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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

다른 퇴근길(3) 퇴근길과 백수, 그 사잇길의 존재론

by 홍차영차 2019. 12. 12.

퇴근길과 백수, 그 사잇길의 존재론

: <천 개의 고원>






이건 백수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인류가 태초부터 전쟁을 해 왔다지만, <일리아스>에 관한 기억을 아무리 더듬어보아도 팔과 다리를 없애버리는 예는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 …… 일종의 원근법적 착시 때문에 우리는 절단에 의한 이러한 불구를 우연한 사고 탓으로 돌린다.” …… 사회의 최상층이든 아니면 최하층이든 처음부터 선천적인 신체 장애자, 수족이 절단된 사람, 사산아, 선천적으로 허약한 사람, 외눈과 외팔이 등을 필요로 하는 것은 국가 장치이다. (<천개의 고원>, 819쪽)


퇴근길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아보겠다고 호기롭게 말한 지 7년이 지났다. 일주일에 5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고 믿)게 만든 사회, 스스로-함께 살아가는 능력을 잃어버려 ‘불구’로밖에 살 수 없는 배치에서 벗어나겠다는 이유를 댔던 것 같다.

임금노동자에서 ‘백수’가 되면 뭔가 해결되리라고 생각했다. ‘일-임금노동’에서 벗어나면 달라질 것이라고, 돈에 구속받지 않는 ‘활동’을 하는 백수가 되면 좀 더 역동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했다. 하지만 문탁에서 했던 활동들을 돌아보니 나는 여전히 불구인채로 파지스쿨, 악어떼를 거쳐 퇴근길인문학, 파지사유 매니저를 했던 것 같다.

문탁에서 나만큼 ‘명함’ 만들기에 집착했던 사람도 없다. 파지스쿨을 하면서 ‘마을교사’ 명함을 팠고, 파지사유 매니저를 하면서는 ‘큐레이터’ 명함을 다시 만들었다. (2020년에는 퇴근길연구소로 명함을 또 파고 싶다. -.-; ) 나는 여전히 명함 위에 새겨져 있는 응고된 ‘이름’ 속에서 살아가는 것에 안도감을 느낀다. 활동을 구성하고, 이름을 만들고, 돈을 벌고. 이런 과정 속에서 나는 내가 생성하는 활동의 구체적인 이유를 찾아왔다. 이름이 만들어지지 않는 활동, 의미 생성이 보이지 않는 작업, (직접적으로) 돈이 벌리지 않을(것이 뻔한) 활동에 회의적이었다.

이렇게 내 신체는 여전히 굳어진 이름 속에서 작동하고 있었지만, 문탁의 활동에서는 탈학교와 퇴직을 주창했다. 나는 이미 퇴직을 하고 철학을 공부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서 있는 그 근거를 굳건히 하려는 편에 서서 학교를 나오라고, 월급을 받는 임금노동에서 나오라고 말했던 것 같다. 하지만 함께 공부하는 친구들에게 탈학교와 퇴직을 말할 때마다 도리어 내 속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왜냐하면 지금 나는 겉모습으로는 백수가 되었지만, 내 신체의 작동과 사유 방식은 여전히 임금노동자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들뢰즈/가타리의 <천 개의 고원>에서 ‘되기’와 ‘전쟁기계’라는 개념과 부딪혀보니, 내가 했던 것은 ‘백수-되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알지 못하는 자유를 흉내내고 백수인척 모방한 것에 불과했다. 문탁의 활동에서 새로운 공간과 사유를 만들어내기보다, 그곳에서조차 홈을 파는 방식으로 살아갔을 뿐이다. 이제야 백수의 ‘백수-되기’를 고민할 수 있을 것 같다.


‘되기’, 사이에서 존재하기

‘백수-되기’는 단순히 퇴직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지금 하고 있는 일과 전혀 다른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물론, 아무일도 하지 않는 것은 결코 해결책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다면 백수의 ‘백수-되기’는 어떻게 구성될까?

