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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비인칭의 문학

by 홍차영차 2020. 9. 3.

비인칭에서 비인칭으로

: 모리스 블랑쇼, <카프카에서 카프카로> 1장







문학은 세계가 존재하기 이전의 사물들의 현전이요, 세계가 사라지고 난 이후의 사물들의 투지이며, 모두가 지워지고도 남아 있는 것의 완강함이요, 아무것도 없을 때 나타나는 것으로부터 오는 얼떨떨함이다. 그래서 문학은 밝히고 결정하는 의식과 혼동될 수 없다. 문학은 나 없는 나의 의식이요, 광물의 빛나는 수동성이며, 멍멍함 그 밑바닥으로부터의 명철함이다. (<카프카에서 카프카로>, 50쪽)


‘날카로운 말을 쓰러뜨린 자’, ‘백색 태양을 죽인 자’, ‘말 없는 푸른 늑대’ - 인디언의 이름들은 하나같이 고정된 무언가를 말하기보다는 흘러가는 풍경 속의 한 장면 같다. 다시 말해, 명사가 아니라 동사 형태로 이름을 지으면서 어떤 존재도 홀로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한 순간도 그대로 멈춰 있는 존재는 없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흰 팔의 헤라, 황소 눈의 헤라와 같은 고대 그리스의 신들의 이름도 그러하고, 상고 시대 그리스 사람들의 이름 역시 명사라고 할 수 없다. 아킬레우스라는 이름은 단순한 호메로스 시대의 영웅이 아니라 뮈르미도네스족의 오랜 시간과 공간을 함축하고 있다. 아킬레우스라는 호메로스의 영웅은 한 사람의 역량이기보다는 상호 끊어지지 않는 관계 속에 형성된 이름이라고 봐야 한다.






문자의 발명 혹은 인칭의 획득

하나의 단어로 이름을 지칭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많은 것이 바뀌었다. 다양한 사물들을 각각의 단어들에 가둘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혁명이 일어났다. 문자 혹은 언어의 발명이다. 내가 단어를 쓰고, 말하고, 머릿 속에 기억(소유)할 수 있게 되면서 하나의 사물을 다른 어떤 관계로부터 떨어뜨려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사람 역시 마찬가지다. 문자 이전의 시대에 나와 너, 너와 우리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그 사물을 내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었고, 그 생각을 나만의 생각이라고 말할 수 없었기에 나와 나는 순간 순간 변화하고 교차하는 과정 속의 하나일 수 있었다. 언제나 나는 너, 너는 우리와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했다. 하지만 문자가 발명되고, 그것을 어딘가에 적을 수 있게 되면서 문자와 나, 문자와 사물을 동일시하게 된다. 즉, 상호 연관 없이 사물과 인간을 다룰 수 있는 방법이 생겼다. “인간은 문명인이 될수록, 말을 더욱더 단순하게 냉정하게” 다룰 수 있게 되었고, “말이 그것이 지시하는 것과의 모든 관계를 잃어버렸다.”(42쪽) 문자의 발명은 곧 나와 너를, 너와 우리를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한 마디로, 인칭의 획득이다.



인칭의 모순

말의 모순은 곧바로 인칭에도 작동한다. “말은 나에게 존재를 주지만, 존재를 박탈당한 존재를” 줄 수밖에 없고, 말이란 “존재의 부재이고, 존재의 무이며, 존재를 상실했을 때 존재에서 남는 것”(42쪽)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언어를 쓰면서 내가 친구 ‘씀바귀’를 말할 수 있는 방식은 씀바귀를 하나의 관념으로 만들어, 실재하는 씀바귀를 사라지게 할 때이다. 이러한 호칭에 어떠한 모호함도 허락되지 않는다.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를 인식하는 방식에서도 그렇다. 내가 나를 인식할 때, 나를 나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 나는 하나의 관념으로만 남는다. 내가 말하는 나는 그저 ‘나에 관한 것’이지 내가 아니다. 내가 나를 지칭하기 위해서 ‘나’라는 말을 써야 하지만, 역설적으로 ‘나’라는 말을 통해서 나는 결코 ‘나’에게 도달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문자 이후의 세계에서 내가 나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물푸레나무라는 그 나무 자체를 경험하는 것은 불가능인가? 블랑쇼가 불가능의 가능성, 불가능으로서 밤의 가능성을 말한 이유이다. “문학은 원한다. 존재하는 그대로의 고양이를, 사물의 방침 속에서의 조약돌을, 인간이 아니라 이 사람을.”(49쪽)



문학 속에서의 비인칭


문학이란 의식을 잃을 정도의 무력함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는 그러한 경험이다. 이를테며 의식이 자아의 어김없음을 벗어나, 사라지면서, 무의식 너머로, 무지 가운데 언제나 자신의 뒤편에서 시선으로 바뀐 자신의 그림자인 양 발견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누구도 알지 못하는 얼떨결의 앎의 집요함이라는 어떤 비인칭의 자발성 가운데, 다시 구성되는 그 움직임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경험이다. (55쪽)


“문학은 진정 단어들의 의미를 이겨”(54쪽)내야만 했다. 카프카가 자신의 소설에서 시도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K는 자신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바라보는 타자이며, 스스로가 바라보는 낯설은 자신이다. 그래서 K는 자신의 마음을 알기도 하지만 전혀 알지 못하고, 이렇게 행동하는 자신에게 놀란다. <변신>,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 <요제피네, 여가수 또는 서씨족>에서 카프카는 아무런 어려움 없이 벌레, 인간-되기를 실천하는 원숭이, 노래하는 쥐가 된다. 또한 <선고>, <소송>에서는 마치 다른 사람이 죽는 것처럼 감정의 요동없이 죽음으로 돌진한다.

문학에서의 비인칭이란 결국 문자 이전, 주체성 이전의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리라. 문자 이전에 ‘나’라는 고립된 주체는 없었다. 집단 속에서 관계 망 속에서 존재하는 나만 있었을 뿐이다. 여기서 죽음은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나는 죽을 것을 알고 있지만 죽음을 회피하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항상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해왔고, 죽을 수 있는 필멸의 존재(mortal)라는 것은 내가 내가 되는 필요충분 조건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리스 신들이 인간에게 유일하게 부러워했다는 것이 바로 인간의 필멸성인 이유이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조건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고귀함과 위대성을 표현할 수 있었다.

문자 이후에 인간은 딜레마에 빠진다. 문자 속에서 갇혀서 영원히 살아야 하는 불명예를 태생적으로 갖게 되었다. 단어들의 의미를 이겨내면서 제대로 죽을 필요가 있다. 독립된 ‘나’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고, 그것을 적합하게 표현해야 한다. “나 없는 나의 의식”, “광물의 빛나는 수동성”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발명해내야 한다. 바로 그 순간에 ‘세계가 존재하기 이전의 사물들의 투지’를 몸소 겪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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