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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선물과증여

[선물과증여] 선물을 되갚아야 하는 이유

by 홍차영차 2015. 6. 12.

선물을 되갚아야하는 이유 - 하우(hau)의 비밀

<석기시대 경제학> - 3장 <증여론> 비판








모스는 <증여론>에서 선물이 되갚아지는 이유로 마오리 원주민의 하우(hau)를 들고 있다. 모스는 하우를 “사물에 깃든 영, 특히 숲속 사냥감의 영”이라고 소개했다. “원시 사회나 고대 사회에서 일단 받은 선물은 반드시 되갚아야 한다는 것을 요구하는 권리와 이해관계의 원리는 무엇인가? 증여된 물건 속에 받은 자로 하여금 되갚도록 강제하는 어떤 힘이 존재하는가?” 여기서 말하는 힘이 바로 ‘하우’이다. 

하지만 하우는 논리적으로 단지 왜 선물이 되갚아지는가를 설명해줄 따름이다. 하우는 애초에 증여해야 할 의무와 받아야 할 의무에 관해서는 어떠한 설명도 제시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모스는 호혜적 교환의 의무를 논하면서 마오리의 하우를 일반적 설명원리로 위상을 승격시킨다. <증여론>에서 하우가 갖는 위상과 명성은 베스트(1909)가 마오리 사람인 라나피리에게서 수집한 ‘원본 텍스트’에서 비롯되었는데, 모스가 설명한 방식으로 하우로 설명하기에 뭔가 애매한 부분이 존재하는 것 같다.



<원령공주>의 모델이 되었던, 야쿠시마의 '이끼의 숲'



모스 이후의 <증여론>

<증여론>의 핵심 개념인 하우는 명확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존재한다. 이런 이유로 이후의 학자들은 모스의 하우 해석에 비판적인 해석을 내놓았다. 첫째, 레비스트로스는 원리 자체를 논박한다. 레비스트로스가 보기에 하우는 교환의 이유가 아니다. 그것은 마오리족의 토착적 합리화일 뿐이다. 모스는 민족학의 역사상 처음으로 경험적인 것을 초월해서 심층적 실재에 도달했고 단순히 감각적이고 구체적인 것을 포기하고  관계의 체계에 관심을 기울인 학자이다. 그는 호혜성의 다양하고 복합적인 양상 이면에 작동하는 원리를 독특한 방식(하우)으로 포착했다. 하지만 그는 교환을 전체적인 관계에서 파악하지 못하고, 경험적인 방식 즉 주고받고 되갚는 파편화된 행위로 이해했다. 모스는 호혜적 교환을 통합된 원리(구조)로 생각하는 대신 파편화된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그것을 다시 ‘신비적인 접합제’인 하우와 연결시켰다.

둘째, 퍼스(Firth)에 따르면 모스는 단순히 하우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하우는 매우 난해한 개념이기는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모스가 믿었던 것보다 더 수동적인 성격의 원리라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라나피리의 ‘원본 텍스트’는 하우가 그 근원으로 되돌아가려고 ‘분투’한다는 실질적 증거를 제공하지 않는다. 하우는 인격의 하우, 땅과 숲의 하우, 타옹가의 하우로 구분되는데, 교환에서 인격의 하우는 쟁점이 아니라는 것. 하지만 모스는 인격의 하우가 쟁점이라고 생각하고 마오리의 신비주의에 자신의 ‘지적 상상력’을 부가했던 것이다. 퍼스가 보기에 모스의 해석은 레비스트로스가 주장한 것처럼 토착 원주민의 합리화가 아니라, 일종의 ‘프랑스적 합리화’였다. 퍼스는 호혜성을 영적인 것보다는 세속적인 것으로 설명하기를 더 좋아했다. 그는 모스가 <증여론>에서 주목한 바 있는, 보답을 강제하는 제재를 ‘처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봤다. 다시 말해, “의무 수행에 대한 주된 강조는 사회적 제재, 즉 유용한 경제적 관계를 지속시키고 위세와 권력을 유지하려는 욕구 속에 존재”한다.

세번째로, 프리츠 요한슨(Johansen)은 타나피리의 텍스트에서 베스트를 포함한 누구도 주목하지 못했던 요점을 포착했다. 선물에 관한 타나피리의 설명은 특정한 의식, 즉 마오리족 사냥꾼이 잡은 새들을 위해 수행하는 숲에 대한 보답적 희생제의를 소개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는 것. 따라서 라나피리의 의도는 간단하계 호혜성의 원리를 이해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하우는 증식이자, 다산성이다.

