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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선물과증여

[선물과증여] 석기시대 경제학

by 홍차영차 2015. 7. 2.

불명확성의 메커니즘


- <석기시대 경제학> 마샬 살린스 -







분명히 <야생의 사고>보다 편하게 읽었고, 내용도 재미 있었다. 물론 쉽게 읽힌다는 것이 아무런 내용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석기시대 경제학>은 <증여론>이나 <야생의 사고>만큼이나 분명하게 나를 흔드는 새로운 관점을 품고 있다. 그런데 왠걸? 책을 다 읽고, 다시 개념을 정리하면서 보는데 서평으로 무엇을, 어떻게 정리해야할지 한동안 잡히는 것이 없었다. 신석기 혁명을 무시하고 수렵채집을 고수했던 원시사회의 풍요로움,부터 저생산 구조를 유지하는 가족제 생산방식, 관대성과 호혜성의 원리까지 다채로운 내용들이 있었음에 불구하고. 왜일까? 글쓰기를 고민하다가 불현듯 무엇이든 명확하게 규정하려는 나의 성향 혹은 근대적 사고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석기시대 경제학>은 이런 불명확성을 원시 시대의 특징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불명확한 것에 대한 자신감이 원시 시대의 수렵채집민을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지 않았을까.





불규칙한 구석기적 생활 리듬과 무정부 상태의 생산

<석기시대 경제학>은 원시 시대의 수렵채집민이 풍요롭고 여유로운 생활을 했다는 것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다시 말해 그들은 먹고 사는 것에 걱정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풍요로운 환경에서 살았다는 것. 살린스는 원시시대보다 척박해진 환경에서 조사된 19~20세기의 인류학적 자료들을 예로 들고 있다. 여기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불규칙해 보이는 그들의 생활 리듬이었다. 생계를 위해 그들이 일하는 시간과 휴식하는 시간이 너무나도 불규칙하다는 것. 텍스트 인용된 일하는 시간과 쉬는 시간의 데이터는 가구마다, 부족마다의 특징이 녹아 있기 때문에 그들 전체를 통합하여 말하기가 상당히 어려웠다. 이런 이유로 책에서 보여주는 데이타를 볼때마다 ‘과연 이런 데이타를 타당하다고, 유효하다고 볼 수 있는가’ 생각하곤 했다. 하여튼 그들의 생활은 말 그대로 가구마다, 부족마다 다른 리듬을 가지고 있었다. 굳이 그 리듬의 특징을 말해보자면, 그들은 휴식할 때에는 일한 것보다 양적으로 휠씬 더 많이 몇일동안 휴식을 취한다는 점이다. 살린스는 이를 독특한 구석기적 생활 리듬이라고 부른다.

가족제 생산방식의 저생산 구조 역시 마찬가지다. 어떤 부족은 부지런히 일하고, 다른 부족은 거의 일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원리는 지금 우리의 생각과 다르다. 많은 가족 구성원이 있는 집안에서는 가족의 작은 비율이 매우 낮은 노동강도로 일하고, 가족수가 작은 집들은 대부분의 가족 구성원이 매우 높은 노동 강도로 일한다. 살린스는 이를 ‘생계’를 위한 생산으로 설명한다. 그들은 단지 자기 가족의 관심에만 집중하고 공동체 전체를 고려하는 ‘총생산’의 개념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해준다. 즉 원시사회에서는 무정부 상태의 분산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이런 무정부 상태 때문에 전체적으로는 저생산 구조가 유지된다고 주장한다. 물론 전체적인 노동력을 불충분한 이용은 기본이다. 

독특한 생활 리듬과 저생산 방식에서 언급한 것처럼 원시사회의 특징은 바로 예측하지 않는 자신감에 있는 것 같다. 살린스를 비롯해 3명의 학자들이 비판한 모스의 <증여론>도 이런 측면에서 볼 수 있겠다.



규정할수 없음의 힘, ‘하우(hau)’

<증여론>의 하우는 그 신비성과 불필요해 보이는 제3자 개념으로 인해 살린스를 비롯해 레비 스트로스, 퍼스, 요한슨에게 비판 받아왔다. 레비 스트로스는 하우의 신비적 원리를 구조적 체계라고 확정했고, 퍼스는 좀 더 세속적인 ‘두려움’으로, 요한슨은 <증여론>에서의 제3자 개념을 희생의례 관점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살린스는 이 모두를 종합하면서 명쾌하게 하우를 ‘증식’이자 ‘다산성’으로 증명한다.

