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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괴물의 뱃속에서 살아가는 가족

by 홍차영차 2020. 12. 29.

괴물의 뱃속에서 살아가는 가족

: <<해러웨이 선언문>> 중에서 <반려종 선언>








"나선의 춤에 갇혀 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지만, 나는 여신보다는 사이보그가 되겠다.” 도나 해러웨이가 쓴 <사이보그 선언>의 마지막 문구는 바로 니체의 말을 떠오르게 한다. "나는 철학자 디오니소스의 제자이다. 나는 성인이 되느니 차라리 사티로스이고 싶다.”(<이 사람을 보라> 에서)

해러웨이는 니체가 말했던 것처럼 하나의 통일적일 주체성은 환상이며, “영원히 부분적인 정체성”으로 구성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살아가자고 말하는 것 같다. ”주체가 된다는 것은 자율성을 확보하고 막강해지며 신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주체됨은 환상이며, 그 때문에 타자와 함께 종말의 변증법에” 들어서게 되기 때문이다. 해러웨이가 관점에서 현대는 사이보그, 사티로스 - 바야흐로 잡종의 시대였다.


“사이보그가 되자!”라는 선언문을 들었다고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줌으로 세미나를 하는 내가 노트북과 사이보그를 이루고,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스마트폰으로 노래와 길안내를 받는 내가 사이보그가 되었음을 알았다고 해결되는 것은 없다. 도리어 새로운 문제가, 아주 근본적인 문제가 도드라질 뿐이다. 이제 종으로서의 인간이라든가 여성/남성, 백인/흑인/황인종, 인간/동물, 생물/무생물, 유기체/무기체라는 일종의 규칙은 사라지고 서로가 서로를 믿고 신뢰하며서 살아갈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을 실질적으로 체감하게 할 뿐이다. 1985년 <사이보그 선언>을 한 해러웨이는 이제 사회주의 페미니스트 노선에서 이탈한 것이 아니라 본격적으로 페미니즘이 작동하는 사회에서 어떻게 “함께 잘 지내는 것”이 가능한지를 고민하고 있는것 같다. 2003년의 <반려종 선언>을 우리는 그 연결선상에서 바라봐야 한다.


“내가 임신은 하게 되면, 내 자궁 속에 있는 생명이 다른 종의 생명체였으면”한다는 해러웨이의 이야기는 ‘왜 반려종 선언’일까라는 의문에 답을 해주는 것 같다. 해러웨이가 논의하는 개는 다양다종한 동물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일상에서 실제적인 (다종) 가족 구성원으로 존재하는 현실이다. <사이보그 선언>에서 나를 당황케 했던 질문이 이제는 더 이상 당황스러운 일이 아니며 인간 - 기계 - 동물의 융합과 공-생은 미래의 일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다. 


카옌의 침과 바이러스 벡터가 해러웨이를 바꾼다는 린 마굴리스의 공생발생symbiogenesis이야기보다 더 새롭게  읽힌 것은 마르코와 카옌의 관계였다. “마르코, 카옌은 사이보그 트럭이 아니야, 복종이라는 이름의 무술을 같이하는 대련자란다. 너는 지금 나이가 더 많은 대련자고 사부야, 몸짓과 눈으로 존경을 표현하는 방법을 배웠잖니? 네가 할 일은 카옌에게 그 형식을 가르쳐주는 것야”(169) 해러웨이가 말하는 것은 개를 인간처럼 말하면서 어린아이로 대하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개를 ‘개 그 자체’로 인정하고 함께 잘 사는 법을 배우고 애써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물려받은 역사라는 괴물의 뱃속에서 자라났”다면, “그 안에서 살아야 모습을 바꿀 수 있다.”라고 말한다. 


소수자 혹은 특이적 존재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더 확장된다는 것은 그/그녀/그것을 인간적 사고나 삶의 방식 속에 꾸겨넣는 것이 아니다. 그/그녀/그것의 특성과 환경적 강제를 살피면서 “영원한 가족”이 될 수 있는 방식을, 끊임없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시도들을 지속하는 것이다. 그럴 때에야 “순종인 카옌과 잡종인 롤런드, 그리고 내가 우리 서로를 만질 때, 우리는 우리를 있게 해준 개들 및 사람들과 연결된 관계를 우리의 육신 속에 체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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