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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

[PS] 정말 예술의 기호는 다른 모든 기호들보다 우월한가?

by 홍차영차 2024. 5. 2.

 

4, 5장을 계속해서 보다보면 예술에 대한 특권, 그것도 절대적인 특권을 언급하는 들뢰즈에 살짝 의심이 들기도 한다.

예술만이 비물질적이라고 하고, 여전히 물질적이라고 여전히 삶의 기호들이라고 하면서 감각적 기호들을 폄하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유물론적인 사고를 부인하는 걸까? 또한 예술 기호를 이야기하면서 계속해서 차이 그 자체가 예술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차이 그 자체를 강조하던 들뢰즈가 여기서 왜 갑자기 본질, 본질 하는 걸까? 예술이 본질 그 자체라는 말이 도대체 뭘까? 동일성이 아닌 본질로서의 차이 그 자체.

일단 예술의 기호로 넘어가는 징검돌로서의 감각적 기호를 발견해야 한다.

평생을 살아가다보면 누구나 비자발적 기억과 마주친다. 달리던 기차에서 우연하게 열린 창문으로 들어온 바람의 향기에 갑자기 학창시절로 돌아간다. 친구들과 처음으로 놀러갔던 경부선 기차에서 먹었던 음식과 노래들이 알 수 없는 기쁨으로 솟구친다. 이건 기억이 아니다. 의식적인 기억으로는 이런 강도의 초현세적인 기쁨을 맛볼 수 없다. 또한 이 기쁨과 감각은 과거의 것도 아니고 현재의 것도 아니다. 알게모르게 축적되고 접혀진 것이 우연한 마주침을 통해서 펼쳐진다.

비자발적 기억은 표상적인 사유가 아니다. 누구나 그 희열, 기쁨, 참을 수 없는 슬픔을 겪지만 (언어로) 표현하기 쉽지 않다. 기차의 바람뿐만이 아니다. 음식을 먹다가, 길을 걷다가, 바쁜 와중에 보게 된 벗꽃을 보면서도 알게 모르게 우리는 비자발적 기억과 마주친다. 하지만 이러한 기억은 표상적인 기억이 아니기에 모호하고 어떻게 이런 감정이 내게 생겼는지 파악하기 어렵다. 바로 그 찰나의 순간을 붙잡아야 한다. 감각적 기호가 지성, 욕망, 상상력을 요구하는 이유다.

표상적 사유가 아닌 다른 사유의 이미지를 갖는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의식적인 노력을 요구한다. '비자발적 기억'의 사고를 당한 순간에 바쁘다는 핑계로, 언어로 표현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그냥 지나치는 순간 사라진다. 마치 어떤 기쁨도 겪지 않았던 것처럼 신기루처럼 생각하면서 무시하게 된다. 반대로 이런 순간을 놓치지 않고 '이게 어떤 기쁨일까', '어디로 오는 기쁨일까'를 고민하고 다양한 도구를 써서 표현하려고 노력하게 되면 길이 열린다. 감각적 기호가 예술의 기호로 가는 발단, 문이 되는 이유이다.

예술의 기호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비언어적인 기호들로 자신에게 들이닥친 감응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림을 그린다고 모두 예술기호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아무렇게나 작곡한다고 해서 예술 기호가 되는 것도 아니다. 반면에 언어로 표현하지만 그것 역시 예술 기호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술이라고 말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들뢰즈는 바로 여기에서 차이 그 자체가 예술의 본질이라고, 문체(style)라고 선언한다.

'“같으면서도 다른 것”라고 인식하게끔 하지 않는 작품은 위대한 예술가의 작품이 아니다'라는 말을 떠올려보자. 하나의 표식, 기호, 모티프로 위대한 문체(style)를 포획할 수 없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분명 반복되지만 그 반복 사이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예술만이 비물질적이라고 말하는 부분도 여기에서 이해될 수 있다.

예술가는 소리, 색감, 문자라는 물질적 질료를 가지고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만들고 글을 쓴다. 하지만 예술가들이 전달하려는 것은 그 소리와 색감, 문자에 있지 않다. 예술작품이 전하려는 강도는 그 질료의 물질성이 완전히 사라질 때에야 비로소 제대로 보인다. 아직 '어떻게(how)'라는 질문은 삼가도록 하자. 아무런 의도가 없다고 하지만 예술작품은 일종의 강도를 전달한다. (이 강도가 예술가의 것인지 아니면 질료의 것인지 혹은 어떤 대상의 것인지에 대한 질문도 일단 접어두자.) 그리고 그것이 예술이 되는 것은 그것만의 본질, 차이 그 자체를 함축하고 전개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물질성은 없다. (예술작품의 비물질성, 정신적인것은 <천개의고원>에서 다뤄지는 얼굴성과 연결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얼굴성이란 것 역시 얼굴에 있는 눈, 코, 입이 그 기능과 떨어졌을 때에 머리가 아니라 얼굴, 표정이 구성된다.)

감각적 기호와의 차이가 바로 이것이다. 마들렌과 홍차, 포석, 세 그루의 나무, 마르탱빌의 종탑들을 일단 물질적으로 마주친다. 그리고 이러한 마주침은 우연히 벌어진다. 감각적 기호에서는 '우연히'라는 말이 중요하다. 우연적 충돌 - 사건! 홍차를 두번째, 세번째 마실 때 마르셀은 처음의 그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을 느낄 수 없었다. 감각적 기호들이 이렇게 물질성의 기호들에 의존하는 것과 달리 예술의 기호들은 (어떤 면에서는) 강도만 있다. 그 강도가 작품을 통해서 매개되지만 그것이 전달하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차이 그 자체가 된다. 또한 예술의 기호는 우연성에 의존하지 않는다. 반복된 감각적 훈련을 통해서 언제라도 이러한 강도를 전할 수 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면, 들뢰즈는 감각의 기호와 예술 기호를 이전에 사교계의 기호를 통과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한다. 아무 의미 없이 행위를 대체하는 기호이지만 사교계의 기호를 통과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언어를 사용하면서 언어가 왜곡이라는 것을 파악할 때 언어 밖으로 나가는 사유의 확장이 가능하다. 분명한 것은 우리는 언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언어가 기호라는 것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 이 세계가 기호, 거짓의 기호들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는 것이 우선적이라는 말이다. 또한 감각적 기호, 예술의 기호를 만날 때도 역시 이런 언어적인 기호의 이해를 바탕으로 혹은 언어적 기호를 포함하는 충만함과 풍부함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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