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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일리치

<학교없는사회> 1 - 학교화된 사회

by 홍차영차 2017. 7. 9.

학교화된schooled 사회


키워드: 학교없는사회, 학교화schooled, 탈학교화deschooling, 가치의 제도화, 빈곤의 근대화, 심리적 불능



현장의 문자, <학교없는사회>

일리치는 자신의 책을 팸플릿이라고 불렀다. 사전적 정의를 보면 팸플릿이란 선전, 광고를 설명하기 위한 소책자이다. 즉 일리치는 자신의 책이 이론을 위한 책이 아니라 활동을 일으키는 ‘선동문구’로 읽히기를 원했다.

1951년 일리치는 촉망받는 사제였고 로마 교황청 국제부 근무가 예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교회의 관료제도 속으로 들어가길 원치 않았다. 대신 그는 연금술에 대한 공부를 위해 뉴욕을 선택했다. 뉴욕에 도착한 첫날 일리치는 할아버지의 친구들로부터 뉴욕에 급증하는 푸에르토리코 이민자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는 추기경에게 푸에르토리코인 정착지의 교회배치를 청했다. 이렇게 뉴욕에서 이뤄진 푸에르토리코인들과의 만남은 일리치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경험이자 유일한 경험이었다. 이후 푸에르토리코 교육현장에 직접 관여하게 되면서 ‘교육’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푸에르토리코 학교교육의 계획plan은 학생의 절반이 의무교육 기간으로 지정된 5년이라는 기초 교육 과정을 마칠 가능성이 1/3이 되게끔 되어 있었다. 평등한 교육을 목표로 하는 의무적인 학교교육이라고 말하지만 이곳에서 일리치가 경험한 것은 “필연적으로 탈락자를 만들어내기 위한 제도”였을 뿐이다.

이후 일리치는 1966년 멕시코 쿠에르나바카에서 CIDOC라는 대안적인 대학교를 만들어 다른 배움에 대한 실험을 계속했으며, 10년 후 해체할 때까지 현장에 있었다. <학교없는사회>(1970년)는 이렇게 일리치가 뉴욕의 푸에르토리코인들과 겪었던 경험과 멕시코 쿠에르나바카의 CIDOC에서 실험적 활동을 하는 중에 작성된 글들이다. <학교없는 사회>는 그 시작부터 현장의 문자였다. 또한 <학교없는 사회>는 그의 책 중 하나가 아니라 일리치가 평생토록 돌파하고자 한 근본적인 생각을 품고 있다. 인간 존재의 무능력!


학교없는 사회, ‘학교’에 가지 않으면 되나요?

<학교없는사회>는 일리치의 첫번째 책이었고, 이 책으로 그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리고 일리치는 동일한 책으로 이루다 말 할 수 없는 비판을 세계로부터 받았다. 의무적인 학교교육에 대한  일리치의 비판은 오랜 친구였던 에리히 프롬이 절교를 선언할 정도로 충격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수많은 비판이 발생했던 이유는 ‘학교없는사회’에 대한 오해에 있었던 것 같다. 첫째, 학교없는사회deschooling society는 ‘학교라는 제도’를 폐지한다는 뜻이지 학교 자체를 없애라는 것이 아니다. 일리치는 학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반대하지 않는다! 다만 의무적 학교교육을 반대할 뿐이다. 일리치는 스스로가 거의 학교를 다니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삶에서 필요한 거의 모든 배움은 우연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심지어 의도적 학습조차도 많은 것이 계획적으로 가르친 결과가 아니라고. 그렇다면 의무교육으로의 학교, 제도로서의 학교에 가지 않으면 될까?

좀 더 나아가기 전에 ‘학교화schooled’에 대해 정의해 보자. <학교없는 사회> 전체가 설명하고 있는 핵심 개념이 바로 ‘학교화’이다. 그리고 이는 한 문장으로 표현하기가 쉽지 않다. 앞서 언급한 학교없는 사회에 대한 오해들 역시 학교화에 대한 개념을 간략히 설명하려고 할 때 생기는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위험이 있더라도 논의의 진행을 위해서 간단히 정리해 보겠다. 기본적으로 학교화란 목적과 수단을 혼동하도록 시키는 과정 전체를 말한다. 다시 말해 현재 어떤 과정을 이수함으로써 목표가 달성되었다고 구조화되어 있는 ‘학교의 구조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초기 일리치가 제기한 문제는 분명 의무적인 학교교육이었다. 하지만 일리치는 <학교 없는 사회>의 출판 이후 이미 교육의 기능이 ‘학교’로부터 약화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제 문제는 제도에 의지하는 학교화 된 상태, 교육에 중독된 상태로 나타나는 성인교육(평생교육)의 부작용이었다. 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도 사람들은 계속해서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이 알고 있는 배움의 방법은 오로지 학교화 된 제도를 이용하는 것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리치가 말하는 학교화의 문제는 아이를 대안학교에 보낸다거나 혹은 홈스쿨링을 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학교화’는 이미 사회 전체에 퍼져있다. 무사히(?) 학교를 졸업한 사람은 사회 어디를 나가더라도 무엇을 배우고 학습할 때, 제도를 이용하고 전문가의 권위를 따르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이렇게 볼때 학원, 학교, 집 어디에서 교육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핵심은 학교화된 구조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이다.

