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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일리치

<학교없는사회> 3 - 에피메테우스적 인간

by 홍차영차 2017. 7. 9.

에피메테우스적 인간


키워드 : 프로메테우스와 에피메테우스, 판도라, 기대와 요구, 희망, 착한 사마리아인, 최선이 타락하면 최악이 된다, 악의 신비, 비극적 반역



기대와 요구needs에서 희망으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일리치는 자신의 첫 책으로 <학교없는 사회>를 출간했다. 이는 단순히 학교, 교육에 관한 책이라기보다는 ‘학교화’되고 있는 근대 사회 전체에 대한 근원적 비판을 담고 있다. 일리치는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과정이 하나의 ‘의례’가 되었다고 말하면서, 학교화된 사회를 통해서 ‘인간 그 자체’가 위기에 직면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학교없는 사회>에서 시작해서 생의 마지막까지 계속하여 무능력해진 인간과 자율의 문제를 제기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간의 어떠한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도 제도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일리치에 따르면 자신의 욕망과 요구needs라고 생각하는 많은 것들은 사실 제도와 서비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만약 달에 가는 운반체가 고안된다면 달에 간다는 수요needs 또한 만들어 내게 된다는 말이다. 갈 수 있는 곳에 가지 않는다는 것은 이제 사람들로 하여금 욕구불만의 상태로 만들어버린다. 

인간은 판도라가 놓친 악을 가두고자 하나 하나씩 제도를 만들었지만, 인간은 결국 스스로가 만든 상자(제도)에 갇히게 되었다. 이제 “발전이라는 미신이 이뤄지기를 기원하는 기우제의 춤이 불을 붙인 (기대와) 요구”(<반자본발전사전>, p198)를 버리고, 타자의 자의성에 호소하는 희망을 바라봐야할 때이다. 희망은 언제나 뜻밖의 것, 놀라운 것 쪽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일리치가 7장에서 기술, 합리, 이성의 프로메테우스(먼저 생각하는 자)가 아니라 에피메테우스적(나중에 생각하는, 어리석은) 인간을 찾는 이유이기도 하다.


여행자와 원시인

일리치는 <학교없는 사회>를 통해서 인간의 무능력과 자율에 대해 논했다. 그러면서 그는 책의 마지막 장에서 하루에 고작 12대의 차가 지나다니는 멕시코 마을 이야기를 꺼낸다. 

한 멕시코인이 자기 집 앞의 도로 위에서 도미노 놀이를 하고 있었고, 맹렬한 속도로 달려오는 차에 치여 죽었다. 일리치는 이 사건에 대한 여행자와 원시인의 반응을 언급한다. 차를 운전하던 미국인 여행자는 심히 혼란스러워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이 잘못한 것이다.” 얼핏 보기에 이는 원시인이 절대적인 무언가(터부)에 의해 죽어버린 동료의 죽음을 보고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는 정반대의 의미를 가진다. 원시인은 무엇인가 알지 못하는, 말도 하지 않는 절대성을 비난하는 것이고, 여행자는 자동차의 비정한 논리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원시인은 책임을 느끼지 않지만, 여행자는 책임을 느끼면서 그것을 거부하려고 한다. 그런데 일리치가 보기에 어느쪽의 반응에도 드라마의 고전적 양식인 비극의 형식, 즉 ‘인간적인 노력’과 ‘반역의 논리’가 없다. 원시인은 아직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여행자는 이미 그것을 상실했다.

‘기대’에 익숙한 여행자에게 이 죽음은 어쩔 수 없는 희생이다. 왜냐하면 기대란 인간에 의해 계획되고 통제된 결과에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빨리 이동하기를 요구받는 도구인 자동차를 타게 된 이상, 이 죽음은 어쩔 수 없는 손실일 뿐이다. 미안하지만 이는 우리들의 예측 속에 있다. 운전자는 조금 당황할 뿐이다. 반면 원시인은 그 사고에 대해서 어떤 질문도 던지지 않는다. 그에게 이 사건은 절대적인 것으로 인해 일어난 저항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리치가 말하는 희망은 이 여행자와 원시인 사이 어딘가에 놓여 있는 것 같다.



