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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다한이야기/아이돌 인문학

정신 공간의 분수령

by 홍차영차 2019. 4. 26.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3부에 나오는 '정신 공간의 틀'.

 

이반 일리치는 12세기에 비주얼 텍스트의 탄생과 함께 평민 문자문화(lay literacy)가 만들어졌고, 20세기까지도 이런 정신 공간의 틀을 유지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20세기 후반에 새로운 정신 공간으로의 변화가 나타난다고 말한다. 일명 컴퓨터 문자문화(computer literacy). 정신 공간의 틀이 다르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좀 더 확연하게 살펴보기 위해서 몇 가지 예를 들어봄.

 

1) 거짓말이 없는 세계 - 호메로스(구전문화)의 시대

일리치가 말하는 정신공간의 틀을 따라가다 보면 거짓말, 자아, 개성이라는 것은 평민 문자문화의 영향 아래서 발명된 것들이다. 알파벳이 없었더라면 거짓말이라는 것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거짓말이 없는 세계가 가능할까? 혹은 언제나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하는, 생각과 행동이 분리되지 않은 인간들이 있었다면 어떻게 살아갔을까? 알파벳이 없던 세계에서는 모두가 성자였다는 말인가.

 

역사는 ‘말’이 낱말로 바뀔 경우에만 가능하다. 한 글자 한 글자를 따라가는 이른바 축자 전통에서만 역사학자는 과거를 재구성할 수 있다. 잃어버린 낱말을 다시 찾아낼 수 있는 곳에서만 역사가가 이야기꾼을 대체할 수 있다. 역사학자의 집은 글이라는 섬에 자리 잡고 있다. …… 이 섬의 해변을 벗어나면 기억은 낱말이 되지 않는다. 낱말이 없으면 유물은 침묵한다. 좌절감이 들 때가 많지만, 우리는 역사 이전을 읽어낼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이 구렁을 건널 다리를 놓을 방법은 없다. (<ABC, 민중의 마음이 문자가 되다>, p.20>

 

알파벳이 나타나기 이전의 인간형이라고 할 수 있는 <일리아스>에 나타난 ‘호메로스적 인간’을 살펴보면 문자문화 이전의 인간들이 어떻게 행동했으며, 그들의 사회가 어떤 원리 안에서 작동되었는지를 어렴풋하게 짐작할 수 있다.

한 마디로 호메로스적 인간은 의지와 행동 사이에 아무런 간극이 없는 사람이다. 그들은 자신의 감정과 행동을 투명하게 드러낼 뿐이다. 지금처럼 영혼이 모든 것을 책임진다든지, 이성으로 판단한 후에 행동하지 않는다. 거칠게 말해보자면, 이 시대에 인간들에게 정신 혹은 자아라는 것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자아라는 것은 기억들의 집합, 표상의 집합으로서 정신이라는 개념 속에서 가능하다. 만약 이런 정신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지금의 행동과 다른 속마음을 갖는 것은 불가능하다. 즉 호메로스적 인간에게 꿍쳐둔 마음, 다시 말해 겉으로 ‘보이지 않는 마음’이 없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그는 상황이 바뀌면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바로 전의 행동과는 모순돼 보이는 행동도 할 수 있다.

