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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

세계 끝의 버섯

by 홍차영차 2023. 12. 14.

 

 

<세계 끝의 버섯>은 말 그대로 버섯 이야기다. 

특히 미국 오리건주, 일본, 핀란드의 송이버섯 이야기를 주로 다루고 있다. 송이버섯 채집꾼들, 소나무의 생태, 소나무와 송이버섯의 공생적 관계까지. 그렇다고 이 책이 송이버섯'만' 이야기하지 않는다. 송이버섯으로 생태주의를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신기하게도 애나 칭은 송이버섯의 채집 유통경로를 따라가면서 자본주의와 비자본주의가 어떻게 서로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자본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분석을 보여주는 책들은 많다. 이런 책들을 읽고 나면 과연 자본주의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능할까, 자본주의가 끝날 수 있을까 한탄스러울 때가 많다. 그런데 이 책은 냉혹한 자본주의 세계가 끝나지 않음에 절망하는 것에 끝나지 않고 그곳에서 피어나는 비자본주의적 삶과의 연계성을 보여준다. 어떻게 보면 애나 칭은 송이버섯이라는 매개를 통해서 우리가 힘겨워하는 자본주의의 세계는 사실 더 큰 비자본주의적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고 알려준다. 마치 우리는 평상시에 우리의 의식세계에만 집중하면서 마치 의식의 세계를 빠져나올 수 없는 것처럼 느끼다가 더 큰 무의식의 세계가 있다고 알게 된 것 같은 기분이다.

 

그래서 <세계 끝의 버섯>은 참 묘하게 위로가 되는 책이다.

위로를 준다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긍정적이고 낙관적이지 않다. 이건 그냥 정신승리일뿐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들이 구석구석에 녹아져 있고, 추방당한 사람, 전쟁의 경험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송이버섯 채취로 내몰린 모습을 세밀한 눈으로 담담하게 전한다. 집도 절도 없이 떠도는 송이버섯 채집인들의 삶에서는 불안정성과 불확정성만이 넘쳐난다. 놀랍게도 애나 칭은 송이버섯 채집과 유통에서 드러나는 '불안정성'과 '불확정성'의 세계에서 새로운 빛을 발견한다. 불안정성과 불확정성이 세계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이라고 말하는 듯 하다.

피폐한 삶을 살아가는 내몰린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 억지 논리를 전개하지 않는다. 인간의 탐욕으로 망가졌다고 생각하는 숲과 그렇게 교란된 숲에서만 잘 자라나는 소나무, 그리고 이런 소나무와의 공생관계 속에서만 솟아나는 송이버섯의 우연적 마주침을 보여주면서 사실은 우리의 삶 역시 이렇게 형성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교란과 오염은 나쁜 것만은 아니다.

이 책을 읽을 때 조금은 생소하게 여기지는 단어들이 있다. 교란, 오염, 구제(salvation), 번역.

우선 교란이나 오염은 그 말 자체가 나쁜 것으로 사용되지만 애나 칭은 자본주의적 세계의 출발선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교란들과 오염은 나쁜 것으로만 이야기하지 않는다. 처음 읽을 때 구제라는 말이 와 닿지 않아서 출판사(현실문화)의 블로그를 찾아보니, 구제/번역/오염을 다음과 같은 뜻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자본주의 안으로 끌여들여서 (구제) 장악함 상품으로 만들어냄 

자본주의 상품이 되는 것 (번역)

상품이 선물이 되는 것 (번역)

서로의 신체를 오염시키면서 함께 생존하는 것(오염)

[출처] <세계 끝의 버섯> 읽기 가이드_역자 북토크 후기1 w. 에코페미니즘 달과 나무 기획|작성자 현실문화

 

이상한 것은 애나 칭의 이러한 개념들에 반발감이 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저자의 논리를 차분히 따라가다 보면 우리의 삶은 그 시작부터 '오염'으로 시작하고 있고, 어떤 상품도 상품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 이해된다. 어쩌면 자본주의라는 것은 인류의 역사에서 보면 우연한 마주침으로 형성된 삶의 일부분일뿐이다. 다만 이 자본주의의 모습이 너무나 현란하게 반짝거리고 있어서 내 삶을 이루는 다른 부분들을 보지 못하게 현혹하고 있을 뿐이다.

 

더 흥미로운 점은 이 책이 내가 좋아하는 들뢰즈와 마르셀 모스의 철학을 토대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들뢰즈/가타리의 <안티-오이디푸스>와 <천개의 고원>에는 '자본주의와 분열증1, 2'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정작 이 책을 읽을때는 왜 이 책들에 '자본주의와 분열증'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지 명확히 알지 못했던 것 같다. 신기하게도 <세계 끝의 버섯>을 읽으면 읽을수록 들뢰즈/가타리가 이야기한 '리좀적 세계'가 어떤 것인지 아주 구체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마치 들뢰즈/가타리 철학의 실제 적용편처럼 읽힌다. 애나 칭은 리좀적 세계가 어떻게 가능할까, 차이의 철학이 어떻게 작동할 수 있을까에 대한 대답을 송이버섯을 통해서 아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다른 토대로서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의 삶의 현대 세계에서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책처럼 읽힌다. 애나 칭은 송이버섯이 소나무에서 자라고 유통되고 다시 일본일든의 식탁 위에 오를 때의 모습에서 사실 아주 짧은 시간만 자본주의 세계를 통과하고 나머지 부분은 비자본주의적 세계, 선물의 원리로 움직인다고 말한다. 오리건주에서 불법적으로 버섯을 채취하는 사람들, 오로지 우연한 마주침으로만 채취하게 되는 송이버섯, 그리고 귀한 송이버섯을 선물하고, 선물받으면서 갖게 되는 마음. <세계 끝의 버섯>은 '순수한 증여나 완전한 사리사욕은 없다'고 이야기하는 마르셀 모스의 선물의 세계를 아주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이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은 애나 칭이 풀어내는 글솜씨와도 연결된다.

<세계 끝의 버섯>은 처음부터 끝까지 어렵지 않게 읽힌다. 내용상으로는 여러가지 철학적, 경제적 이론들을 품고 있지만 이러한 내용들을송이버섯이라는 어쩌면 너무나 친숙하고, 한편으로는 너무나 낯선 소재를 통해서 차분한 논조로 풀어준다. 이 책을 읽어가다보니 내가 살아가는 모습 역시 송이버섯의 세계처럼 파괴되고 고통스러운 순간들과 그곳에서 마주친 우연들을 통해서 구성되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2023년 12월에 <세계 끝의 버섯>을 읽게 된 건 행운인듯.

다들 이 행운을 누리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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