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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 읽기

예술 - 문자에 갇힌 이미지의 해방

by 홍차영차 2021. 10. 13.

예술 - 문자에 갇힌 이미지의 해방

 

나는 숨겨진 것이 그것들 속에 있다고 생각되어 꼼짝 않고 바라보며 숨을 들이마시고, 이미지나 향기 저편으로 내 상념과 함께 가려고 애썼다. … 나는 지붕 선, 돌의 미묘한 빛깔을 정확히 기억해 내려고 애썼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것들이 내게는 속이 꽉 차 보이고, 마치 어떤 덮개에 불과한 양 지금 막 방긋 열리면서, 감추었던 것을 내게 건네주려는 것 같았다. … 그러한 인상들은 항상 지적인 가치가 없고 추상적인 진리와도 관계 없는 어떤 특정 대상에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 인상들은 내게 알 수 없는 기쁨을 일종의 풍요로운 환상을 줌으로써, 내가 위대한 문학작품을 쓰기 위해 철학적인 주제를 탐색할 때마다 느끼는 권태나 무력감으로부터 날 위로해주었다. 그러나 이 형태와 향기 또는 색깔에 대한 인상이 내 의식에 부과하는 의무는, 즉 그 인상들 뒤에 숨은 것을 지각하려는 임무는 너무도 힘들어서, 나는 곧 그런 노력을 피하게 해 주고 또 피로에서 구해 줄 구실을 찾아내려고 애쓰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부모님께서 부르셨다. 308
… 나는 나 자신과 종탑을 생각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 곧 종탑 선과 빛나는 표면이 마치 일종의 껄질처럼 찢어지면서 그 안에 감추어졌던 것 중 일부가 나타났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존재하지 않았던 어떤 상념이 머릿속에서 단어 형태로 떠올랐다. 그러자 조금 전에 종탑을 보면서 느꼈던 기쁨이 얼마나 커졌던지, 나는 일종의 도취감에서 사로잡혀 더 이상 다른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 310
… 마르탱빌 종탑 뒤에 숨어 있는 것이 하나의 아름다운 문장과도 유사한지 어떤지도 물어보지 않은 채, 나는 의사에게 연필과 종이를 빌려 마차가 흔들리는데도 이런 짧은 글을 썼다. 311
… 나는 이 글을 결코 다시 떠올려 보지 않았지만 의사의 마차꾼이 마르탱빌 시장에서 사 온 닭을 항상 바구니에 넣어 보관하던 의자 구석에서 이 글을 다 썼을 때 나는 너무도 행복해서, 이 글이 나를 종탑과 종탑 이면에 숨겨진 것들로부터 완전히 해방해 준 것 같아, 마치 나 자신이 암탉이 되어 이제 막 알을 낳기라도 한 것처럼 목청껏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권, 313쪽)

 

인간 신체가 외부 물체에 의해 변용되는 모든 방식에 대한 관념은 인간 신체의 본성과 동시에 외부 물체의 본성도 함축해야 한다. (<에티카> 2부 정리 16)

 

모네, 루앙 대성당 연작

 

문자의 딜레마는 의식을 갖게 된 순간부터 갖게 된, 속마음을 가진 인간의 딜레마와 흡사하다. 마르셀이 마르탱빌의 종탑을 종탑이라고 부르는 순간, 마르셀이 종탑 자체로부터 받았던 감각의 풍부함, 그것만의 인상은 사라진다. 문자는 명료함을 주지만 반대로 문자 안에 넣을 수 없는 잉여들은 깍여나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문자를 쓰지 않으면서 종탑에서 대해서, 종탑 그 자체가 풍겨내는 인상을 표현하는 것도 쉽지 않다. 프루스트가 일평생을 통해서 시도했던 것이 바로 이것 같다. 문자에 갇히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그것 자체로 느낄 수 있도록 표현하기! 프루스트는 진부한 표현을 싫어했다. 진부한 표현이란 자신이 그것에 대해 받은 느낌이 아니라 구체성과 생기를 모두 잃어버린 죽은 시체에 가깝기 때문이다. 진부한 표현을 읽는 사람은 그것에서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

 

때때로 프루스트의 묘사는 너무나도 길어서 지치기도 하고, 공감각적인 표현을 이해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그것은 프루스트가 콩브레 마을의 세 종탑으로부터 받은 인상을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모두가 프루스트처럼 쓸 수 없고, 그렇게 쓸 필요도 없다. 반대로 각자가 그것 자체로부터 받은 인상을 구체적으로,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게 중요하다.

여기서도 관찰이 중요하다. 대상을 관찰하는 것만큼 자신을 관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으로부터 만들어지는 신체의 변화(감정)를 살펴보고, 종탑과 내 신체가 함께 만들어내는 다양한 변화들을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스완네 집 쪽으로' 2권의 귀족들 모임에서 난데없이 소설가가 나와서 '무엇을 하느냐'란 질문에 '관찰'하고 있다는 것은 프루스트 자신의 답변인것 같다.

 

"어떻게 당신이? 여기서 도대체 뭘 하려고?" 소설가는 그의 심리 탐구와 냉혹한 분석의 유일한 기관인 외알 안견을 방금 눈언저리에 끼우고는 중요하고다 신비로운 표정으로 r 발음을 굴리며 대답했다.
"저는 관찰하고 있습니다.(J'observe.)"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스완네집 쪽으로 2권 240쪽)

 

음악, 그림, 조각, 춤과 같은 예술들은 기본적으로 문자가 아닌 방식으로 표현한다. 일면적일수도 있겠지만, 예술가들은 자신이 느끼는 것은 문자에 갇히지 않으면서, 아니 문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다양한 방식을 통해서 표현한다. 실제로 음악, 그림, 조각, 춤과 같은 예술들은 그것 자체로 아주 신체적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문학은 예술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역할을 맡고 있는지 모르겠다. 문학은 언제나 문학의 한계, 문자의 한계를 체감하면서도 그것을 극복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프루스트가 기차표에 나온 시간과 역이름, 부고를 전하는 신문의 한 귀퉁이의 이름들에 그렇게 천착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프루스트에게 역이름, 신문에 나온 이름들은 단순한 문자 하나가 아니라 그 문자에 갇혀있던 모든 풍경들과 인상들을 함축하고 있는 상상의 씨앗이 되기 때문이다.

프루스트는 지루하지 않다. 프루스트가 전해주는 그 풍부함을 느껴보자. 프루스트를 문자적으로만 이해하려고 해선 안된다. 프루스트는 문자를 통해 말하지만 문자로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싶어하고, 자신이 발견한 문자 너머의 풍부한 세계를 보여주려고 평생을 바쳐왔다. 다행인 것은 그가 남긴 책을 통해서 언제라도 내가 살고 있는 세계의 풍성함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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