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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

스피노자 개념 발명2 - 적합한 관념

by 홍차영차 2019. 10. 7.

스피노자 개념 발명 2 - 적합한 관념

: <에티카> 2부






스피노자는 데카르트, 라이프니츠와 함께 17세기를 대표하는 합리주의 철학자로 꼽힌다. 합리론자로서 스피노자가 자신의 주요 저작인 <에티카>를 기하학적인 방식으로 논증했다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런데 그가 증명해가는 논증 방식이나 사례, 전제를 보면 그는 결코 평범한 인간이 삶 속에서 마주치는 경험들을 무시하지 않는다. 무시하기는 커녕 <에티카> 증명에 있어서 이러한 인간적 경험들은 각각의 논증에 중요한 전제들로 작동한다. 가령, 스피노자는 주변 어디를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 이성적 인간을 모델로 놓고 ‘윤리학’의 문제를 풀어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태생적으로 인간은 정념적 존재’라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면서 해결책을 찾는다. 스피노자는 이성적으로 완벽한 이상적 인간이 아니라 질투, 증오, 사랑, 미움과 같은 수많은 정념들에 흔들리는 인간을 자신의 철학의 토대로 놓는다. 어떤 면에서 보면 스피노자는 경험론자보다 더 경험주의적인 철학자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경험론적 합리론자라는 말은 스피노자를 이해하는 데 조금은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에티카> 1부를 신에 관하여로 시작했는데, 2부에서는 인간의 차원으로 내려온다. 2부 제목이 “정신의 본성과 기원에 관하여”임을 고려해본다면, 여기에서는 정신이나 심리와 같은 추상적인 개념들로 넘쳐날 것이 예상된다. 그런데, 2부의 정리의 면면들을 살펴보면, 이 정리들은 땅에서 솟아오르거나 하늘로부터 뚝 떨어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에티카>의 많은 부분들이 그렇다고 생각되는데, 2부의 정리들 역시 인간들에 대한 면밀한 관찰과 경험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2부 정리 13 이후에 나오는 소위 ‘자연학 소론’이라고 불리는 공리, 보조정리, 요청들을 보면 스피노자는 17세기 최신의 자연철학을 바탕으로 윤리학을 구성했으며, 우리의 정신 역시 자연의 질서와 법칙에서 벗어나지 않음을 보여주면서 정념적 인간이 나아갈 수 있는 윤리학의 길을 보여준다. 




‘무엇에 대한’ 관념(idea)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들은 언제나 ‘무엇에 대한’ 관념이다. 관념은 ‘무엇’ 자체가 아니라 ‘무엇에 대한’ 표상이다. 왜냐하면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의 대상은 우리의 신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체를 통하지 않고서는 다른 어떤 것의 관념도 갖지 못한다. 정신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자신의 신체에 대해서도, 외부 물체에 대해서 항상 잘려진, 혼란스러운 인식을 갖게 된다.(2부 정리 29 주석) 여기서 질문이 생긴다. 인간은 항상 신체라는 매개를 통해서 잘려진 관념을 갖게 되는데, 이렇게 혼란스러운 관념들로 이루어진 정신의 인간들은 어떻게 상호간에 공통되는 윤리학을 세울 수 있을까? 우선 관념 그 자체가 무엇인지에 대해 탐구해보자.


사랑이나 욕망 또는 마음의 정서(affectus animi)라는 이름 아래 지칭되는 모든 것과 같은 사유 양태들은, 동일한 개인 안에 사랑 받는 대상, 욕망되는 대상 등에 대한 관념이 존재할 경우에만 존재한다. 하지만 관념은 다른 어떤 사유 양태들이 주어지지 않는 경우에도 존재할 수 있다. (2부 공리 3)


관념이란 사유속성의 양태로서, 다른 사유 양태들(욕망, 사랑, 정서affectus)과 구별되는 사유의 첫번째 양태이다. 관념과 정서affectus의 차이점에 주목해보자. 관념이란 사물의 상태를 표상하는데 반해, 감정affectus은 ‘상태들의 변이’에 상응하는 ‘이행’을 포함한다. 감정 없는 관념은 가능할지 모르지만 그것에 대한 표상(관념) 없는 감정은 불가능하다. 감정에 대한 관념의 우위와 그 둘 사이의 본성적 차이가 동시에 존재한다.