들뢰즈/가타리가 건네준 ‘되기’라는 개념은 ‘백수-되기’가 어떤 것일 수 있는지 상상할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되기’란 프랑스어로 devenir인데, ‘~이 되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되기’에 ‘남성-되기’는 없다. ‘남성-되기’가 무엇인지 몰라도, 여기서 나는 ‘되기’가 그냥 아무것이나 되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남성의 생성들은 그토록 많은데 왜 남성-되기는 없는 것일까? 그것은 우선 남성이 유달리 다수적인 반면 생성들은 소수적이며 모든 생성은 소수자-되기이기 때문이다. …… 세상에서의 다수성은 남성의 권리나 권력을 이미 주어진 것으로 전제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여성, 아이, 그리고 동물, 식물, 분자는 소수파이다. 아마도 남성-기준과 관련한 여성의 특별한 위치가 소수파 그 자체인 모든 생성들이 여성-되기를 통과하도록 만드는 것 같다. (<천개의 고원>, 551쪽)


왜 남성-되기는 없을까? 들/가에게 모든 ‘되기’는 창조이자 생성이고, ‘소수자-되기’이기 때문이다. 양적인 소수가 아니라 질적으로 다름을 생성하는 소수자성! 생성이란 결코 딱딱한 것에서 나오지 않는다. 이미 응고된 상태, 견고해진 권력에서는 어떤 새로운 것도 나오지 않는다. 모든 변화는 불편함에서 나온다. 현재의 삶에서 아무런 질문도 올라오지 않는다면 생성은 불가능하다. 굳어진 권력이란 별 것 없다. 살아가면서 자신이 가진 기득권을 바탕으로 유치한 이유를 들어서 어떤 일을 하겠다고, 또는 하지 않겠다고 쉽게 말하면서 (그것으로 인해 고통받을) 주변을 돌아보지 않는 존재들! 딱딱해진 상태에서는 다른 것으로의 되기=이행이란 불가능하다. 되기를 실천하기 위해서 우선 그 딱딱한 ‘구조’, ‘형식’, ‘내용’을 허물어뜨리고 해체해야 한다. 다시는 어떤 흔적, 형태도 구성하지 못할 수 있다는 정도로 녹아져 내려야 한다.

백수의 ‘백수-되기’는 임금노동 vs 백수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쥐-되기, 여성-되기, 아이-되기, 흑인-되기 라는 되기의 구체적인 대상이 있지만, ‘되기’는 결코 그 항들을 포함하지 않기 때문이다. 되기가 항들 사이의 이행이고 생성devenir인 이유이다. 임금 노동을 하지 않는다고, 백수의 외형을 가졌다고 백수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전 신체의 작동 방식과 사유 방식을 해체하지 않는 생성이란 있을 수 없다. 되기는 이행이지만 언제나 이행 중에 있는, 이전과 다른 변이 능력을 가진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백수의 백수-되기는 백수와 퇴근길의 사이-존재여야 한다.




전쟁기계와 백수

사이-존재? 말이 쉽지 생성을 위해서는 ‘직장인의 신체’를 해체해야 한다거나, 단순히 퇴직을 하거나 다른 일을 새롭게 시작하는 것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말은 어렵고 추상적으로만 여겨진다. 하지만 ‘백수-되기’를 상상이나 상징 혹은 단순한 비유로 여겨서는 안 된다. ‘되기’란 실재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성 전환 수술을 하지 않으면서 여성-되기, 쥐로 변형되지 않으면서 쥐-되기가 실재적이 될 수 있을까? 임금노동자도 아니고 백수도 아닌 사이-존재로서 ‘백수-되기’는 어떻게 가능할까?

‘전쟁 기계’라는 개념은 이러한 백수-되기의 항구적 실천에 가장 큰 무기가 되는 것 같다. 그런데 되기는 생성이고 창조라고 말하면서 갑자기 ‘전쟁 기계’라니!? 폭력과 광기로서 정부에 대항하는 집회라도 하라는 말인가 아니면 현존하는 국가를 무너뜨리는 테러리스트가 되라는 것인가?


