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철학/푸코

개념의 철학이 아니라 역사의 기술

by 홍차영차 2020. 6. 24.

개념의 철학이 아니라 역사의 기술 

: <광기의 역사> 1, 2장





요즘엔 일주일에 두번 푸코를 만난다. 토요일에는 <성의역사> 1,2,3,4와 <주체의 해석학>을, 목요일에는 <광기의 역사>를 읽고 있다. <광기의 역사>가 쓰여진 것은 1961년이었고, <성의 역사>2,3,4권이 쓰여진 것이 1984년이었다는 기억해보면 거의 푸코의 처음과 끝을 읽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참고로, 푸코는 1984년 6월에 사망했다. -.-)

 

푸코는 스스로를 규정하는 말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철학자, 역사가, 사상가, 교사..... 그런데 푸코의 처음과 마지막을 함께 읽다보니 푸코는 언제나 '역사가', 그것도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고고학적 파편들에서 그리고 전혀 관련 없을 것 같은 유물들을 가로지르는 사선을 긋는 그런 '역사가'였던 것 같다.

 

'광기'에도 역사가 있을까? 1, 2장을 거치면서 푸코는 전혀 관련이 없을 것 같은 사건들에 있는 먼지를 털어내고, 그것에 새로운 조명을 비춘다. 주목하지 못했던, 아니 주목하지 않았던 사건들을 서로의 옆에 배치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하는 것 같다.

 

"하나의 새로운 대상이 르네상스 시대의 상상계 풍경에 등장하여, 오래지 않아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광인들의 배', 라인란트의 잔잔한 강들과 플랑드르 지방의 수로들을 따라 떠다니는 기이한 취선이다."(51쪽)

 

푸코는 르네상스 시대에 광인들을 수용하면서도 배제하는 방식으로 '광인들의 배'에 주목하면서, 오래전부터 함께 살지만 결코 함께 살지 않았던(내부의 외부이자 외부의 내부) 나병환자와 연결시킨다. 그러면서 잠시동안이지만 나병환자의 역할을 맡았다고 여겨지는 성병에 대해서도 슬쩍 언급하면서 지나간다. 광인들의 배와 구빈원 / 나병환자와 성병과 광인... 푸코 이전에는 결코 이어지지 않았을 것 같은 사건들과 단어들이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이어지고 배치된다. 물론, 푸코가 배치만 하고 아무말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오히려 여기서 더욱 힘을 발휘하는 것은 배치와 나열들인것 같다.

 


푸코는 철학적인 주석을 스스로 달아주기보다는, 그저 이러한 사건들을 자신의 방식으로 재배열하고, 강조점의 위치를 바꿔주면서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궁금증과 호기심이 생기게 만든다. 생각해보면, 푸코는 새로운 개념들을 창조하기보다는 역사를 기술하는 새로운 방식으로 자신의 사유를 드러내는 것 같다. 그래서 푸코 스스로가 말했던 것처럼 주목해야 할 것들은 지금의 인식 방법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그 사회의 성향이다.

중세에 광인들을 신성하면서 두려운 존재였고, 르네상스 시대를 거치면서 광인들이 가난한자, 부랑자, 경범죄자와 같은 부류로 분리되었다. 그리고 다들 아는 것처럼, 현재의 광인은 의학적으로 이성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의학질서 속에서 규정되고 사회밖으로 배제된다. 우리 눈에 혼잡하고 혼란스럽게 보이는 이러한 미분화되어 있는 성향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지속적으로 푸코는 그 사건이 발생했던 그 현장 속으로 들어가 아주 사소해보이는 것들에 주목하고, 철학과 역사라도 여겨지지 않는 것들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