<일리아스> 23권에 나오는 전차 경주는 이런 모습을 잘 보여준다. 안틸로코스는 전차 경주를 하면서 비열한 방법으로 메넬라오스를 제치고 1등을 했다. 그런데 경기가 끝난 후 메넬라오스가 그의 비열함을 고발하자 안틸로코스는 지체 없이 사과했다. 안틸로코스를 저주했던 메넬라오스 역시 그 사과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받아들였다. 이런 행동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줏대가 없는 인물이고, 힘에서 밀려서일까? 메넬라오스와 안틸로코스는 힘과 용기에 부족함이 없을 뿐 아니라 각각 종족의 왕으로서 트로이아 전쟁에 참여했다. 그만큼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다. 안틸로코스의 비겁한 행동은 그 상황에서 신적인 미혹(ate)때문에 발생할 것이고, 악한 마음을 ‘계획’하거나 ‘품은 것’이 아니다. 재차 말하지만 호메로스적 인간들에게 ‘속마음’은 없다. 신들의 개입만이 있을 뿐. 그렇기에 안틸로코스는 쿨하게 자신의 행동을 인정하고 사과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메넬라오스가 안틸로코스에게 몹시 화가 나고   속이 상해 그들 사이에서 일어섰다. (중략)   “안틸로코스여! 전에는 그토록 슬기롭던 그대가 하는 짓이 그게 뭐요? 그대는 훨씬 못한 그대의 말들을 앞으로   들이밀어 내 솜씨를 모욕하고 내 말들을 방해했소이다. (중략)”   “그대도 아시다시피 젊은 사람은 마음은 급하고   생각은 얕아 실수를 저지르게 마련이오.   그러니 마음을 가라앉히시오. 내가 얻은 암말을 기꺼이 내드리겠소. (중략)”   “안틸로코스여! 내 자진하여 그대에 대한 노여움을 거두어들이겠소이다. (중략)   그러니 내 그대의 간청을 받아들이겠소. 그리고 내 마음이    오만불손하거나 냉혹하지 않음을 여기 모인 다른 사람들도 다   알도록 비록 내 것이긴 하지만 이 암말도 그대에게 주겠소이다.” (<일리아스>, 천병희 역, 23권 566행 이하)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이런 논리와 사과의 방식은 용납될 수 없다. 하지만 호메로스의 시대, 구전 문화의 시대에서는 그리스 신화를 바탕으로 이런 사회의 작동이 가능했었다. 지금과 전혀 다른 정신 공간의 틀!

헤로도토스의 <역사>와 투퀴디데스의 <역사(펠로폰네소스 전쟁사)>가 보여주는 차이도 정신공간의 틀이 달라지고 있다는 측면에서 이야기할 수 있다. 헤로도토스는 객관성을 말하고 있지만 여전히  ‘무사이 여신에 사로잡힌 채’ 노래하는 방식으로 <역사>를 서술하고 있고, 투퀴디데스의 경우 언제나 ‘엄밀한 검토’를 원칙으로 자신이 진실이라고 믿는 것만 선택해 소개하며 그것을 믿어주기를 바랄 수 있었다. 그런데 되짚어 보면 시인들이 말하는 ‘신으로부터의 영감’이란 문자 이전의 사회에서 축적된 집단 기억의 신화적 표상에 다름 아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역사가 출현하기 위한 전제 조건 중 하나는 바로 그 ‘신들린 상태’, 즉 집단 기억으로부터의 해방이며, 집단기억 너머의 다른 세계의 발견에 있기 때문이다. 호메로스적 인간의 시대에는 개인이란 없고, 집단의 구성원으로 인간이 있을 뿐이다. 알파벳이 점점 더 자리를 잡아가면서 서서히 자기가 속한 집단의 기억 혹은 세계관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비판 수정하는 개인이 나타나게 되었다.

 

2) 영성과 지행일치(知行一致)의 불가능성에 대하여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주체가 자기 자신에게 필요한 변형을 가하는 탐구/실천/경험 전반을 ‘영성’이라 부를 수 있을 겁니다. 따라서 인식이 아니라 주체, 심지어는 주체의 존재가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를 구성하는 정화, 자기 수련, 포기, 시선의 변환, 생활의 변환 등과 같은 탐구, 그리고 실천, 경험 전반을 영성이라 부르도록 합시다.” (미셸 푸코, <주체의 해석학>, p.58)

 

지식인들은 왜 아는 대로 행하지 못할까? 지식인들 뿐만 아니라 나 역시도 배운 대로 행하지 못하는 것에 항상 염려하고, 내가 속한 공동체(문탁네트워크)에서도 모든 공부는 삶과 분리되지 않는 공부여야 한다는 점에서 긴장감을 놓지 않으려고 한다. 21세기에 지성과 행함을 함께 말하는 것은 이제 촌스러운 일이라고 말해야 할까? 푸코에 따르면 ‘진실의 인식과 실천/행동’의 사이가 벌어지게 된 맥락은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시대에 따라 계속해서 변해온 에피스테메(진리 체계)에서 발견된다.

