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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일리치

<학교없는사회> 2 - 종교가 된 학교

by 홍차영차 2017. 7. 9.

세계 종교가 된 학교


키워드: 학교의 현상학, 보호자(관리자)-설교자-치료자 교사, 유년기의 탄생, 전일제 출석, 세속의 목사, 끝없는 소비, 새로운 세계 종교, 진보의 의례, 학교=신화 만들기mythpoiesis, 소외



<학교없는 사회>를 출판하고 나서 일리치는 전 세계로부터 수백 편의 비평을 받았다. 그런데 정작 일리치가 그 책에서 유일하게 논의해고 싶어했던 두 챕터에 대해서는 단 한 통의 편지도 받지 못했다. ‘진보의 의례화’와 ‘에피메테우스적 인간’. 아무런 문제가 없기 때문일까 아니면 ‘학교를 없애자’는 구호에 다른 모든 디테일들이 묻혀버렸기 때문일까? 어찌되었든 이후의 행적을 보더라고 일리치가 말했던 의례와 에피메테우스적 인간은 분명 그를 관통하는 언어이다.

사실 학교를 의례와 연결시킬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독특한 이력때문이었다. 그는 카톨릭 신부로서 공부했을 뿐만 아니라 역사와 철학을 전공하기도 했다. 분명 일리치는 신학과 교회학이라는 배경 덕택에 범세계적 제도인 학교가 교회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최선이 타락하면 최악이 된다.”는 말로 표현하는 근대성에 대한 일리치의 이해는 바로 여기로부터 출발할 수 있다. 즉 교회는 성찬을 통한 공동체 의식을 강제적인 의무로 만들었고, 그 의례에 불참하면 죄를 저지르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여기에서 타락이 시작된다. 

그리고 일리치가 교회같은 국가라고 명명했던 국가는 교회처럼 고유의 의례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학교는 ‘인간이란 그가 태어난 세상에 대한 비법을 전수받을 필요가 있고 이 비법 전수는 교사라고 불리는 공인된 교리문답 전수자들에 의해서 잘 이루어질 수 있다’는 생각과 함께 시작되었다.


<학교없는사회>의 단초를 제공했다고 말했던 <아동의 탄생> 저자 필립 아리에드


유년기의 탄생

일리치는 학교라는 단어를 있는 그대로 다시 바라보자고 제안한다. 기존에 우리가 ‘학교’라는 낱말에 떠올렸던 표상들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현상으로 학교를 정의하자고. 이렇게 바라본 학교라는 현상은 “특정한 연령층을 대상으로, 의무적인 교육과정에 전일제 출석을 요구하는 교사와 관련된 과정”으로 드러난다.

학교의 현상학에서 일리치가 가장 놀랍게 주목한 것이 ‘특정한 연령층’이라고 구분하여 아동이라고 부르는 ‘유년기’의 탄생이다. 학교라는 제도가 있기 전에 이렇게 규율적으로 똑같은 연령의 아이들이 모여서 똑같은 내용을 배운다는 것은 현상적으로 일어나지 않았다. 사실 같은 나이대의 아이들이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지식을 대상으로 학교에 앉아 있는 모습은 엽기적으로까지 느껴진다. 그리고 100여년 전의 우리나라 서당을 떠올리다고 하더라도 서로 다른 나이의 친구들이, 심지어 세대를 넘어서 함께 공부하는 일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아동의 탄생>을 쓴 필립 아리에스는 13세기부터 17세기를 거치면서 ‘유년기’가 탄생했다고 말한다. 아이들을 위한 옷은 따로 없었으며, 그저 어른들의 옷을 줄여서 입었을 뿐이다. 그리고 아이들이 어른들과 함께 도박을 하거나 음담패설을 주고받는 것 역시 중세의 사람들(어른과 아이)에게는 매우 친숙한 광경이었다. 왜냐하면 천사같은 모습의 에로스가 그림으로 표현되기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아이들이 순진무구하다거나 약한 존재로서 보호해야 한다는 관념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단지 축소된 어른일 뿐이다.

