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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푸코

눈물의 구조(救助)

by 홍차영차 2020. 7. 21.

눈물의 구조(救助)

: 미셸 푸코, <주체의 해석학>, 영성/아스케시스askesis/paraskeue





Paraskeue는 자기의 목표에 도달할 수 있게 해주고, 이 목표에 고정되어 그 무엇에 의해서도 동요되지 않는 상태로 있게 해줄 수 있는 그 무엇이다. 즉 영혼이 하는 전투와 그것의 목표, 그리고 승리를 위해 필요한 장비를 마련하는 행위이다. (푸코, <주체의 해석학>, 273쪽)


세미나를 하다가 이미지를 바꾸는 것이 쉽지 않다는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또한 이미지를 바꾸고 싶다면 머릿 속 생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의 새로운 경험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들. 그러면서 얼마전 이사를 하고 나서 경험하게 된 아주 ‘낯선’ 이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토마토 두 개, 밴댕이 굴젓 조금, 오렌지 주스, 맥주 한 캔과 강냉이, 초콜렛 몇 개, 그리고 깻잎, 상추, 당귀, 아욱, 치커리. 이사 하고 나서 2층에 사는 이웃집으로부터 받은 선물들이다. 먹는 것을 나누는 방식도 인상적이다. 문을 두드리고 대면해서 주는 때도 있지만 시간이나 상황을 고려해서 대부분 우리 집 베란다에 놓고 가신다. 두 달도 되지 않는 경험이지만 이런 선물의 경험을 통해서 ‘이웃’에 대한 이미지가 상당히 바뀌었다.

신기한 것은 이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내 눈에 눈물이 맺혔다는 사실이다. 슬프지도 않았고 아무런 맥락도 내가 의식하지 못한 상황에서 이런 신체적 변화가 일어났다. 이웃의 행위가 감동적이라고 느꼈기 때문일까? 이런 나의 생각을 더욱 더 잘 전달(설득)하고 싶었기 때문일까? 



최초이면서 가장 강력한 장비

갓 태어난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스스로 먹을 수도 이동할 수도 없고, 배변조차도 감당할 수 없다. 하지만 아이에게는 강력한 자기 구조(救助)의 장비(paraskeue)를 가지고 있다. “자기의 목표에 도달할 수 있게 해주고” 자기 신체에 각인되어 있어서 언제라도 펼쳐질 수 있는 장비로서의 울음을 토해내는 것. 닭똥같은 눈물을 함께 흘릴 수 있다면 엄마 아빠가 아니라도 아이를 위해 행동하게 만든다.

푸코는 자기와의 완결적인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서 자기 수련askesis이 필요하고, 자기 수련은 결과적으로 “필요할 때마다 도움을 청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잠재적이고 동시에 효과적인 항구적 현존”으로 드러나야 한다고 말한다. 스파르타 전사들이 정강이 받이와 투구 그리고 창과 방패를 구비하듯이 내가 ‘실존의 기술’로 구비해야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제 장비paraskeue 보편적인 것이 되었다. 전사만 필요할 것이 아니라 남녀노소 누구나 할 것 없이 행위 주체로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푸코는 이 장비의 구축을 격투기 혹은 운동선수가 갖추는 것으로 이야기한다. 태권도 선수가 경기를 하면서 내딪는 발차기는 의식하면서 차는 것이 아니다. 의식하는 발차기는 상대방에게 막힐 것이 뻔하다. 오랫동안 연습하면서 이미 신체에 장착되어 있기 때문에, 바로 그 순간에 발이 올라오고 상대방을 가격할 수 있다.

사람이 갖는 최초의 자기 구조의 장비는 자지러지게 울기와 눈물인 것 같다. 그리고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의식하지 못하면서 행하고 있는 많은 장비들을 구축하고 있는 것 같다.







Connecting minds and sharing emotions through mimicry: A neurocognitive model of emotional contagion



믿을만한 신체와 위험한 의식

자기 수련askesis으로 얻어지는 항구적 현존으로의 장비(paraskeue)는 의식적 행위로 실행되지 않는다.  장비(paraskeue)에 대한 푸코의 묘사를 보면 이런 장비는 전문가들 혹은 소수의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가능한 것은 아닐까 의심되기도 하고, 한탄이 나오기도 한다. 유대인들이 집안 곳곳에, 자신의 신체에까지 성경 구절을 배치하면서 자신을 구성하려는 정도의 노력을 내가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생각해보면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미 많은 실존의 기술로서 장비(paraskeue)를 갖추고 있는 것 같다.

전화를 받으면서 운전할 때, 한참 통화를 하다보면 집에 도착해서 주차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여기서 우리는 의식해서 운전하지 않았다. 아마도 우리 신체 그 자체가 운전했다고 표현할 수 있겠다. 동네 산책을 다닐 때도 그렇다. 친구와 대화를 나누다보면 어느새 목표한 카페에 도달해 있거나, 집 문 앞에 와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런 능력을 갖게 된 것은 어떤 의식을 갖고 있어서가 아니라 수십번 수백번에 걸쳐서 실천, 탐구로서의 자기 경험이 신체에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조금 더 극한으로 가 보면 술에 취해 인사불성의 상태에서도 우리는 집으로 돌아간다.)

무의식은 위험하지만, 의식은 안전하고 합리적이라고 생각이 널리 퍼져 있다. 하지만 푸코가 말하는 자기 실천과 장비의 구축은 자신의 의식을 무의식적 행위로의 이전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무의식적 행위이기 때문에, 반복적인 자기 실천이 필수적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는 신체에  조금 더 큰 신뢰를 주고, 언제라도 멈추지 않고 떠오르는 우리의 의식에 대해서는 조금 더 조심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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