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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선물과증여

증여 혹은 다른 종류의 유대

by 홍차영차 2018. 6. 6.

증여 - 다른 종류의 유대 혹은 다른 정신공간의 형성

- <증여론> 2장 - 








“물건이 선물로 간주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똑같은 가치를 지닌 어떤 것을 받기를 기대했으며, 만일 답례의 선물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화를 냈다.”

“누구도 제공된 선물을 마음대로 거절할 수 없다. 남자도 여자도 모두 후함에서 서로 상대방을 능가하려고 애쓴다. 누가 더욱 가치있는 물건을 가장 많이 줄 수 있는가를 두고 일종의 경쟁이 있었다.”




‘자발적이면서 의무적’이라거나 ‘친밀하면서 공포스럽다’ 혹은 ‘신화적이면서 법적’이며 ‘경제적이면서도 도덕적’이라는 말들은 자본주의 사회에 물들어 있는 우리에게 매우 낯선 감각이다. 자발성과 강제성이 어떻게 한 행위에서 나타날 수 있을까?



자본주의 사회와 증여의 사회

<증여론> 2장에서 모스는 근대인의 이런 낯섬과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의식한 듯, ‘전체적인 급부체계’라고 명명한 증여의 구체적이면서 다양한 사례를 보여준다. 그것도 광범위한 민족지학의 정보를 수없이 들이대면서 ‘주고-받고-답례하기’의 생활방식이 결코 어느 한 지역의, 한 시대의 특징이 아니라는 점을 수차례 강조하고 있다. (이런 이유에서 모스는 3장에서 로마법, 게르만법, 힌드법에 남아있는 증여체계의 잔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렇게 세계의 어느 지역에서나 있었고, 자본주의의 기간보다 훨씬 오랫동안 유지되었으며 지금도 우리 주변에 남아있다는 이 증여체계를 잘 체감하지 못할까? 아니 납득할 수 없게 되었을까? 왜냐하면 우리는 태고시대의 사람들과는 다른 정신공간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유일한 방법은 상품의 소비를 통해서이다. 돈을 주고 상품을 사고, 또 상품을 팔아 돈을 받는 것에 우리는 아무런 의구심도 없다. 하지만 ‘전혀 다른 특성들을 가지고 있는 사물들(청바지, 밀, 휴대폰)이 서로 교환될 수 있다’는 현상은 마르크스가 <자본론> 제1권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사실이라고 말했던 점이었다. 우리는 각각의 상품들이 ‘사회적 노동시간’으로 표준화될 수 있고, 이런 이유로 상품을 화폐로 교환하는 방식을 당연하게 여긴다. 모스의 언어로 말하자면 ‘자본주의 상품경제’가 우리의 정신생활에 침투해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자본주의 시스템이 단순히 우리의 경제생활에 대해서만 영향을 미치지 않고 개인과 국가 전체의 생활 방식에 영향을 주고 있듯이, 우리는 증여 체계를 단순한 경제적 사실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다른 정신 공간의 형성

<증여론> 2장은 포틀래치와 쿨라의 세부적인 사례들을 보여준다. 다양한 사례들은 현재의 법이나 고정된 규칙보다 더 정교하고 세밀한 증여 체계를 보여주고 있다. 주고-받고-답례하기는 “끊임없으면서도 정확하게” 행해진다. 증여체계 속에 살고 있던 태고사회의 사람들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구성원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의 ‘공유된 감각’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이런 공통감각은 그들이 쿨라 교환에서 지속적으로 교환되는 음왈리와 술라바를 ‘너무 오랫동안 간직하지 않고, 그것들은 넘겨주는 데 느리지도 않으면서 인색하지도 않게’  넘길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는 포틀래치와 쿨라의 세부적인 규칙들에만 현혹되서는 안 된다. 2장에서 몇 번이나 모스가 “부족 간의 쿨라 전체가 더욱 일반적인 체계 중에서 가장 엄숙하고 가장 극적인 과장된 경우”라고 말한다. 수천 장의 담요를 태우거나 동판을 버리는 일들은 그들이 일상을 살아가는 원리를 기억하고 몸에 익히는 의례라고 할 수 있다. 쿨라 중에서 규모가 크고 가장 엄숙하며 가장 고상하고 또한 가장 경쟁적인 형태, 즉 우발라쿠Uvallaku라는 대해상원정 형태 역시 마찬가지다. 우발라쿠에서는 교환할 것을 아무것도 갖지 않고 출발한다.


트로브리안드 군도


남태평양 멜라네시아 & 폴리네세아 지역


그렇다면 일상을 살아갔던 사람들의 삶과 사회속에서 전체적인 급부체계로서 증여는 어떻게 작동했을까?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멜라네시아, 폴리네시아는 지리적으로 엄청나게 넓은 지역이다. 우발라쿠와 같은 대해상원정이 진행되기 위해서는 엄청난 시간과 노력, 기술이 필요하다. 우선 튼튼한 배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이 필요하고, 바다 위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한 항해 기술 혹은 천문학에 대한 연구도 필요했을 것이다. 오랜 기간 항해하려면 체력도 좋아야 하고, 소통과 화해의 기술도 필요하다. 또한 대규모의 증여와 함께 여러 수준의 다양한 증여가 유지되려면 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야 할 것.

삶의 원리로서 작동하는 증여 체계란 머릿 속으로만 이루어지는 형이상학이 아니(어야 한)다. 매일 매일의 행위 속에 이런 원리들이 녹아 있어야 하고, 이런 원리들을 기억할 수 있는 다양한 방식의 의례가 필요하다. 너무 작은 행위처럼 보이고, 단회적인 행위일지 모르지만 뭔가를 선물하는, 증여하는 방식을 하지 않는다면 마르셀 모스가 전해주는 ‘증여’는 꿈 속의 유토피아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일단 주변의 친구들, 가족들, 혹은 동료들에 선물하는 것부터 실천해보면 어떨까요?



2018. 06.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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