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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읽기

<아Q정전>

by 홍차영차 2015. 10. 8.

혁명에 대응하는 다양한 군상(群像)들

<아Q정전>




<아Q정전>은 1921.12월부터 1922년 2월까지 베이징 일간지인 <<신보>>에 발표된 루쉰의 대표적인 소설이다. 시기적으로는 1911년의 신해혁명과 위안스카이의 2차 혁명 그리고 1919년의 5.4운동까지 모두 겪은 이후에 쓰여졌다. 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 몇 번의 사건을 통해서 중국인들도 이제는 ‘혁명’이라는 말에 익숙해져 있을 때이다. 하지만 루쉰이 보기에 진정한 혁명은 그 어디에서도 이루어지지 않아 보였다.

<아Q정전>의 주인공은 웨이좡(가식/가장)에 살고 있는 날품팔이 아Q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웨이좡(가식)에서 사람들이 하라는 일들을 하면서 사는 모습이나 아Q의 성과 본관이 어디인지 모른다는 것은 ‘근대’를 맞이하면서 휘청대는 중국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 관습과 전통에 따라서 무언가를 계속 하고 있지만 무엇때문에 하는지 그 이유도, 기원도 알지 못한다. 그리고 “보리를 베라면 보리를 베고, 방아를 찧으라면 방아를 찧고, 배를 저어라 하면 배를 저”으면서 살고 있지만 나아지는 것은 없다. 

아Q는 조금이라도 돈이 생기면 노름판으로 직행하고, 또 거기서  조금이라도 이득을 얻을라치면 알 수 없는 소란 속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아무런 탓도 할 수 없다. 5.4 운동은 이런 상황속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5.4 운동 이후의 중국이나 아Q에게 달라지는 것은 없다. 어떻게서든 ‘힘’을 갖게 되면 주변 모든 사람들에게 복수를 해 주겠다는 생각밖에는 없다. 대처에서 돈을 벌게 되었을 때도 그랬고, 혁명을 맞이하는 태도 역시 그렇다. 혁명이란 그에게 “반란을 일삼는 무리들이며, 반란이란 곧 고난”이었는데, 이것이 “거인 나리까지 벌벌 떨게 만”든다는 이유로 그는 혁명당에 가입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에게 혁명(革命)은 혁명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원한을 풀 수 있는 도구일 뿐이었다.

아Q 이외의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험악한 혁명의 분위기 속에서 자오 나리는 아Q를 ‘선생’이라고 부르고,  혁명 전에는 사이가 좋지 않던 자오 수재와 가짜 양놈은 서로 ‘혁명의 동지’가 되자고 약조한다. 마지막으로 아Q의 일자리를 빼앗았던 애송이D까지 변발을 말아 올린 것. 자오 나리에서부터 애송이D까지 모두가 변하고 있고, 모두가 혁명을 겪었지만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삶을 대하는 정신적 태도에 있어서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었다. 아Q가 보여주는 정신승리법이 대표적이다. 그는 자신이 어떠한 위치에 있든지 내면적 가식과 허위 속에서 자신에게 정신적 승리를 주고 있다. 동네 건달들에게 맞았을 때에도 허례허식적 사고를 가지고 자신을 위안했고, 노름판에서 은전 무더기가 사라졌을 때에는 스스로 자신을 구타하는 수준에까지 이른다. 아Q는 “이윽고 자기가 남을 때린 것처럼 흡족해”한다. 위대한 정신승리법!

앞서 말한것처럼 <아Q정전>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가 근대 중국을 표현하는 것 같다. 아Q를 비롯해 다양한 군상들을 보여주면서 그들이 어떻게 혁명을 맞이했는가지를 보여주는 것 같다. 힘 없는 서민에게 있어서 혁명이란 그저 윗대가리가 바뀌는 것 이외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고, ‘나리’들에게는 명칭만 바뀌었지 자리를 보전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혁명당원을 자처했던 아Q만이 죽음을 당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혁명이라고 하지만 바뀐 것이 아무것도 없었으니.

<아Q정전>을 읽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아Q정전>의 모델이 아닌지 궁금해 했다고 한다. 아Q가 보여주는 의식과 행동이 당대의 많은 사람들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오랜 전통에 기대어 자기기만적인 허위 의식 속에서 살아가는 모습 그리고 자신에 대한 자부심은 높지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무지했던 아Q. 이것이 바로 지금도 <아Q정전>을 읽어야 되는 이유가 아닐까. 지금의 사람들이야 말로 자신의 ‘마음대로’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 모르고 돈의 노예로, 물질의 노예로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니까. 우리는 여전히 노예의 정신을 가지고 자신의 주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루쉰 (1881~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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