마지막으로 일리치는 희소성을 전제한 배움에 대해 문제 제기한다. 지금 학교화된 교육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배웠느냐가 아니다. 핵심은 남들보다 좀 더 오래 학교에 머무르는 것이다. 대학교, 대학원을 넘어서 박사 후 과정이 점점 늘어나는 것 그리고 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도 끊임없이 어떤 과정을 이수하고자 하는 욕망은 바로 희소성을 바탕에 둔 경쟁력을 쟁취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부터 배움을 제도로서, 과정을 이수하는 것으로 생각했을까? 교육을 받고 배움으로써 세상을 살아가는 역량을 얻는다는 생각은 17세기에 오랜 기간에 걸쳐 발전된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을 가르친다.” 이제 일리치의 질문은 교육이라는 개념 자체가 생겨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인가로 넘어간다. 교육의 현대적 개념은 포장될 수 있는 지식, 사유화할 수 있는 가치의 구성요소가 될 수 있는 지식이 있다는 믿음에서 생겨났다고 말한다. 그래서 일리치는 교육이라는 관념을 구성하기 위한 근거가 되는 개념이 형성될 수 있는 정신적 틀이나 공간에 관심을 갖게 된다.


사랑과 우정도 서비스 받을 수 있나요? 가치의 제도화와 심리적 불능

학교, 병원, 고속도로는 공생적convivial 도구가 아니라 일리치가 지속적으로 비판하는 대표적인 조작적manipulative 도구들이다. 하지만 학교는 다른 조작적 도구와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다. 학교는 사회 전체를 ‘학교화schooled’하는, ‘구조를 생산’하는 도구라는 점이다.

이반 일리치는 인간의 본질과 근대적 제도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살펴보기를 원했고 이러한 분석의 첫번째 소재로서 학교를 선택했다. 왜냐하면 학교는 이러한 근대적 제도를 생산할 뿐 아니라 또한 은폐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10~20년이라는 오랫 기간동안 학교에 다니면서 습득한 것은 ‘수업을 받는 것’과 ‘배운다’는 것을 혼동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목적을 실현하는 과정(수단)과 목적의 혼동이다. 대학에서 전자공학과 4년의 커리큘럼을 이수하면 전자공학을 배운 것으로 생각하고, MBA 2년 과정을 이수하면 경영 전문가가 되었다고 여긴다. 실제로 그가 전자기학과 회사경영을 아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가 과정을 이수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학교화된 사회가 보여주는 바가 ‘가치의 제도화’이다. 우리는 배운다고 할 때 더 좋은 교육 서비스를 생각하게 되었고, 건강해진다는 것은 체계적인 의료제도와 건강검진으로 대체되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에게 더 많은 서비스를 받는다는 것은 더 많은 배움이 일어나는 것으로, 건강하게 사는 것으로, 더 행복한 삶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지금은 이런 제도에 물음을 제기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졌다. 

그런데 이러한 다양하고 디테일한 제도와 서비스에 의존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심리적 불능’을 경험하게 된다. 불과 20~30년 전만해도 1~2km를 걷는 것에 대해 아무런 불편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사람들은 자동차를 이용하지 않고서는 100m 떨어진 슈퍼마켓도 가지 못한다. 또한 집에서 바느질을 하면서 옷을 기워 입는다는 것은 상상 속의 이야기가 되어 가고 있다. 우리는 이렇게 학교생활을 거치고 나면 자연스럽게 ‘학교화된 신체’가 갖게 된다. 한 번 학교의 필요성을 받아들이게 되면 사람들은 학교 이외의 제도, 서비스의 필요성도 쉽사리 받아들이게 된다. 놀람, 기쁨, 감동을 사라지고, 기대에 따른절망과 좌절만이 발생하게 된다. 즉 ‘비물질적인 요구(건강, 교육, 수송, 복지, 안전)’가 물질적인 것의 수요로 충족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겨난다.


빈곤의 근대화

학교뿐만 아니라 현실의 사회 전체가 ‘학교화’되어가고 있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사상 초유의 평등한 사회에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부유한 자나 가난한 자나 모두 마찬가지로 학교와 병원에 의존하고, 많이 배운 자나 적게 배운 자 모두가 항상 더 많은 서비스를 갈망하는 상태! 빈부격차를 떠나서 모든 사람들은 그 어느 쪽에 속하든 ‘제도에 의한 보호’에 의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또한 제도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활동을 회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


학교는 교육을 위해 이용할 수 있는 자금, 사람, 그리고 선의를 독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학교 이외의 다른 사회제도가 교육에 관여하는 것을 담념하게 만들고 있다. 노동, 여가활동, 정치활동, 도시생활 그리고 가정생활 모두가 교육 수단이 되는 것을 단념하도록 하고 그것에 필요한 관습이나 지식을 가르쳐 주는 것을 학교에 맡기고 만다. (<학교없는사회> 1장)


