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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푸코

주체와 진실

by 홍차영차 2020. 7. 1.

주체와 진실

: <주체의 해석학> 2월3일 강의 (5강)





‘진실을 대면하라’는 말은 항상 ‘자기 스스로를 인식하라’는 말과 동의어였고, 진실에 접근한다는 것은 신 혹은 우주적 전체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일이었다.


주체가 주어진 원래의 상태로서는 진실에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은 고대의 보편적 특성, 근본적 원리였습니다. 주체는 자기 자신으로 하여금 진실의 능력을 갖게 만드는 다수의 실천/변형/변모를 하지 않고서는 진실의 능력을 가질 수 없습니다. (<주체의 해석학>, 222쪽)


기원후 1, 2세기를 거치면서 (<주체의 해석학> 5강(2/3일 강의) 자기배려가 점차적으로 삶 전체를 가로지르는 “실존(삶)의 기술tekhne tou biou”이 되었고, 실존의 기술에 대한 질문은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나는 자아를 어떻게 변형시켜야 하는가?”의 문제가 되었다. 조금 뒤죽박죽인 것 같지만, 어찌되었건 주체와 진실은 실존의 기술과 연결되어서 구성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푸코가 첫 강의에서부터 말하는 주체, 진실, 권력, 영성에 대한 이야기 우리에게 낯설게 느껴진다. 우리는 푸코가 언급하는 ‘데카르트의 순간’을 지나온 지 너무나 오래 되었기에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자기 변형’을 해야 한다는 말을 이해하기 어렵다. 좀 많이 생뚱맞다. 지금 우리는 진실을 발견할 뿐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주어진 그대로의 주체가 진실에 접근 가능한 시기”에 살고 있는 중이다. 그렇다면 “순전히 인식에 속하는 진실”과 “주체 자신에게 작업을 요구하는 진실” 사이의 차이는 뭘까?

인용에 나온 것처럼 고대에 진실에의 접근은 항상 자기 변형을 요구했다. (그리고 이것은 ‘영성’이라고 불렀다.) 데카르트의 순간 이전에는 어느 누구도 주체의 변형 없이 진실에 접근할 수 없었다는 말이다. 다른 식으로 보자면, ‘그 순간’ 이전에 주체와 진실은 고정된 어떤 것이기보다 작용과 역작용의 순환성 속에서 구성되는 어떤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주체가 진실에 접근할 때 다양한 실천/변형/변모로서의 자기 기술이 필수적이다. 수도원의 고행에서 연상되는 연습/실천/훈련으로서의 askesis, 상황을 대비하고 승리를 위해 필요한 장비를 (신체에) 장착한다는 paraskeue는 두 가지 진실의 중요한 차이점으로 드러난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주체는 이전의 자기와 전혀 다른 자기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진실 또한 마찬가지다. 데카르트 순간의 전후로 ‘진실 개념’ 자체의 변형이 가해졌다. 데카르트적 인식은 진실 접근이 아니라 대상 영역에 대한 인식 개념으로 대체된다. 주체와의 상호 접근 속에서 구성되는 진실은 진실이 아니다. 과학적으로 증명되는 진실(진리)가 있고, 우리의 인식이란 이 외부의 대상과 일치하는 인식이 된다. 주체와 진실은 그 자체로는 힘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지만, 상호간에 어떤 작용도 일어나지 않는다.


‘단 한 번도 되어 본 적 없는 자기’라는 말이 우리에게 그저 레토릭으로 들리는 것 역시 우리가 “순전히 인식에 속하는 진실”의 영역에만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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