전쟁 기계는 국가 장치와는 다른 종류에 속하며 다른 본성을 가질 뿐더러 다른 기원에서 유래한다는 사실이 명백해진다. …… 국가 자체는 전쟁 기계를 갖고 있지 않다. 국가는 단지 군사 제도 형태로서만 전쟁 기계를 전유할 수 있지만 이 전쟁 기계는 끊임없이 국가에 문제를 제기한다. 이처럼 외부에서 유래한 전쟁 기계를 계승하고 있는 군사 제도를 국가가 경계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천개의 고원>, 678쪽)


혹자는 국가 속의 군대를 생각하면서 전쟁 기계를 국가에 속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국가의 관점에서 ‘전쟁의 인간’은 필연적으로 질서와 기준을 무너뜨리는 부정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전쟁 기계는 분명 국가와 대립되고 외부적이다. 국가가 어떤 존재인지를 생각해보면 실마리가 풀린다. 

국가는 순전히 딱딱한 것으로 구성되는 존재다. 동일성과 불변성(규칙/기준)을 바탕으로 조직되는 국가! 즉, 국가 속에서 전쟁기계로 존재한다는 것은 동일성과 불변성에 대항하는 모든 행위들을 말한다. 폭력(전투)을 행하는가 그렇지 않는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폭력조차도 국가 질서를 강화시킨다면 그것은 국가에 의해 전유되어버린 폭력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한 변형된 전쟁기계일 뿐이다. 그렇기에 기존의 규칙과 기준을 모호하게 하는 어떤 존재, 모임, 공간, 시간도 놀이, 책, 옷차림, 화장술까지도 모두 전쟁 기계가 될 수 있다.


(체스/장기)이와 달리 바둑의 경우에는 열린 공간에 바둑알이 분배되어 공간을 확보하고 어떠한 지점에서도 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유지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바둑알은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목적도 목적지도 없이, 출발점도 도착점도 없는 끝없는 되기(=생성)이다. (<천개의 고원>, 675쪽)


앞서 말했듯이 저항과 교란이 항상 폭력을 수반할 필요는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언제든지 현재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생성을 촉발한다면, 그 존재 자체는 ‘절대폭력’ 혹은 ‘폭력 없는 폭력’이 될 수 있다. 임금노동을 하고 있는가, 백수로 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자신이 있는 곳에서 스스로가 전쟁 기계로 존재하고 있는가가 백수-되기의 핵심이 된다.

백수의 백수-되기는 임금노동을 파괴하고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갈 방법을 창안하는 것이고, 이런 창조로 매혹하고 낡은 것들을 위협하고 파괴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는 마치 알파고AlphaGo와의 바둑 대결에서 3연패를 뒤에 보여준 이세돌의 4국 78수가 보여준 당혹감, 기형적 매혹과도 같다. 소크라테스의 경우는 자신의 존재 자체가 앉은 자리에서 유목하는 ‘전쟁 기계’였음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그가 한 일이라곤 시장바닥에서 사람들과 대화하고 밥을 먹었을 뿐인데 아테나이는 그에게 사형선고를 내리지 않았던가. 니체의 말처럼 “좋은 전쟁에서는 화약냄새가 나지 않는다.”(<이 사람을 보라>)


야금술사와 되기

파지스쿨을 할 때 스쿨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와 너희들은 그리 다르지 않아. 나도 너희도 공부하면서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새로 발명해야 해.” 2017년 퇴근길인문학을 시작하면서도 이 점을 강조했다. 텍스트도 중요하고 더 많이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필요충분의 조건은 이 속에서 형성되는 ‘우정’이고 친구들과 함께 구성하는 ‘공통의 감각들’이라고. 살아가는 방식을 함께 고민하고, 함께 살아갈 친구들을 형성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할 때 조금 찜찜한 맘이 있었다. 지금 내가 학생이 아닌데 학생들과 다른-학생-되기를 구성하는 것이 가능할까? 지금 나는 직장을 그만두고 백수가 되었는데, 직장인과 함께 다른 다른-퇴근길을 구성하는 것이 가능할까? 퇴근길인문학은 이런 물음에 대한 실험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다행히도 우리는 ‘일과 불안’, ‘일과 가족’, ‘돈과 공동체’, ‘공부와 좋은 삶’이란 주제를 함께 공부하면서 지금과 다른 길을 만들어야 한다는, 만들 수 있다는 감각을 구성할 수 있었다. 퇴근길인문학은 분명 백수-되기와 다른-퇴근길-되기의 공명의 장이었다.

