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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 읽기

문학의 힘

by 홍차영차 2021. 8. 26.

(프루스트) 문학의 힘

 

 

우리가 아무리 실제 인물과 깊은 교감을 나눈다 할지라도, 그 인물 대부분은 우리 감각에 의해 지각되고, 말하자면 우리에게 불투명하게 남게 되므로, 우리 감성으로는 들어 올릴 수 없는 무게를 제공한다. 불행이 한 실제 인물을 휘몰아쳐도 우리가 감동하는 것은 불행에 대한 우리의 전체 관념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며, 뿐만 아니라 그 인물 자신이 감동하는 것도 자신에 대한 전체적인 관념 중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소설가의 독창적인 착상은 정신으로서는 뚫고 들어갈 수 없는 부분을 같은 양의 비물질적인 부분으로, 다시 말하면 우리 정신이 동화할 수 있는 부분으로 바꾸어 놓을 생각을 했다는 데 있다. 154쪽
… 우리가 그러한 행동이나 감동을 우리 것으로 만들었고,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도 우리 마음속이며, 또 우리가 열정적으로 책장을 넘기는 동안 호흡이 빨라지고 시선이 강렬해지는 것도 바로 우리 마음에 달렸기 때문이다. 소설가가 우리를 이런 상태로 몰아넣으면, 다시 말해 우리가 오로지 내적 상태에 있게 되면 모든 감동은 열 배나 더 커진다. 소설가가 쓴 책은 꿈과 같은 방식으로, 그러나 우리가 자면서 꾸는 꿈보다 더 선명하고 더 오래 기억되는 꿈으로 우리를 뒤흔들 것이다. 소설가는 한 시간 동안 모든 가능한 행복과 불행을 우리 마음 속에서 폭발시키는데, 실제 삶에서라면 그중 몇 개를 아는 데도 몇 년이 걸리며, 또 그중에서도 가장 격렬한 것들은 너무도 느리게 진행되어 우리 지각을 방해하기 때문에 결코 우리에게 드러나지 않을 것도 있다. 155쪽

 

나는 정서(affectus)를, 신체의 행위 역량을 증대시키거나 감소시키고 촉진하거나 억제하는 신체의 변용들이자 동시에 이러한 변용들의 관념들인 것으로 이해한다. (<에티카> 3부 정의 3)

 

스피노자에게 감정(정서)란 관념적이기보다 신체적이다. 스피노자에게 정서란 ‘행위 역량을 증대시키거나 감소시키는’ 신체의 변용들이자 변용들의 관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외부 대상 자체를 경험하지 않고, 외부 대상이 내 신체에 만들어 낸 효과만을 감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살펴보면 우리가 “아무리 실제 인물과 깊은 교감”을 하더라도 ‘그 인물 자체’를 알 수는 없다. 우리는 항상 그 순간에 일어나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기보다는 쉽게 이전에 내가 가지고 있던 구체적인 감정들 - 신체의 변용 - 을 가지고 생각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세상의 모든 다양한 감정을 경험하기 위해서 ‘영원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인가.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려면 영원의 시간에서 ‘무한한 신체적 변용’을 겪어야 할까?

프루스트는 여기에서 문학(예술)의 힘을 언급한다. 샤르댕의 정물화를 통해서 프루스트가 일상의 사물들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갖게 되었고, 러스킨을 통해서 세계에 대한 새로운 관념을 갖게 되었듯이, 문학은 우리로 하여금 아주 미세한 감각부터 폭발력 있는 감정까지 경험하게 한다고.

 

철학이 삶에 대한 분석이자 해체라면, 문학은 그 ‘삶 자체’를 살아가게 하면서 그 정서를 체험하게 하기 때문이다. “정신으로서는 뚫고 들어갈 수 없는 부분을 같은 양의 비물질적인 부분으로”, “우리 정신이 동화할 수 있는 부분”으로 바꾼다는 것이 바로 이것을 뜻하는 것 같다. 단순히 비통함, 슬픔, 처절함이라는 단어를 아는 것으로 그 감정을 안다고 할 수 없다. 아무리 그 상황이 잘 묘사되고, 그 사건이 벌어진 논리적 원인과 결과를 안다고 하더라도 그 순간의 정서(신체적 변용)를 공유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문학은, 읽는 사람이 그 상황 속으로 들어가게 하고, 내가 그 사람이 되게 하면서 그 사람의 ‘신체적 변용’을 직접 내 몸으로 겪게 만든다. 물론, 몇 시간만에 최고의 행복과 최악의 불행을 경험하게 하는 문학책을 읽었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 감각은 그 소설을 통해서 처음 겪어본 ‘신체적 상태’이기때문에, 이것이 몸에 새겨지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다만 내가 현실에게 그와 비슷한 상황을 갖게 된다면, 혹은 소설의 그 사람과 비슷한 환경과 신체를 갖고 있다면 조금 더 빨리 그 ‘감정’을 체화할 수 있다.

 

우리와 유사하고 우리가 아무런 정서도 갖지 않았던 어떤 실재(res)가 어떤 정서에 의해 변용된다고 우리가 상상함에 따라 우리는 그와 유사한 정서에 의해 똑같이 변용된다. (3부 정리 27)
증명
실재들의 이미지들은 인간 신체의 변용들이며, 그 관념들은 외부 물체들을 마치 우리에게 현존하는 것처럼 재현한다.(2부 정리 17에 의해) 곧, (2부 정리 16에 의해) 그 관념들은 우리 신체의 본성과 동시에 외부 물체의 현존하는 본성을 함축한다. 따라서 만약 어떤 외부 물체의 본성이 우리 신체의 본성과 유사하다면, 우리가 상상하는 외부 물체에 대한 관념은 외부 물체의 변용과 유사한 우리 신체의 변용을 함축하게 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만약 우리가 우리와 유사한 어떤 이가 어떤 정서에 의해 변용된다고 상상하면, 이러한 상상은 이 정서와 유사한 우리 신체의 변용을 표현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 우리가 어떤 정서에 의해 변용된 우리와 유사한 어떤 실재를 상상한다는 점으로부터 우리는 그 실재와 더불어 유사한 정서에 의해 변용된다. 만약 우리가 우리와 유사한 실재를 미워한다면, 이 경우(3부 정리 23에 의해) 우리는 그 실재와 더불어 유사한 정서가 아니라 반대되는 정서에 의해 변용될 것이다. (<에티카> 3부 정리 27 증명)

 

거기까지 가 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스 비극이 그랬던 것처럼 적당한 곳에서 화해하는 것이 아니라 극단까지 가 보는게 중요하다.) 아주 미세한 행복과 즐거움에서부터, 국소적인 고통과 우울까지를. 이것 역시 수련이고 훈련이 필요한 듯 싶다.

클래식 음악을 듣는 것이 좋은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여기에는 한 곡에서도 다이내믹이 엄청나게 변하고, 곡과 곡 사이에도 다양한 차이를 보여주기 때문에 클래식을 주의깊게 듣다보면 자신의 감각이 깨어나는 것을 알 수 있다. 프루스트의 소설을 읽는 것이 주는 효과인 것 같다. 프루스트 자신이 아버지와 동생처럼 자신도 의사가 되고 싶다고 말한 것이 조금 이해된다. 문학을 통해서 정신을 해독하고, 삶의 풍부함을 일깨워주는 의사! 과다복용하면 안되겠지만, 프루스트 말처럼 프루스트를 신탁의 전달자로 여기지만 않는다면 충분히 반복해서 읽어보면 좋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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