부르주아지에 의해 발견된 유년기는 곧바로 거의 모든 중산계급들에게 적용되었다. 어린 아이에 대한 생명 존중이라든가 위생 의식에 대한 변화가 이유일 수 있지만 분명한 것은 근대 자본주의 태동기에 유년기가 주목받았다는 것이다. 유사 이래 인생의 여러 시기에 대한 구분이 없었던 적은 없었지만, 또한 이렇게 유년기가 주목받았던 적도 없었다.

일리치는 학교 제도를 만들어낸 것이 근대에 출현한 유년기때문이라고 말한다. 또한 역으로 ‘만약 연령에 부과된 의무적인 학습제도가 없어진다면 유년기 시기는 만들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고까지 말한다. 그렇다면 근대 시대에 유년기가 출현한 이유는 무언가를 준비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1강 마지막에서 언급했던 바대로 반-인간적으로 보이는 자본주의 시대에 맞는 인간으로 탈바꿈시킬 필요가 있었다. 지금은 상식으로 여기지만 사회에 진출하기 위해서 학교에서 준비 기간을 거친다는 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다. 어떤 사회도 자신의 시대를 다음 시대의 초석으로 생각하지 않으며, 지금의 순간을 다음을 위한 준비 기간으로 여긴다는 것은 매우 생소한 세계관이다. 준비를 위한 기간은 삶이 아니란 말인가? 안데스 산맥 속에서 사람은 쓸모 있는 사람이 되면 땅을 경작한다. 이전까지는 양을 지킬 뿐이다. 일과 공부와 삶은 분리되지 않았으며, 일하면서 배우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배움의 현장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세속의 목사가 된 교사

모든 유년기의 아이들은 학교에 소속되어 있고, 학교에서 학습하고, 학교에서만 가르침을 받는다. 여기서 ‘학교’라는 단어를 회사 혹은 군대라고 바꿔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리고 세 조직(?)의 핵심적 특징은 매일 매일의 삶을 함께 살아가야 하는 생활 공동체라는 점이다. 학교 공동체, 회사 공동체, 군대 공동체! 특히 학교는 전일제 출석이라는 방식으로 시기적으로 인생에서 제일 먼저 이런 조직의 논리를 몸에 체득하게 한다. 강인한 신체와 굴복하지 않는 정신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12년이라는 오랜 기간을 걸쳐서 매일 매일 한 가지 의례를 강요받는다면 그 의례가 몸에 각인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의례가 된 학교화된 제도에 질문을 던지기 어렵다.

유년기의 탄생과 함께 학교의 현상학에서 주목해야 것은 세속의 목사가 된 교사이다. 자연의 사물을 살펴보듯이 관찰해보면, 학교의 거의 모든 일들은 교사와 연관되어 있다. 학교에서의 규칙은 학생이 아니라 교사가 결정하고, 학생들이 무엇을 배워야 할지 역시 교사의 선택에 달려 있다. 더욱 놀라운 점은 학교의 규칙이 사회 전체와 아주 동떨어지게 자유를 억압하더라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학교라는 공간은 마치 교회처럼 세상의 법칙과 간섭으로부터 분리된 그들만의 성소로서 기능하고 있다. 더우기 교사의 역할은 학교 내로 한정되지 않는다. 마치 종교의 지도자가 신앙 문제만이 아니라 개인의 사적인 삶의 문제까지도 간섭하듯이, 교사는 학생이 하는 모든 일에 책임감과 의무감을 느낀다.


‘보호자로서의 교사teacher-as-custodian’는 의례의 주재자로 활동하여, 학생을 미로처럼 알기 어려운 의례로 깊숙히 안내한다. 그는 규칙의 준수를 조정하고, 인생의 입문을 위한 번잡한 전례규범을 관장한다. ‘도덕가로서의 교사teacher-as-preacher’는 부모, 신, 국가를 대신한다. 그는 학교 안에서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서 무엇이 옳고 잘못인지를 학생들에게 교화한다. ‘치료자로서의 교사teacher-as-therapist’는 학생들이 하나의 인간으로 성정하도록 돕기 위해 개인 생활까지 파고드는 권위가 주어지고 있다고 느낀다. (<학교없는사회>, 2장 학교의 현상학)