좀더 실재적 측면에서, 관념이란 신체에 새겨진 이미지들이다. 이미지라고 해서 시각적이라고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미지들은 외부의 신체가 우리 신체에 남긴 흔적들traces인데, 여기에는 외부 물체의 본성과 신체의 본성이 모두 포함된다.(2부 정리 16) 따라서 우리의 관념들은 사물들의 한 상태를 표상하는 이미지들 혹은 변용들에 대한 관념이다. 만약 우리 신체에 베드로에 대한 흔적/이미지가 남아 있다면, 베드로가 죽었는지 살았는지에 관계 없이 우리는 내 신체에 남아 있는 이미지들 혹은 변용들을 통해서 베드로라는 외부 신체의 현존을 긍정하게 된다.(2부 정리 17)

이러한 관념들은 기억 혹은 습관의 질서에 따라 서로 연결된다. 만약 내가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날 집에서 막걸리를 마셨다면, 즉 외부의 두 물체(비와 막걸리)에 의해 변용되었다면, 나는 비가 올 때마다 막걸리를 떠올리게 된다.(2부 정리 18) 하지만, 이러한 기억의 질서는 필연적 관계라기보다는 외적이고 우발적 만남에 의한 질서일 뿐이다.(2부 정리 29) 다시 말해 외적인 신체와의 만남이 불안정할수록 - 왜냐하면 나는 비가 올 때 피자를 먹기도 하고, 커피를 마시기도 하며, 따뜻한 허브차를 마시기도 한다 - 상상은 더욱 부유하며 다의적이게 된다.(2부 정리 44). 우리의 변용들이 서로 다른 특성을 갖는 다양한 신체들을 혼합할 때, 우리는 날개 달린 말과 같은 순수한 허구들을 상상하게 된다.



참된 관념이 아니라 적합한 관념

어떤 대상에 대한 관념을 갖게 되었을 때, 우리는 항상 내가 갖게 된 관념이 참된 것인지 거짓된 것인지에 주의를 기울여왔다. 그런데, 우리 삶의 방식을 참된 관념을 중심으로 삼게 되면 여러가지 문제들이 발생하게 된다. 참된 관념이란 대상과의 일치하는 관념이고, 외부에 있는 대상을 정확하게 재현하는 것이었다. 이 정의로 보면 우리가 갖게 되는 모든 관념은 참되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은 모두 신체를 통과하여 형성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잘려진, 혼란스러운 관념만을 갖게 된다 본성적으로 참된 관념을 가질 수 없는 인간이 참된 관념을 기준으로 살려고 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다수들의major 이야기가 진리가 되고, 기득권의 기준이 참된 것으로 작동하는 것은 자명한 일이 아닐까.

다행스럽게도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참된 관념이 아닌 ‘적합한 관념’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발명해낸다. 스피노자는 적합한 관념을 “대상과의 관계 없이 고찰되는 한에서 참된 관념의 모든 특성 또는 내재적 특징을 지니고 있는 것”(2부 정의 4)으로 정의하면서, 자신의 논의에서 “관념과 그 대상의 합치”라는 참된 관념을 배제한다.(2부 정의 4 해명) 존재론적으로 인간이 참된 관념을 가질 수 없으니, 최선이 아니면 차악이라도 선택해야 한다는 심정이었을까?

지금까지의 상황을 보면 우리의 자연적 조건은 적합한 관념을 형성하기에 그리 유리한 것 같지 않다. 어떻게 우리는 실재들을 적합하게 인식할 수 있을까. 정신은 두 가지 방식으로 실재들을 인식한다. 첫째, 정신은 실재들과의 우발적 마주침에 따라 실재들을 이것 또는 저것을 바라보도록 외적으로 지각한다.(2부 정리 29 주석)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감각적 지각이다. 여기서 자연의 공통의 질서는 카오스적이다. 감각적 지각으로 인식된 신체변용의 관념들은 잘려있고 혼란스럽다.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결과인지 알 수 없기에 부적합한 관념일 수밖에 없다.