퇴근길인문학 3년을 거쳐 오면서 나에게도 함께 공부한 동료들에게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때때로 퇴직을 권하던 나는 백수-되기가 퇴직의 여부와 상관없음을 확인하면서, 다른-퇴근길 역시 직장을 그만둔다고 해결되지 않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처음 공부하러 온 친구들 역시 지금의 ‘일을 그만 두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고민이 컸었지만, 공부를 하면서 자신의 일(직업)과 자본주의 그리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시선이 변하게 되었다.


이동 생활과 야금술 간에는 특별한 기본적 관계(탈영토화)가 존재한다. …… 금속과 야금술은 다른 물질이나 조작에서는 감추어지거나 매몰되어 있는 무엇인가에 의식을 부여하고 이를 의식하도록 만드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 야금술적인 인도, 산을 기어오르는 것이 아니라 산을 구멍을 뚫고 지나가며, 대지에 홈을 파는 것이 아니라 하고 들어가고, 공간을 매끄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공간에 구멍을 뚫어 대지를 마치 스위스 치즈처럼 구멍 투성이로 만드는 것이다. (<천개의 고원>, 787, 794쪽)


직장인이었다는 과거에 의지할 필요도 없다. 직장인이 아니라는 것 역시 문제가 아니다. 백수와 직장인은 야금술사가 전쟁기계와 맺는 관계 속에서 되기를 실천할 수 있다. “유목적 전쟁기계는 소위 표현의 형식이며, 이것과 관련된 내용의 형식이 바로 이동적 야금술”이기 때문이다. 

들/가는 전쟁기계의 무기와 관련하여 야금술과 야금술사를 특이한 위치에 놓는다. 야금술사는 유목민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정주민도 아니다. 그는 순회하는 자, 이동하는 자이다. 야금술사가 야금술을 행하기 위해서는 유목민과 마주칠 수 있는 광산이나 초원과도 가까워야 하지만, 먹고살기 위해서는 정주민(국가)과도 접속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전쟁기계와 야금술은 유목주의nomadism와 연결된다. 유목의 공간 안에 있다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어디서든 새로 시작하고, 변이할 수 있는 능력이다. 앉아서 유목하기가 가능한 이유이기도 하다. 야금술을 “내용의 형식”으로 가진 백수와 직장인은 비정상이 아니라 “혼한된 자”로서 어디 있는가 혹은 무엇이냐가 아니라 어떤 것을 하고 있는가에 집중할 수 있다. 앞을 가로막고 있는 암벽은 이제 넘어야 할 장벽이 아니라 구멍을 뚫고 그 속에서 그동안 “은폐되고 숨겨져 있어 인식되지 않는 물질적인 생명성”을 밝게 드러내는 새로운 공간이 된다.




국가 장치 속에서 우리는 불구로 태어난다고 말했지만, 사실 불구인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들뢰즈/가타리는 처음부터 ‘되기’란 배치 속에서 이뤄진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배치란 말 속에서 떠올릴 수 있듯이 하나의 단독자는 들/가의 존재론에서 불구일 수밖에 없다. 이웃항과의 배치, 서로 서로 관계 속에서 활동을 만들고,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은 자신이 배치 속에 있음을 파악하는 것부터 출발한다. 내 삶이 친구의 삶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이것은 무수한 재배치에 의해서 새롭게 생성될 수 있다는 점을 경험해야 한다.  새로운 접속을 시도해야 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새로운 팔과 특이한 다리로 작동할 수 있는 실험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면 나의 백수-되기는? 일반적으로 백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 놀고 있는 사람을 뜻한다. 하지만 백수-되기란 백수도 퇴근길도 아닌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그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렇게 볼때 나의 백수-되기는 문탁네트워크라는 공동체 속에서 여전히 구성중인 것 같다. 임금노동이 아닌 방식으로 살아가는 방식을 실험하면서 마을교사, 파지사유 매니저, 공동주방 요리사, 퇴근길대중지성 튜터, 공유지 청소원, 강학원 학생, 등산하는 친구로 존재하기! 커피를 마시고 빵을 먹을 때는 ‘무진장’으로 먹고, 여여샘이 때때로 챙겨주는 영혼의 수프인 누룽지와 도라지샘이 선물한 김치로 아침을 먹으면서 살아가기! 백수-되기는 결코 홀로 이뤄지지 않는다.


2019. 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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