착한 사마리아인과 에피메테우스적 행동

일리치는 1976년 CIDOC를 해체하고 나서 동양을 여행하고 동양의 언어를 배우면서 근대성의 근원을 살펴보고자 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새로운 언어를 익히는 일이 쉽지 않음을 깨닫고, 대신 서양의 12세기를 탐구하면서 근대성의 근원을 탐구한다. 그가 12세기에 머무르게 된 것은 우연일지 몰라도 12세기는 진짜 전환점이었다. 연구의 결과로서 그는 교회의 소명을 제도화, 정당화하고 관리하려는 시도에서 근대성의 뿌리를 발견했다. 그가 보기에 서양 세계의 역사는 복음의 타락 과정이었다. 일리치가 <학교없는 사회>에서 ‘에피메테우스적 인간의 재탄생’이라 부른 것은 착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해석과 비교해볼 수 있겠다.

일리치는 서구 사회에서 가장 잘 알려진 성경 이야기를 통해서 자신의 논지를 펼친다. 한 율법학자는 예수에게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 질문을 던졌다. 이에 대해 예수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Jerico로 가던 유대인 남자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남자는 여행 도중 강도에게 습격을 당해 모든 것을 빼앗기고 목숨도 위태로운 상태였다. 마침 사제와 레위인이 그 길을 지나갔지만, 두 사람 모두 멀찍이 그를 보고서는 지나쳐 버렸다. 그리고 사마리아인이 왔다. 사마리아인은 북쪽 왕국에 살던 혼혈민족인데, 이들은 유대인들에게는 적인 동시에 멸시당하던 민족이었다. 이 사마리아인은 쓰러져 있는 유대인을 치료해주고 가까운 여관에 데려가 완쾌할 때까지 쓸 숙박비도 지불했다.

이는 매우 친숙한 이야기로 ‘착한 사마리아인’은 흔히 ‘필요할 때 도와주는 친구’로 설교된다. 그리고 13~17세기 대부분의 설교를 살펴보면 이 설교의 교훈은 ‘이웃에게 어떻게 대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집중되어 있었다. 하지만 일리치는 바로 이 익숙한 이야기에 예수의 이야기가 전해주는 충격적인 의미가 가려져 있다고 말한다.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는 현재 다친 유대인을 도와주는 팔레스타인 사람을 떠올릴 수 있다. 이렇게 봤을 때 그의 행동은 단순한 선행을 넘어서 적을 도운 행위, 즉 일종의 국가 반역죄를 저지른 셈이다. 그는 선택의 자유를 행사한 것이지만, 이는 매우 급진적인 새로움이었다. 예수는 “나의 이웃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이웃은 선택하는 것이지 선택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이야기했다. 이는  범주화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기독교 초기, 기독교인들은 항상 자신의 집에 여분의 침상과 약간의 마른 빵을 구비해두는 전통이 있었다. 주 예수가 갈 데 없는 행인의 형상으로 문을 두드릴 때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교회가 공인되고, 사회적 단체들이 만들어지자 이러한 보살핌은 이제 개별 가정의 선택과 무관한 제도적 장치가 되었다. 환대가 서비스로 변형되자마다 누가 나의 타자가 될지 고를 수 있었던 자유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권력과 돈의 사용으로 변했다. 이는 사마리아인 이야기에 내포된 자유의 모습을 박탈하는 것이었다.

바로 여기에 일리치가 말하는 자율이 있다. 사마리아인은 어떤 규율이나 법칙에 묶여 행동하지 않았다. 같은 민족, 같은 종교가 아니더라도 그 사람을 내가 이웃으로 볼 것이냐 말 것이냐는 자신의 자율적인 행동에 달려 있다. 사마리아인은 다친 유대인을 돌봐주기로 선택했고 그렇게 행동했다. 프로메테우스적 관점으로 볼 때 사마리아인의 행동이 어리석은(에피메테우스적) 일이다. 하지만 친구를 대할 때 이런 예측 가능성과 기대를 배제할 때에만 우리는 그로부터 놀라움(선물)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독특한 어리석음의 역전은 복음이 악의 신비를 표상하기 때문에 가능했다. 


비극, 인간적인 노력과 반역의 논리

다시 여행자와 원시인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부시맨에게 이 사건은 ‘마법’의 법칙이었고, 미국인에게는 ‘과학’의 법칙이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일리치는 흥미롭게도 양쪽 누구도 ‘비극적인 반역’을 경험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비극의 형식으로서 인간적 노력과 반역의 논리! 아마도 그리스 비극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특징들이 일리치가 생각하는 인간의 자율적인 행동과 연계되어 있는 것 같다. 자율과 비극!