둘째, 언어 즉 기호들을 통해 형성되는 관념들이 있다. 우리는 어떤 단어들을 듣거나 읽음으로써 어떤 실재를 떠올리고 이 실재들에 대한 어떤 관념을 형성한다.(2부 정리 40 주석2) 가령 인간이란 단어를 들었다고 해 보자. 어떤 인간에게 인간은 남자이고, 다른 사람에게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고, 또 다른 사람에게 인간은 창조하는 개체이다. 우리에게 ‘기호’는 자신의 신체가 가장 자주 변용되었던 바에 따라 정신이 회상하거나 상상하는 이미지로 나타난다. 하지만 기호들(단어)로부터 촉발되는 관념의 연쇄 역시 적합한 관념이 아니다.(2부 정리 40 주석 1)

경험에 의한 감각적 지각(인식)도, 기호에 의한 지각도 적합하지 않다면 어떤 인식이 적합할까? 적합한 인식은 “내 신체를 변용시키는 다수의 실재를 정신이 동시에 바라봄으로써 실재들 사이의 합치와 차이 및 대립을 이해하는 내적으로 규정된 지각이다.”(2부 정리 29 주석) 이러한 지각만이 지성의 질서를 따르는 지각방식이다. 우발적으로 마주치게 되는 자연의 공통 질서가 아니라 지성의 질서를 따를 때 우리는 정신을 ‘결과의 인식이 원인의 인식에서 따라나오는 방식’으로 관념들을 적합하게 연결짓게 된다.

지성의 질서를 따르려면 어디서 시작해야 할까? 지성의 질서 역시 정신의 대상이 신체라는 것에서 출발한다.



부적합한 관념이 주는 힌트

인간이 갖는 관념은 참된 관념일 수 없는데, 신과 관련되는 한에서 참된 관념은 모두 적합한 인식이다.(2부 정리 32) 왜냐하면 평행이론에 따라(2부 정리 7) 신 안에서 연장 속성의 양태인 물체에 대해 동등하게 사유 양태가 존재한다. 그리고 사유 속성과 연장 속성은 상호 인과적 영향을 주지 않으며, 사유 양태는 관념들의 인과적 질서에 따라 구성되고, 연장 양태는 물체들의 인과적 질서에 따라 구성된다. 이 부분에서 들뢰즈의 도움을 받아보자.


“적합한 관념들은 신 안에 있는 방식과 마찬가지로 우리 안에 있는 참된 관념들이다. 그것들은 사물들의 상태와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을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우리와 있는 그대로의 사물들을 표상한다.” (들뢰즈, <스피노자의 철학> 119쪽)


들뢰즈는 “적합한 관념들은 신 안에 있는 방식과 마찬가지로 우리 안에 있는 참된 관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서 적합한 관념들은 “있는 그대로의 우리와 있는 그대로의 사물들을 표상”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들뢰즈의 해석에 의지해서 보면, 스피노자가 말하는 적합한 관념이란 우리의 본질이나 인식/이해 능력을 넘어서는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 신체가 표상하는 그것에서 원인과 결과를 연결시켜 바라보는 것이다.(3부 정의 1) 부적합한 관념이 전제 없는 결론이라면 적합한 관념은 원인을 함축하는 결론, 인과적 필연성으로 원인과 결과가 연결된 결론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2부 정리 28 증명)

부적합한 관념에서 어떻게 원인과 결과에 대한 지성의 질서를 발견할 수 있을까? 부적합한 관념이 외부 물체와 신체의 본질을 표현하지는 못하지만, 외부 물체의 현존과 그것이 우리에게 미친 결과를 지시하기 때문이다. (2부 정리 16) 관념은 표상적이지만, 그 표상성은 분명 관념의 내적인 성격들로부터 나온다.(2부 정의4) 우리는 유리로 만들어진 컵 자체의 참된 관념을 가질 수는 없다. 하지만, 유리컵을 가지고 다양한 마주침 속에서 여러 번의 경험을 하면서, 다양한 경우에 형성된 컵의 관념들 속에서 지성의 질서를 파악할 수 있다. 이때 우리는 나와 컵이 함께 형성한 적합한 관념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사물들을 인식하는 자연 조건들로 인하여 우리가 부적합한 관념만을 가질 수밖에 없다면, 어떻게 우리는 적합한 관념들을 형성할 수 있을까? 최초의 적합한 관념인 공통 관념들의 생산에 의해서 드러나게 될 것이다. 


