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프루스트 읽기

말러 교향곡과 '천 개의 고원'

by 홍차영차 2021. 3. 18.

말러 교향곡과 '천 개의 고원'

 

 

 

슈만 음악감상 세미나에서 슈만과 니체의 '평행이론'에 대해서 살짝 이야기했었는데, 말러 교향곡을 들으면서는 현대철학자 들뢰즈가 떠올랐습니다. 특히나 들뢰즈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천 개의 고원>이 말러의 교향곡과 형식과 내용면에서 아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 교향곡을 들을 때 말러 교향곡부터 시작하는게 더 흥미로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말러 교향곡은 거대하고(100명의 오케스트라) 길고(1시간은 기본), 말러 이전의 음악작품들 조각조각이 여기저기 들어가 있어서 이를 잘 이해하려면 엄청난 내공이 필요하다라는 생각들! 휴......듣기 전부터 뭔가 포기각이죠. 뭐, 그렇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말러는 시대적 징후를 자신의 음악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이전과 전혀 다른 음악적 구조와 내용들을 창작했다고 생각합니다. 즉, 말러는 이전의 절대음악으로 표현되어 왔던 근대의 모습이 붕괴하는 것을 몸소 느꼈고,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상관없이 '시대적 징후'를 아주 실제적으로 표현하려했던 작곡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이전의 형식과 구조를 생각하면서 들을 필요가 없다는 말! 앤데님이 말러곡은 베토벤처럼 그렇게 구조적으로 분석할 것이 없다는 말도 이것과 연결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말러 교향곡은 그렇게 쓴 것이 아니니까요.

 

뭔소리냐 하면, 클래식은 그저 음악이 아니라 절대왕정과 이후의 국가를 중심으로 하는 시대를 아주 잘 대변하는 매우 근대적인 음악구조와 형식을 갖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우리가 조성(다장조, 사장조...)이라고 부르는 것이 구성된 시기는 "짐이 곧 국가다"라는 말을 남겼던 루이 14세(17세기)의 궁정악장 라모를 통해서였습니다. 르네상스 이후에 만들어진 조성은 기본적으로 위계적이라는 말이죠. 단어만 살펴봐도 조성음악의 핵심용어였던 tonic(으뜸음)은 ‘군주’라는 뜻이고, dominant(딸림음)는 ‘왕국’이라는 뜻입니다. 다장조에서 중심은은 '도'가 될 수밖에 없고,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솔(5도)'이겠죠. 여기서 조금 벗어나서 음악이 연주되더라고 결국은 다시 '도'로 돌아와야 합니다. 왕을 중심으로, 왕이 왕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한에서만 모든 것이 허용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베토벤으로 대변되는 근대국가는 여기서 조금 더 변형을 가할 뿐입니다. 여기서는 '이것이 소나타 형식이야라고 고정해서 말하지는 않고, 이것도 소나타 형식이 될 수 있어'라고 말합니다. 아름답게만 들리고 순수하다고 여겨지는 조성 음악은 오로지 조성을 깨지 않는 상태에서만 불협화음을 허용했고, 소나타 형식은 그 구조(A-B-A’)를 무너뜨리지 않는 한에서만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하나의 음이, 교향곡의 부분이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허용되는 음악적 구조와 형식 내에 있어야 한다는 것! 근대에서 개인의 자유가 허용되지만, 오로지 법적 테두리, 국가가 허용하는 한에서 허용되는 것과 아주 비슷하죠.

 

음악적으로 절대음악(구조), 화성법칙이 근대를 대표한다면, 철학적으로 근대(시대)를 대표하는 것은 주체, 인식(이성), 진리입니다. 근대적 인간이란 하나의 영혼을 가진 주체이고, 이성적으로 인식하는 존재이며, 진리를 중심으로 사고하는 존재이다. 이제는 이런 단어들만 들어도 뭔가 답답합니다. 주체, 이성, 진리라는 말이 이제 뭔가 좀 '꼰대'스러운 개념처럼 들리기까지 합니다. 철학의 '철'자를 모른다고 하더라도, 이제 사람들은 '왜 이성적이어야 하지, 감정을 따르는게 맞지 않나', '진리가 정말 있기는 있는가', '작년의 나(주체)와 오늘의 나(주체)가 다른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라고 생각하거든요. 홍상수 영화가 떠오르네요.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이게 바로 시대적 징후로 나타나고 있는 모습입니다. 알지 못해도 의식/무의식적으로 모두가 느끼고 있죠.

