바로 공식적인 결혼에 들어설 필요가 없어졌다. 법적인 결혼에 들어갈 수도 있지만, 동거 상태로 살아갈 수도 있으며, 따로 살면서 정서적인 교류를 나누면서 살 수도 있다. 이사를 갈 때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남편과 아내 중에서 누구의 직장을 유지하는게 좋을지를 고려해야한다. 이렇게 새로워진 조건 속에서 설거지를 하고, 육아를 돕는다고 말하는 남편들에게 여성들은 개인 대 개인으로 이렇게 질문한다. “왜 가정일을 ‘돕는다’고 말하지? 설거지, 음식, 육아는 우리 공통의 일이잖아!”라고. 이런 질문에 대부분의 남성들은 당황하고 있고, 사랑과 가족에 대해서 혼란스럽다고 생각한다.

거칠게 표현해보자면 포스트모던의 기치 아래에서 기존에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관습과 전통들은 점점 더 효력을 잃어가고 있으며, 사람들은 새로운 생활 양식의 발명을 요청받고 있으며 시도하고 있다. 이중에서도 가장 역설적인 상황은 가족의 상태이다. “남녀가 점점 평등해질수록 가족의 토대는 점점 더 불안해졌다.” 사랑이 가족을 위협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랑으로 위협받은 가족이 해체되고 나서도 남녀 모두는 다시 사랑을 찾는다. 홀로 있는 외로움을 견딜 수 없고, 정서적 교류 없이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봉건사회에 계급 투쟁은 모두가 인정하는 빈곤과 고통으로 일어났고 ‘공적 투쟁’으로 해결되었다.  자본가와 근로자의 투쟁 역시 공적 투쟁의 몫이었다. 하지만 근대 사회의 남녀 성별 투쟁은 비밀리에 다뤄지고 은폐되고 있는 실정이다. 남녀의 문제는 사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각각의 개인들 스스로가 감당해야 한다고 말한다. 계급 투쟁과 달리 남녀의 성별 투쟁은 아주 사소해 보이는 부엌, 침실, 놀이방과 같은 곳에서 터져나오고 있다. 많은 남성들은 말로는 여성의 해방에 동의한다. 하지만 그들의 핵동은 역설적으로 더욱 완고해진다. ‘새로워진 조건’과 ‘낡은 의식’의 충돌이라고 해야할까. “대다수 남자들은 남자 주부의 역할은 인정한다. 하지만 오직 나 아닌 다른 남자들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남녀 양성의 대결은 맹렬하며 끝이 없다. 왜냐하면 남녀 모두가 집 밖에서는 성별에 관한 고정(기존)관념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사생활에서는 이러한 관념을 내던지기를 서로에게 요청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가족은 투쟁의 원인이 아니라 장소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핵가족 형태에 대한 재고 없는 남녀의 함께 살기는 지속된 전쟁일수밖에 없고, 남녀의 불평등을 전제하고 있는 제도들 안에서 평등은 이뤄질 수 없다.



2018. 03. 28


  1. 일리치는 토착적vernacular라는 단어를 쓰면서 이를 한 마을, 사회를 넘어서 남녀 성별에까지 적용하고 있다. 즉 , 근대 이전에는 남성과 여성이 담당한 토착적 영역이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는 여성에 대한 토착적 부분을 인정하지 않으며서, 남녀를 동일한 출발점에 서게 한다는 것. 즉 현대의 여성들은 이중의 차별을 겪고 있다고 말한다. [본문으로]
  2. 책의 표지그림으로 클림트의 그림을 선택한 것은 적절하다. 클림트는 19세기말과 20세기 초에 남성성(권력)으로 대변되어 세상에서 여성성으로 변하고 있는 세계를 자신의 그림으로 표현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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