교사는 학생들에게  보호자가 되고, 도덕적으로 옳고 그른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자이고, 하나의 인간으로서 잘 성장할 수 있도록 치료하는 상담사의 역할까지 맡고 있다. 학교의 기능이 약해지고 교사의 귄위가 무너졌다고 하지만 학교에서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사회 전체는 교사에게 여전히 보호자, 도덕가, 치료사로서의 역할을 요구한다. 학교와 교사를 대하고 있는 우리의 태도는 가히 죽었지만 살아 있는 좀비를 대하는 것과 비슷하다. 지금 필요한 것은 좀비 같은 개념으로 여전히 살아있는 것들을 재구성해내거나 혹은 완전히 매장해버리는 방법 뿐이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학교는 여전히 자신을 새롭게 무장하면서 오이디푸스 신화를 다시 쓰려고 시도한다는 점이다. 이렇게 계속해서 강화되는, 변신하는 교사의 모습은 바로 사회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제 회사에서 상사는 자신의 부하직원의 정신상태에까지 신경쓰고 있으며, 군대에서 역시 점점 더 많은 상담 치료를 시도하면서 (자본주의 시대에 아무런 불만을 제기하지 않으며 노동할 수 있는) 정상적인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

학교의 문제는 학생에게 도망칠 곳이 없다는 것이다. 학교에서 벗어난 학생은 어디서나 트러블 메이커로 여겨진다. 종교 시대에 인간이 죄인이거나 성도로 이분되었던 것처럼 새로운 세계 종교가 된 학교시대에 아이들은 학생이거나 문제거리로 나눠질 뿐이다.

파지스쿨이 지금의 형태로 만들어진 것은 바로 학교에 대한 현상학적 정의에 대해 부정의 방식으로 배움을 새롭게 시도한 것이다. 첫째, 파지스쿨에서는 전일제 출석이 아니라 일주일에 이틀만 수업을 한다. 아이들뿐 아니라 부모님들도 수업을 하지 않는 날에는 친구들이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걱정한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대로 파지스쿨은 사회에 나가기 위해 준비하는 기간이 아니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의 삶을 살아갈 뿐이다. 둘째, 파지스쿨은 동일한 연령이 아니라 17세부터 25세까지의 다양한 연령이 모이도록 했고, 마지막으로 학교에서 무한한 권위를 인정받는 교사가 되지 않도록 직업으로서의 전임교사가 아닌 먼저 공부한 사람으로서의 함께 공부하도록 파지스쿨을 구성했다. 다시 말해서 마을교사 역시 함께 공부하는 친구들과 함께 삶의 방식을 발명하려는 실험을 하고 있는 중이다. 어떤 면에서 공부하면서 N프로젝트의 시도가 자신의 밥이 될 수 있는지 파지스쿨러가 실험하는 것처럼 마을교사 역시 파지스쿨와 함께 다양한 시도를 하면서 삶을 실험하고 있는 중이다.


의례가 되어버린 학교

“학교 교육은 의례이며, 그것도 신화를 만들어내는 의례이다.” 이 말에 일리치의 친구들은 왜 그렇게 놀랐고, 분노했을까? 왜냐하면 의례란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그 행위의 목적과 결과 간의 괴리를 알아보지 못하게 만드는 행동형태이기 때문이다. 기우제에서 비를 기원하며 춤을 추는 행위는 실상은 그 목적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하지만 비가 계속해서 않는다면 기우제의 춤은 점점 더 격렬해지고, 결과적으로 비가 내리지 않는다면 그 책임은 ‘더’ 열심히 춤을 추지 않은 개인에게로 돌아간다. 학교 교육이 평등의 실천이라고 믿고 살아온 사람들에게 이 말은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의례가 되어버린 학교! 탈학교화란 단순히 학교에 가지 않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탈학교화란 ‘의무적인 학교교육이 필연적으로 소비사회를 재생산한다’는 구조를 이해하지 않으면 극복될 수 없다. 왜냐하면 학교제도는 ‘끝없는 소비’라는 신화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일단 하나의 과정이 있으면 그것이 가치있는 것을 만들어 낸다는 믿음! 학교는 모든 것이 측정될 수 있는 세계로 학생들은 인도해간다. 하지만 학교에서 무엇이라도 측정해야 한다고 교육받아온 사람들에게 측정할 수 없는 경험은 무가치한 것이 된다. 또한 그들에게 측정될 수 없는 가치란 제도를 위협하는 것으로 취급된다. 여기에 더해서 학교는 어떤 비용을 지불해서라도 경쟁적으로 교과과정을 소비할 수 있도록 학생을 끌어올려 더 높은 단계로 ‘진보’하도록 가르친다. 학교는 무언가를 배웠다는 기쁨보다는 항상 부족함(결핍감)을 느끼도록 계획되어 있다. 학교에서 이뤄지는 교육은 항상 더 좋은 상품이 존재한다고 느끼게 하며, 충분하다고 여겨지는 단계에 도달하는 일은 결코 없다.