 

 

말러의 교향곡은 딱 이런 상황에서 탄생했다고 생각합니다. 말러(1860~1911)가 1860년 생이고, 그의 교향곡이 1890~1910년에 주로 만들어졌다면 이 때는 근대너머, 탈근대적 경향들이 이미 살짝살짝 나오는 시기이기도 하니까요.(니체의 반이성, 프로이트의 무의식!) 의식의 흐름 기법이라는 방식으로 마르셀 프루스트(1871~1922)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쓴 것이 1910년에서 20년 사이였으니 아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시겠지만, 이 책에는 기승전결이 없죠. 그저 자신의 (무)의식을 따라서 서술할 뿐입니다.

말러의 교향곡은 바그너의 라이트 모티브(각각의 캐릭터=각각의 음악, 그래서 음악을 들으면 그 캐릭터, 그 상황을 알 수 있게 함)를 기본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좀 더 정서적으로 자유롭게, 의식의 흐름에 따라서 자신이 말하고 싶은 걸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외로 베토벤, 하이든, 브람스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무시당했다고 생각합니다. 말러의 교향곡은 있는 그대로의 음악으로 받아들일 때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니 직관적으로 더 잘 감각할 수 있습니다.

 

프루스트도 이야기했고, 니체도 이야기했지만 그 무엇보다 말러의 교향곡은 들뢰즈/가타리의 <천 개의 고원>이라는 책과 정서적으로 아주 비슷하다고 생각됩니다. 들/가(두 사람이라서 이렇게 부르겠습니다)는 자신들의 책을 순환방식으로, 처음도 없고, 끝도 없는 방식으로 썼습니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철학책이라고 하면 떠올릴만한 형식을 취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새로운 형식을 제안하기보다 어떤 것도 형식이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심리학적 고찰도 있고, 소설 형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기도 하며, 음악의 형식으로 말하기도 하고, 다른 역사학을 펼치기도 하고, 전혀 새로운 철학적 개념을 발명해서 말하기도 합니다. 아래는 <천 개의 고원> 목차인데, 그 제목만 보더라도 이런 특징을 알 수 있습니다.

 

<천 개의 고원>,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1. 서론 : 리좀 
2. 1914년 - 늑대는 한마리인가 여러 마리인가? 
3. 기원전 1만년 - 도덕의 지질학(지구는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4. 1923년 11월 20일 - 언어학의 기본 전제들 
5. 기원전 587년 및 서기 70년 - 몇가지 기호 체제에 대하여 
6. 1947년 11월 28일 - 기관없는 몸체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7. 0년 - 얼굴성 
8. 1874년 - 세개의 단편소설 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9. 1933년 - 미시정치와 절편성 
10. 1730년 - 강렬하게 되기.동물 되기.지각 불가능하게 되기 
11. 1837년 - 리토르넬로에 대해 
12. 1227년 - 유목론 또는 전쟁기계 
13. 기원전 7000년 - 포획장치 
14. 1440년 - 매끈한 것과 홈이 패인 것 
15. 결론 : 구체적인 규칙들과 추상적인 기계들 

 

들/가는 아무런 구조와 근거 없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21세기의 새로운 윤리학으로 <천 개의 고원>을 썼습니다. 그러니까 방금 앞서 말한 근대의 대표적 특징인 주체, 인식(이성), 진리가 아닌 방식으로의 삶이 가능함을 보여주려고 이전과 전혀 다른 구조와 내용을 가지고 철학책(21세기 에티카)을 쓸 수밖에 없었죠.

말러 역시 그랬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시대는 절대음악의 형식으로 표현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형식과 내용을 발명해내야 하지 않냐고. 슈만이 자신에게 소나타를 쓸 줄 모른다고 혹평했던 사람에게 해주었던 말이 생각나네요. "내용에 형식을 맞춰야지, 형식에 내용을 맞출수는 없는 것 아닌가"라는 말! 사실 슈만은 아주 예외적으로 앞서 탈근대적인 음악을 표현했던 것 같습니다.

 

아, 그럼 말러 음악을 듣고 나면 더 이상 들을 음악이 없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결코 그렇지 않죠. <천 개의 고원>으로 철학 공부를 시작한다면, 이전의 철학자들이 전혀 다르게 보일테니까요. 말러를 듣고 나면, 브람스의 교향곡, 베토벤의 소나타, 모짜르트의 작품들이 아주 다른 모습으로 들리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말러 교향곡 1번 하나 듣고 너무 멀리까지 상상의 나래를 펼친 것 같네요. 그래도 관련해서 언제 한번 정리해보고 싶었는데, 말러 음악세미나를 듣고 좋은 기운을 받아서 써봅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