최근의 구조주의자들은 라나피리의 텍스트에서 ‘모든 것은 마치’ 경제적 원리를 통해 어떤 종교적 개념을 설명하려고 했던 것처럼 보인다고 말한다. 모스는 정확히 이를 역으로 이해함으로써, 종교적 개념을 통해 경제적 원리를 발견하려고 했다. 살린스가 보기에 라나피리의 텍스트는 요한슨의 주장처럼 전적으로 희생제의를 기술하는 과정에서 추가한 설명적 주석으로 간주해야 한다. 라나피리는 어떤 마오리인이든 바로 파악할 수 있는 선물 교환 사례를 통해, 왜 사냥감 새 중 일부를 의례적으로 숲의 하우, 즉 그 풍요로움의 원천으로 되돌려주는가를 이해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사냥 전에 마오리 사람들은 하우를 담고 있는 마우리(mauri)를 사제가 숲속에 갖다 놓는다. 물론 사냥감 새를 풍부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잡힌 새들 중 일부는 사제들에게 의식을 통해서 되돌려져야하는 것이다. 사제가 이들 새를 먹는 것은 숲의 풍요로움(하우)을 효과적으로 회복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하우는 다산성이자 증식의 힘을 의미한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보면, 물론 적절하진 않지만, 이익으로 볼 수도 있다.

텍스트를 희생제의 관점에서 해석할 때 특히 3자의 개입이 중요해진다. 모스의 해석을 따라 하우를 ‘사물의 깃든 영’으로 보면, 사물이 되돌려지기 위해 추가적인 제3자의 개입이 필요하지 않다. 모스가 제3자를 도입한 요점는 선물을 받은 사람이 그것을 이용해서 이익을 얻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의 선물이 다른 사람의 자본으로 전환되어서는 안 되고, 그 결실은 최초의 소유자에게 되돌려주어야 한다는 것. 하지만 하우를 사냥의례의 마우리로 보면, 사제가 숲에 마우리를 바치는 1단계와 그것을 통해서 사냥꾼이 더 많은 새를 잡는 2단계, 마지막으로 잡은 새 중 일부를 돌려주는 3단계가 필요하다. 여기서 제3자는 필수적이 된다. 선물이 되돌려져야하는 이유로 하우는 이렇게 작동한다. 이렇게 보게 되면 하우를 ‘사물에 깃든 영’이라는 영적인 것으로 볼 필요가 없다. 그것은 단지 교환을 통해 이루어지는 다산성, 증식의 관점으로 해석할 수 있다.


비판은 더 많은 영감을 낳고

여기까지 보면 <증여론>의 하우는 라나피리의 텍스트를 오독한 결과이거나 실체가 없는 추상적 개념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들 후대의 비판들을 읽을수록 모스의 하우 개념은 더욱 더 풍부하게 해석될 여지가 생기는 것 같다. 레비스트로스는 모스가 각각의 원시 사회가 가지는 심층적 실재를 파악했으면서도 그 사회의 작동원리를 되돌려  ‘신비적인’ 하우로 설명했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레비스트로스의 비판은 하우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더욱더 풍부하게 만들어주고 있는 것 같다. 하우를 마오리족이 가지고 있는 구조체계라고 말해버리면 더 이상 사유할 부분이 없어져 버린다.  그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이 아무런 설명이나 이유 없이 ‘구조’로 환원될 뿐이다. 실제로 모스의 <증여론>은 레비스트로스의 서문때문에 유명해졌다고 하는데, 이런 그의 비판에서 사람들은 그 의미를 더 또렷하게 알게된 것이 아닐까. 실제 사람을 행동하게 만드는 것은 좀 더 세밀한 분석이라기보다는 직관적 해석, 정서적 공감일 때가 더 많다. 사람의 손을 지나쳐온 물건, 모든 것의 근원이 되어주는 자연(숲)을 좀 더 직관적으로 이해하게 해 주는 것 같다.

요한슨의 관점을 이용한 살린스의 해석은 더 명쾌해 보인다. 제3자 개입에 대한 그의 설명은 모스의 해석보다도 휠씬 더 합리적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살린스의 제3자에 대한 해석은 내가 더 많은 것이 좋다는 관점에 익숙하기 때문이 아닐까. 풍족함이란 더 많이 생산하는 것으로 충족될 수 있지만, 반대로 덜 원하는 것으로도 충족될 수 있는 것인데. 

이렇게 보니 후대의 이런 비판적 해석은 모스의 <증여론>과 하우 개념을 점점 더 풍성하게 만들고, 우리에게 지금과는 다른 권력의 작동원리를 상상할 수 있는 영감을 주는 것 같다. <증여론>, 다시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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