비극은 한 마디로 표현해 보자면 ‘피할 수 없는 운명과 마주선 인간’을 보여준다. 그리고 여기서 비극적 상황이라는 것은 똑똑하거나 아무리 뛰어난 능력의 인간이라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말한다. 비극은 그 내용이 슬프기 때문에 비극이 아니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을 살아가는 인간을 보여주기 때문에 비극이다.


그리고 그는 단검처럼 날카롭게 피를 내뿜으며

피이슬의 검은 소나기로 나를 쳤소. 그래서 나는

이삭이 팰 무렵 제우스의 풍성한 비의 축복을 받아

기뻐하는 곡식 못지 않게 기뻤소. …

나는 이 일을 자랑스럽게 여기오. 그리고 시신에

제주를 뭇는 것이 격식에 맞는다면, 이러한 내 행동은 

정당하다 할 것이오. 정당하고 말고요. 이 사람은

집 안에 그토록 많은 저주스런 악으로 잔을 채워놓고는

이제 귀국하여 스스로 그잔을 비우고 있으니 말이오. <아가멤논> 1389행 이하


비극의 어떤 특징들이 일리치가 말하는 자율적 인간을 부활시킬 수 있을까. 첫 번째, 비극에는 어쭙잖은 타협이나 적당한 용서가 없다. 비극의 주인공들은 아가멤논을 죽인 아내 클뤼타이메스트라처럼 치열한 극단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자신의 선택에 대한 모든 결과들을 받아들인다. 둘째로, 비극은 정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동일한 질문을 던질 뿐이다. 그리스 비극의 지혜는 비극이 대립의 해소를 지향하지만, 결코 대립이 해소되는 지점을 명시적으로 제시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어떤 한 인간도 범주화될 수 없는 특이성을 갖고 있으면, 세상의 어떤 사건도 동일한 정답으로 해결될 수 없다. 인간이 그 어떤 결정을 하더라도 대립과 갈등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운명에 대한 범주화된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 운명에 맞서 나가는 것 뿐이다.

비극의 주인공들은 상황을 탓하면서 포기하기 보다는 고통과 절망을 스스로가 살아가야 하는 조건이라고 생각했다. 고통과 절망, 실패와 아픔을 없어져야 할 것이라기 보다는 삶의 한 부분으로 바라봤다. 이런 관점에서 삶을 바라보게 될때 우리는 삶을 다른 방식으로 대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중요한 것은 죽음, 고통, 실패, 시련, 아픔과 같은 운명과 어떻게 관계맺을 것인가이다. 그 피할 수 없는 운명에서 스스로가 선택한 삶을 감당해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극의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선택은 수동적이라기보다는 능동적이라고 할 수 있고, 일리치가 말하는 자율적 삶을 잘 드러내준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에피메테우스적 인간

제도(악)로서 제도(악)를 고치려고 했던 시도는 처음부터 잘못된 출발이었다. 일리치의 말대로 이제 인류의 생존 여부는 지금이라도 ‘희망’을 사회적 힘으로 재발견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왜냐하면 기대는 있을 법한 현실을 상대하지만, 희망은 종잡을 수 없는 현실을 상대하기 때문이다. 단순하게 말해서 희망은 선물을 받고 싶은 상대에게 소망을 거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은 길거리의 나무와 TV에서 듣는 농담까지도 제도적 요구와 막대한 비용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욕망과 공포까지도 제도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있다. 이제 제도가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을 요구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존재가 된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모든 악을 놓쳐버린 판도라가 동시에 ‘희망의 보존자’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그리스 신화에는 홍수가 휩쓴 이후 새로운 인간에 대한 예언이 나온다. 흥미로운 점은 그 새로운 인간들이 프로메테우스의 아들인 데우칼리온과 에피메테우스의 딸인 퓌라의 후손이라는 점이다. 그리스인들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새로운 세상 역시 지금 있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을. 이제 우리는 기대보다 희망 쪽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붙일 이름이 필요하다. 어둠 속에서도 친구로 인해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는 자들. 일리치는 이들을 에피메테우스적 인간이라고 부르자고 제안한다.


사람이 어둠 속에서 살고 있으면서

어둠 속에서 친구를 얻는다면

어둠도 또한 좋은 것이 아니겠는가.


누구에게나 자신의 세계가 있고

그 세계에는 즐거운 한때,

그리고 슬픈 한때도 있다.

그 어느 것도 자신의 것이다.



2017. 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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