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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바타유의 <불가능> 읽기

by 홍차영차 2020. 8. 2.

불가능해 대해 말한다는 것

: <불가능> 1부






현실주의는 내게 오류의 느낌을 준다. 오직 폭력만이 그런 현실주의적 체험의 빈곤감을 떨쳐버린다. 숨통을 막고, 끊는 힘은 오로지 욕망과 죽음에만 있다. 죽음과 욕망의 과잉만이 진실에 가닿도록 한다. (14쪽)

인간 앞에 펼쳐진 두 가지 전망이 있다. 한쪽은 격렬한 쾌감, 공포, 죽음 - 정확히 시의 전망 - 그 정반대 쪽은 과학 혹은 유용성의 현실 세계, 유용한 것, 현실적인 것만이 신뢰할 만한 것으로 취급된다. (15쪽)


클리셰(cliché)없는 이야기(영화, 소설)를 대하는 태도는 극명하다. “와, 뭔가 신선하고 멋지다.” 혹은 “이게 뭐야? (내게 익숙한 것이 없어) 이해할 수가 없잖아.” 아래 영어 문장을 보자. 아무리 영어를 잘하는 사람도 살짝 쳐다봐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아니 그저 소리내어 읽는것조차도 쉽지 않다. 하지만 이 문장에 우리의 약속들(단어/문장 사이의 빈공간, 쉼표, 마침표 등등)을 적용하면 아무런 폭력(?)없이 쉽게 읽을 수 있는 평범한 문장이 된다. 우리가 이렇게 이 글을 읽을 수 있는 것조차 오랫동안 (폭력으로) 구축된 이전의 약속들이 익숙하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ICANNOTPLAYWITHYOUTHEFOXSAIDIAMNOTTAMEDAHPLEASEEXCUSEMESAIDTHELITTLEPRINCESS


그렇다면 ‘이해한다’라는 것은 뭘까? 그것에 대한 ‘정보’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나 그것에 대한 합리성이나 유용성을 발견하는 것인가. 하지만 어떤 시도는 그것에 대해서 무엇 하나도 말하지 않고 있음에도 더 많이 이해하게 되었다고 느낄 때가 많다. 이해한다라는 것은 단순한 정보를 알게 되는 것과는 다른 무엇인것 같다. 이해한다는 것은 아마도 하나의 체험/표현이 되어야 하는 것 같다.


실은 ‘불가능’에 대해 말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이다.(라는 것을 바타유 역시 알고 있다.) “불가능이란 OO이다”라고 정의하는 것으로 불가능을 표현/체험할 수 없다. 불가능에 대해 바타유가 말할 수 있는 방식은 밖에 없었을 것! 시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는 끊임없는 시도’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분명 그것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고 않고 그 주변 숲만을 뒤지는 것 같아 답답할 때가 있지만 바로 그런 형식 자체가 ‘그것’을 가장 잘 말해주는 것 같다. 기존에 갖고 있던 합리성과 유용성 너머에 있는 것을 찾으려는 시도!

시에 대한 증오를 말하려다가 이제는 ‘불가능’이라는 제목으로 말하고 싶다는 바타유는 언제나 “현실주의적 체험의 빈곤”을 떨쳐버리기 원했던 것 같다. 술에 빠져서, 매음굴에서 전전하면서. 그가 알고 있는 유일한 방식은 욕망과 죽음! 주체를 떠나서, 합리성을 떠나는 경험은 그리 쉽지 않아 보인다.




두 가지 사례를 더 이야기해보고 싶다.

하나, 얼마전에 <논어>를 가르쳐주시는 선생님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 <논어>만큼 부모와 자식 사이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고민하는 텍스트는 없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이 두 사이에 관계에 대해 이만큼 현실적이고도 깊은 고민이 들어 있는 책은 없다. 이런 점이 바로 성리학의 특성이다. 한편으로 ‘그렇구나’라고 깊게 수긍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나 오랫동안 당연하다고 여겨졌기에 이런 구조 이외의 것에 대해서 시도하지 못하는 것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기준은 항상 현재 우리가 사는 모습을 놓고 생각한다. 게다가 대부분의 기준이라 상상 속의 신비한 동물과 비슷하다. 상상할 수는 있지만 아무도 본적은 없는.

가족, 특히 부모와 자녀라는 것이 성리학의 구조에서는 기본이고 어쩔 수 없는 사이라고 하지만, 묵가나 그리스의 스파르타에서는 내 부모, 내 자녀라는 것은 없지 않은가. 오로지 전체적인 공동체만이 있을 뿐이다. 누구나 내 부모가 되고 내 자녀가 되는 것이다. 실제로 동서양사에서 지금처럼 부모-자녀의 관계가 강력하게 묶여 있던 적은 거의 없었다.(고 봐야 한다.) 전혀 다른 가족이나 부모-자녀의 관계는 그저 새롭게 정의하는 것으로는 구성되지 않는다. 그렇게 살아야 하고 끊임없는 시도가 필요하다. 때론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충격과 공포, 엄청난 폭력이 될 수도 있겠지만.


두번째. 요즘 국악에 꽂혔다. 이전과 다르게 국악방속에서 나오는 거의 모든 노래들이 나를 새롭게 한다. 경기 민요, 판소리, 굿타령, 정가. 우연찮게 듣게 된 노래가 있다. <이날치밴드>의 ‘범이 내려온다’. 단순하면서도 반복된 ‘범이 내려온다’라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흥이 오른다. 이날치 밴드에서 연결되어 수많은 영상을 찾아보다 클럽에서 다 같이 민요 떼창을 부르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새로운 세계의 발견이다. 여기에 이어서 보게된 씽씽과 이희문의 음악들.

“우리 것이 좋아” “국악을 배워야 해”라는 당위의 말로는 아무것도 작동하지 않는다. “범이 내려온다”를 신나게 부르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몸소 표현하는 것이 필요하다. 바타유의 말대로라면 이런 폭력만이 현실의 빈곤감을 떨쳐버리게 한다.





현실주의적 빈곤감을 떨쳐버리는 것은 실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공포와 불안이란 알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상상일 뿐이다. 그것이 나에게 즐거움과 기쁨이 될지 시련이 될지는 알지못한다. 그저 시도해보는 수밖에 없다.


시는 미지의 것에 깃든 힘을 드러내준다. 그런데 미지의 것이란, 욕망의 대상이 아닐 경우, 별 볼일 없는 공허에 지나지 않는다. 시는 하나의 절충안이며, 미지의 것으로 기지의 것을 은닉한다. 시는 태양의 외관과 눈부신 색체로 치장된 미지의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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