평등한 교육을 실현하다고 생각되는 학교는 사실상 교육에 관한 모든 권리와 의무를 독점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학교의 독점은 다른 어떤 기관도 교육에 대해서 어떤 주장도 펼 수 없게 만든다. 교육에 관한 모든 자원은 학교를 통해서 분배받아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교육에 대한 학교의 근원적 독점은 새로운 빈곤을 만들어 낸다. 학교제도가 없었을 때는 누구나 집에서, 일터에서, 마을에서 공부했다. 학교를 못간다고해서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 배움에 대한 제도적인 기준이 마련될 때마다 가난한 자들은 새로운 종류의 빈곤을 맞게 된다. 일단 비물질적인 가치가 물질에 대한 요구로 대치되면 빈곤은 전문가들이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기준에 따라 정의된다. 언제부턴가 우리의 기준은 대학교를 졸업한 사람의 생활양식이 되어버렸다. 그리하여 가난하다는 것은 ‘소비의 이상적 수준’을 따라갈 수 없게 된 사람들을 의미하게 되었다. 멕시코에서 빈곤자라는 것은 3년간의 학교교육을 받지 못한 자이고, 한국에서는 16년간의 학교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이 된다.

빈곤한 사람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다. 하지만 제도와 서비스에 의존하는 정도가 점점 증대해 감에 따라 빈곤자에게 새로운 무력감이 추가된다. 그것은 심리적 불능 혹은 혼자 힘으로 생계를 유지할 능력이 없음을 말한다.  즉 근대화된 빈곤이란 주어진 상황에 대해서 스스로가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사실과 개인으로서의 잠재적 능력의 상실이 결합된 것이다. 이러한 빈곤은 학교가 배움에 관한 모든 권리와 의무를 독점할 때, 병원이 개인의 건강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주장할 때 일어난다. 스스로 공부한 배움은 아무 쓸모가 없다고 말하고, 병원이 아닌 다른 처방은 불법이 되어 버렸다.


일과 공부와 삶이 분리되지 않는 삶

일리치는 우발적인 교육, 비형식적인 교육으로의 새로운 접근을 이야기한다. 일, 공부, 삶을 분리하지 않는 삶을 긍정한다. 1956년 일리치는 뉴욕 대교구의 수백 명의 교사, 사회사업가 및 신부에게 푸에르토리코인들과 서로 이야기할 수 있도록 단기간동안 스페인어를 가르쳐야 했다. 일리치는 그들을 학원으로, 언어 전문가에게 맡기는 대신에 스페인어를 모국어로 하는 젊은 친구들을 모집했다. 한 번도 스페인어를 가르쳐본 적 없고, 교육에 관한 아무런 자격증이 없었던 48명의 젊은이들! 그들은 언어학자용 스페인어 참고서의 사용법 배운지 일주일도 채 못 되어 독자적으로 가르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임무는 6개월이 안 되어 끝났다.

 일리치의 친구였던 브라질의 파울로 프레이리의 경험 역시 마찬가지이다. 프레이리가 브라질의 농부들에게 문자를 가르칠 때 특별한 프로그램을 사용하지 않았다. 프레이리는  a, b, c부터가 아니라 그들의 생존권이 달려 있는 샘물의 사용권이라든가 빌린 돈의 복리 이자라든가 따위의 현장의 단어부터 지도했다. 그들에게 문자는 현실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되었고 그것을 문제로서 취급할 수 있게 되었다. 일리치는 문자를 배우기 시작한 사람들이 어떻게 읽을 수 있게 되자 마자 사회적 행동으로 나가고자 하는가를 왕왕 목격했다. 그들은 현실을 문자로 정착시킴으로써 그것을 수중에 넣었다.

학교화된 사회에서는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가르쳐야 하며, 자격이 되는 사람만이 배울 수 있다.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 모두에게 자격을 요구한다. 학교는 점점 더 비효율적인 존재가 되고 있고, 학교교육을 위한 학교교육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교육을 제공한다는 것은 역으로 모든 사람에 의한 교육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자격증의 가치가 신뢰되고 있기 때문에 무시되고 있는 가능성들(암송, 반복학습, 기능교사)을 인정하고, 지금의 기술과 현실에 맞게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일리치가 사교육이 아니라 학교화를 비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학교는 희소성을 바탕에 둔 소비사회신화를 생산되고, 재생산한다는 것. 학교화를 통해서 가치의 제도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훈련이 일어난다는 말이다.

역사적으로 한 사회를 지탱하는 신화가 없었던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일리치가 말한대로 ‘이렇게 길고 지루한 방식으로 신화가 만들어지는 사회’는 없었다. (최소) 12년이 넘는 기간동안 훈련받고 각인시켜야만 되는 것이라면 가히 반-인간적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2017. 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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