이들의 비판을 듣고 나면 모스가 말한 하우는 라나피리의 텍스트를 오독한 결과이거나 실체가 없는 추상적 개념으로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들 후대의 비판들을 읽을수록 모스의 하우 개념은 더욱 더 풍부하게 해석될 여지가 생기는 것 같다. 특히 레비스트로스는 모스가 각각의 원시 사회가 가지는 심층적 실재를 파악했으면서도 그 사회의 작동원리를 되돌려  ‘신비적인’ 하우로 설명했다고 비판했다. 하우를 마오리족이 가지고 있는 구조체계라고 말해버리면 더 이상 사유할 부분이 없어져 버린다.  그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이 아무런 설명이나 이유 없이 ‘구조’로 환원될 뿐이다. 실제로 모스의 <증여론>은 레비스트로스의 서문 때문에 유명해졌다고 하는데, 이런 그의 비판에서 사람들은 그 깊이를 알게된 것이 아닐까. 실제 사람을 행동하게 만드는 것은 좀 더 세밀한 분석이라기보다는 직관적 해석, 정서적 공감일 때가 더 많기 때문이다. ‘사물에 깃든 영’이라는 이해할 수 없는 표현이 사람의 손을 지나쳐온 물건, 모든 것의 근원이 되어주는 자연(숲)을 좀 더 직관적으로 이해하게 해 주는 것 같다. 또한 요한슨의 관점을 이용한 살린스의 해석은 3자 개입에 대해서 모스의 해석보다 쉽게 이해된다. 하지만 살린스의 해석 역시 제3자에 대한 해석에 대한 추가적 이해 공간을 닫아 버릴 뿐이다. 살린스의 해석이 시원하게 느껴지는 것 역시 내가 증식(이익)과 다산성이라는 측면에 익숙하기 때문이 아닐까. 텍스트에서 말했듯이 풍족함이란 더 많이 생산하는 것으로 충족될 수 있지만, 반대로 덜 원하는 것으로도 충족될 수 있는 것인데.

<증여론>의 하우가 동작할 수 있었던 것은 개념의 명쾌함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핵심은 그 부족 내에서 누구나 알고 있다고 하지만 개인마다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더 풍부하게 상상할 수 있는 불명확성에 메커니즘의 핵심이 있는 것 같다. 



빅맨과 추장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원시사회를 관통하는 원리로 살린스 역시 호혜성을 들고 있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호혜성은 한 점에 고정된 것이 아니라 관대성에 의한 '무상의 선물'로부터 공짜로 취득하려는 ‘도둑질'까지 포함하는 연속적인 스펙트럼으로 존재한다. 스펙트럼의 위치는 친족관계의 거리와 등급이라는 두 축과 연관되어 있다.

이들의 호혜성은 파트너 교역관계이기 때문에 쉽게 변하지 않지만 고정된 것은 결코 아니다. 연속적인 스펙트럼이라고 말한 것처럼 호혜성의위치는 바뀔 수 있다. 친족관계의 거리는 새로운 혼인관계의 성립으로 바뀔 수 있다. 거짓말이 유익한 것으로 여겨지던 부족섹터의 부정적 호혜성이 결혼으로 단번에 일반적 호혜성으로 바뀔 수 있다. 친족 등급 역시 마찬가지다. 관대성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빅맨, 추종자들과 부족원들의 관계는 더 쉽게 바뀔 수 있다. 빅맨이 더 이상 관대성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그를 통한 재분배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친족등급의 관계는 바뀌게 된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 역시 확실한 것은 없다는 것이다. 빅맨과 추장체제는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고, 그 안에서 새로운 빅맨과 추장이 생겨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교체와 변화는 확정된 룰(rule)로서 규정되는 것이 아니다. 무심히 행해지는 상호적인 호혜성의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보니 <석기시대 경제학>에서 이야기하는 풍요로움은 바로 불확정성에 있는 것 같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불정성은 그들에게 아무런 논리나 합리성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증여론>의 모스, <야생의 사고>에서 레비 스트로스가 말한 것처럼 그들 또한 그들만의 ‘구체의 과학’을 바탕으로 한 논리가 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들이 ‘야생의 사고’를 가진 ‘증여’를 활발하게 이루어갈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원리를 확정된 것으로 고정하지 않고, 그들의 활동-증여-을 통해서 순간 순간마다 삶의 원동력을 만들어 나갔기 때문이 아닐까. 제도나 규칙으로 확정하지 않는 자신감이 핵심이 아닐까. 

근대적 사고를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불확실하다는 것만큼 불안한 것은 없다. 그들에게 계산할 수 없고, 예측이 안되는 일을 시작하는 것은 명백하게 불합리한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사업에서부터 친구의 관계까지 계산가능함을 가지고 판단하고, 이런 판단을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역으로 이런 확정된 규정과 명확성을 추구하는 것이 지금의 물질적, 정서적 빈곤을 만든것이 아닐까. 살린스가 교환율의 비결정성을 언급하면서 책을 마무리하는 것도 이런 면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사회에는 엄청난 잉여가 생산되고 있음에도 그 잉여는 재분배 되지 못하고, 생산된 잉여보다 더 큰 ‘빈곤’을 생산하고 있다. 원시 사회가 보여준 풍요로움의 회복은 이 부분의 역전에 있지 않을까. 우리가 인간으로서 관계할 수있는 ‘여지’를 갖게 된다면, 불확정된 것에 대해서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둘 사이, 개인과 집단 그리고  두 집단 사이의 새로운 관계가 생성될 수 있지 않을까.


2015.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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