신체 합성으로서의 공통 관념

우리 신체는 물체이기 때문에 다른 물체들과 어떤 점에서 합치한다. 가장 넓게 모든 물체는 연장 속성을 함축한다는 점에서. 또 물체들은 때때로 운동하고 때때로 정지한다는 점에서 합치한다. (2부 정리 13 보조정리 2 증명, 2부 정리 38) 그 합치로 인하여 물체에는 합성과 해체의 변용이 일어난다. 밥은 인간신체와 합성하여 피가 되고 살이 되며, 산소는 철과 결합하여 철을 녹슬게 한다. 독극물이 혈액 속으로 흘러 들어가 우리의 심장을 멈추게 하는 것조차 공통적인 것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변용은 무엇을 만나느냐에 따라 다르고, 같은 물체들의 만남도 조건에 따라 다르다. 가령 공기 중의 산소는 호흡을 통해 신체를 재생시키지만 활성산소는 신체를 노화시킨다.

신체 변용이 일어남과 동시에 정신에는 신체 변용에 대한 관념이 생겨나고, 합성에 대한 관념, 즉 공통적인 것에 대한 관념이 구성된다. 이것은 고유한 공통 관념이다.(2부 정리 39) 예를 들어 내가 물 속에서 죽지 않고 수영할 수 있다는 것은 물과 나 사이에는 고유하게 형성된 공통 관념 때문이다. 이렇게 생겨난 공통개념은 적합한 관념이므로 필연적으로 우리 안에 적합하게 존재한다. 최초의 적합한 관념은 공통 관념에서 형성된다.

공통개념은 논리적으로 모든 것에 공통적인 ‘보편적 공통 개념’으로부터 독특한 실재들 사이의 ‘고유한(덜 보편적인) 공통 개념’으로 나아가지만(2부 정리 38), 실제 삶 속에서 우리는 덜 보편적인 공통 개념에서 출발하여 보편적 공통 개념을 형성하게 된다. 보편적 공통 개념에는 자연 법칙이 포함되는데, 중력의 법칙을 파악하는 것은  F=ma라는 수식만으로도 파악 가능하고, 이것을 통해서 미사일이 날아가는 궤적부터 유리컵이 떨어져 깨진다는 것 예측할 수 있다. 하지만 개개인들의 경험을 보면 우리는 1미터 높이에서 떨어져 깨지는 유리컵의 ‘덜 보편적인 공통개념’에서 중력의 법칙이라는 ‘더 보편적인 공통개념’으로 나아가는 것 같다. 공통개념은 단순한 개념의 획득이 아니라 신체적 합성과 변용이기 때문이다. 공통개념은 먼저 내 신체와 부딪치는 다른 신체와의 사이에서 시작된다. 마주침이 없다면 공통 개념은 형성되지 않는다.

세미나를 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에티카>를 읽으며 변용되고, 토론의 과정에서 친구와 우리는 공통개념을 갖게 된다. 텍스트를 매개로 세미나에서 상호 합성과 변용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둘 사이에 공통개념은 만들어질 수 없다. 합성은 변용의 원인이자 결과이다.

신체의 합성은 우연한 마주침 속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합성은 ‘공통적인 것’이 있기에 일어나므로 우연한 것이 아니라 필연적인 것이다. 필연성에 대한 인식이야말로 원인의 인식으로부터 결과에 대한 인식으로 나아가는 적합한 관념이다. 따라서 더 자주 다른 신체와 합성할 수 있다면 정신은 더 많은 것을 필연적인 것으로, 적합하게 인식하게 된다.

신체들간의 합성이 특별히 중요하다. 신체들의 합성이야말로 지성의 질서의 시동을 거는 열쇠가 된다. 공통개념을 통해 우리는 자신과 세계에 대한 적합한 인식으로 나아간다.



<에티카>, 2부

<스피노자의 철학>, 들뢰즈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들뢰즈


2019. 1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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