학교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고자 한다면, 학교제도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사회적 의례의 허상이 무엇인지 드러내야 하고, 의례 자체를 개혁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학교제도에 있어서 중요한 점은 무엇은 배우고 어떻게 가르치느냐가 아니다. 지금 행해지고 있는 학교제도의 핵심은 단계적으로 진급한다는 ‘의례게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만든다는 점이다. 학교가 교육하는 것은 바로 ‘게임’ 그 자체이고, 도박적인 의례로 들어가는 것이다. 학교제도 속에서 자라온 아이에게 일렬종대가 아니라 모두가 평등한 위치에서 이야기를 나누자는 아서왕의 원탁의 테이블은 불가능한 환타지로 보일 뿐이다.


존재하지 않는 천구天球에 대한 믿음

학교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근본적이며 계통적으로 사람을 노예로 만든다. 왜냐하면 학교만이 비판적 판단력을 형성하는 주요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일리치가 말하는 탈학교화는 배움에 대한 이야기일 뿐 아니라 인간해방을 위한 모든 활동의 기초가 될 수 있다.

맑스에게 소외란 일이 임금노동으로 변한 것의 결과였다. 그런데 일리치가 보기에 지금 청소년들은 학교에서 ‘소외’를 익히고 있다. 왜냐하면 학교는 계속해서 학생이 지식의 생산자이자 소비자인 것처럼 가장하지만, 실제 학생들은 그 지식 혹은 학교 내부의 시장에 내놓은 상품과 어떤 관계도 맺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이렇게 소외에 익숙해진 청소년들이 그들의 삶을 소외시키는 제도화에 너무나 쉽게 적응한다는 것이다.

중세기에는 천구의 존재를 확고한 지식으로 받아들였다. 우리에게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알려진 천동설에서 지동설로의 변화가 확증될 수 있었던 핵심은 천구에 대한 인식 변화였다. 코페르니쿠스는 지구가 축을 중심으로 돈다고 주장했지만, 그 연구 방법이나 기본 가정에서는 프톨레마이오스와 다르지 않았다. 그 또한 천구가 존재한다는 관념을 받아들였고, 이를 바탕으로 증명하려고 시도했다. 태양이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돈다는 생각은 그에게서 이뤄졌지만, 실제로 행성의 운동법칙은 케플러에게서 완성된다. 어떻게? 프톨레마이오스, 아리스토텔레스를 거쳐 코페르니쿠스에게까지도 당연시 되었던 천구에 대한 의심에서 가능했다. 케플러는 천구를 없애고 궤도를 따라 움직이는 천체를 가정했다.

오늘날에도 중세기처럼 확고하게 사회 속에 천구와 같은 영역이 존재한다고 받아들이고 있다. 바로 ‘인간이 교육받을 필요가 있다’는 관념! 교육에 대한 이런 전제는 ‘인간이 우주의 정지된 중심에서 살 필요가 있다’는 관념에 비길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탈학교화가 혁명의 잠재력을 갖고 있다고 말하려면, 그리고 인간 해방의 기초가 된다고 주장하려면 이는 ‘어떤 교육이 가능할까’라는 연구가 아니라 ‘교육이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 연구로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1강에서 말했던 것처럼 우리의 배움이 ‘희소한 기회를 전제로 하는 교육’에 지배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2017. 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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