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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선물과증여

낯선 사람을 만날 때는 생강을 씹어 밷어라

by 홍차영차 2024. 3. 21.

트로브리안드 섬의 키리위나 사람들은 말리노프스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도부섬 사람들은 우리처럼 착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잔인하고 인육마저 먹습니다.

우리가 도부 섬에 도착할 때에는 그들을 경계합니다. 우리를 죽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내가 생강 뿌리를 씹어서 뱉으면 그들의 정신이 바뀝니다. 그들은 창을 버리고 우리를 환영합니다."

축제와 전쟁 간의 불안정한 관계를 이보다 더 잘 표현하는 것은 없다.

마르셀 모스 <증여론> 280쪽

 

 

계속 공부하고 있지만 '이불 밖은 위험해'라는 말이 점점 더 와닿는다.

일하면서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도 긴장이 되고, 식당이나 편의점에서 어쩔 수 없이 마주쳐야 하는 익명의 사람들을 만날 때는 더 그렇다. 그냥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인데도 이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기에 긴장하고, 무차별적 사건 사고가 넘쳐나기에 조심에 조심을 더하게 된다. 물론 반대로 처음 만난 편의점 알바의 따뜻한 한 마디, 친절한 몸짓 하나에 기분이 너무 좋기도 하고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기도 한다.

사람을 싫어하는 건 아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도 나누고 맛있는 밥을 먹으면서 좋은 관계를 맺으며 살고 싶다. 하지만 사람과 만날 때 너무나 많은 오해가 쌓이는 것 같다. 오해가 생길까봐 걱정한다. 내가 하는 행동을 나쁘게 보면 어떻하지, 반대로 내가 너무 바보같거나 호구처럼 보이는 것도 싫은데... 점점 이렇게 생각하다보면 그냥 혼자 있고 싶어진다. 일과 관계된 사람과는 되도록이면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고 기계처럼 일하고, 스쳐 지나가는 익명의 사람들에게도 그냥 사물처럼 느껴기를 바란다. 이렇게도 살 수 있다. (점점 메말라가겠지만)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이런 방식으로 자신을 보호하면서 살고 있지 않을까.

"도부섬 사람들은 우리처럼 착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잔인하고 인육마저 먹습니다."

바로 이 문장이 우리가 낯선 타자들을 보면서 느끼는 감정이 아닐까. 사실 그들도 나처럼 사랑하고 울고 기뻐하고 화내고 삐치면서 살아가는 아주 평범한 사람들인데, 나는 이불 밖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마치 나를 잡아먹을 것처럼 상상한다.

<증여론>은 삶 자체가 무수히 많은 증여, 즉 주고-받기-답례하기를 통해서 구성된다고 말한다. 증여라는 말에는 현재와 같은 상품교환이나 신에게 드리는 순수한 (것처럼 보이는) 증여까지도 포함된다. 그런데 이러한 주고-받고-답례하기는 그냥 이뤄지지지 않는다.

남태평양의 원주민들도 우리와 비슷한 타자에 대한 공포가 있었다. 그럴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부족들이 사냥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숲속에서 다른 종족을 만난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사실 아주 간단하다. 가볍게 인사하고 그냥 지나치면 된다. 하지만 동물과 달리 인간들은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서로의 마음을 알 수가 없다. 혹여 내가 잡은 사냥감을 빼앗으려고 공격하면 어떻하지 걱정하게 된다. 그래서 이들은 주변의 부족들과 주기적인 주고-받기-답례하기를 통해서 관계성을 확인한다. 하지만 주기적인 주고-받기-답례하기에도 매번 절차와 의례가 필요하다. 문자적인 법이 없기때문에 일련의 의례들을 통해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해야 한다. 춤을 추는 새끼손가락의 동작들, 요란스럽게 보이는 몸치장, 상대방의 부족에게 다가가는 걸음걸이들은 모두 이런 의례의 일종이기 때문에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된다.

"내가 생강 뿌리를 씹어서 뱉으면 그들의 정신이 바뀝니다."

말리노프스키가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황당했을까. 생강 뿌리를 씹는 것과 도부섬 사람들이 착하게 바뀌는 것은 전혀 관련이 없어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생강을 씹는 것이 아주 신체적인 의례의 일종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 생강 뿌리는 씹으면 어떻게 될까?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매울 뿐 아니라 냄새도 아주 강력하다. (당연히 이성적인 상호 이해는 아니다.) 자신들을 맞이하면서 생강을 씹는 키리위나 사람들을 보면서 도부섬 사람들은 긴장을 풀었을 것이다. 생강 뿌리를 씹는 것은 자신을 다른 존재로 바꿔주고, 상대방도 다른 존재가 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게 바로 이렇게 '생강 뿌리는 씹어서 뱉는' 의례가 아닐까. 물론 지금 다시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 '생각을 씹자'는 건 아니다. 하지만 생강 뿌리는 씹는 것처럼 나를 바꾸고 상대방의 변화시킬 수 있는 의례가 필요하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다른 공동체,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 어려워진 이유는 이러한 새로운 의례를 발명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현재는 기본적으로 법이 이런 역할을 해준다고 할 수 있지만 이런 법은 경계선만을 그어줄 뿐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인스타그램이나 카톡프로필을 보면서 상대방을 파악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일종의 정보만을 줄 뿐이다. 실제로 낯선 사람을 만날 때 서로를 풀어줄 우리들만의 의례가 필요하다. 지금 생각해보니 흑인 친구들이 서로 만날 때 말로 인사를 하지만 악수를 하고 손을 스쳐가고 어깨를 부딪히는 제스처들는 서로에 대한 긴장을 푸는 그들만의 의례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방법이 있을까?

간단하지만 신체적인 동작들이 좋을 것 같다. 간단한 춤동작을 함께 하거나 하이파이브를 하는 것 만으로도 상호적인 긴장이 풀어지지 않을까. 비슷한 향수를 쓰는 것도 일종의 의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악수를 하면서 서로의 팔목에 코를 대면서 향을 맡아보는 것.

아, 서로 서로 시를 한 편씩 낭독하는 것도 아름다운 의례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시를 낭독한다는 것 자체가 아주 신체적이며 목소리를 통해서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우리가 같은 공동체에 있다는 것 역시 이런 일종의 의례들을 몸에 각인시키면 된다. 공통의 언어, 공통의 제스처, 공통의 향기, 공통의 옷차림. 공통의 음식까지. 다양한 의례들을 시도해보면 재미날 것 같다. ^^

트로브리안드 섬사람들과 함께 있는 말리노프스키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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