고대에는 어떤 진실에의 접근, 어떤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자신의 변화가 수반되어야 했다. “주체가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고 변형하며 이동하고 어느 정도와 한도까지 현재의 자기 자신과 다르게” 되지 않는다면 어느 누구도 진실에 접근할 수 없었다. 여기서 고대부터 지금까지 내려오는 여러 가지 영성의 실천들을 떠올려볼 수 있다.

우리는 영성을 초월적인 것에 접속하는 정신적인 활동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제 기원전 5세기부터 기원후 5세기에 나타난 영성의 활동들은 신체적일 뿐만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실천, 탐구, 수련 전반으로 나타난다. 불교에서는 앎의 수련으로 108배를 올리고, 카톨릭에서 순례길을 떠올려 보라.

그런데 우리는 데카르트의 순간을 통과하면서 진실을 아는 것은 단순한 ‘인식’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제 더 이상 진실에 접근하기 위한 영성의 수련이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진실을 인식하는 것과 실천은 전혀 별개의 문제가 되었다.

 

3) 2019년 20대가 갖는 정신공간 혹은 인식의 잣대

‘20대 남자 현상’이라고 아시나요? 얼마 전 <시사IN>에서는 이 문제를 파헤쳐보기 위해 1000명의 남녀 20대를 대상으로 208개의 항목으로 초대형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지난해부터 문재인 정부에 대한 지지율이 유난히 빠졌고, 페미니즘이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가운데 사회 구성원 전체와 전혀 다른 반응을 보여주는 집단! (<시사IN> 2019년 04월 15일(월) 제604호,  “20대 남자, 그들은 누구인가”)

남녀를 나누기 전을 먼저 살펴보면, 20대가 현재 가장 크게 반응하는 논리는 ‘공정성’의 문제인 것 같다. 20대가 생각하기에 지금의 50~60대는 작게 일하고 크게 이익을 본/받고 있는 집단이다. 자신들은 죽어라 공부하고 치열한 경쟁을 돌파해도 얻는 것이 거의 없다는 정서를 가지고 있다. 일례로 한 대학에서 학과 구조조정의 공지문이 발표되었을 때, 가장 큰 문의가 온 곳은 학과가 축소되는 곳이 아니었다. 반대로 정원수가 더 늘어나게 된 학과의 학생들이 자신들의 권리가 축소되는 것은 비판하는 청원이 가장 많이 들어왔다고 한다. ‘이전과 똑같은 등록금을 내는데, 더 많은 입학생들이 들어오면 개개인에게 배정되는 자원들이 줄어들텐데, 이건 공정하지 못하다’는 주장!

20대 남자 현상으로 돌아가보자. 이들이 가장 크게 반응한 부분은 단연 젠더 문제였다. “노동시장 성차별 문제, 연애·결혼 시장의 성차별 문제, 그리고 페미니즘 문제에 이르기까지, 20대 남자는 젠더 문제에 가장 일관되고 강력하게 반응한다.” 몇 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을 살펴보자.

1) 20대 남성들은 여성 차별 문제에 대한 60.7%가 “심각하지 않다”라고 대답했고, 남성 차별 문제에 대해서는 68.7%가 “심각하다”라고 대답했다. 2) 취업 시장에서 남녀 차별에 대한 반응을 보면 더욱 극명하다. 전체 응답자 평균은 “여성에게 불리하다” 49.1%, “공정한 편” 31.2%, “남성에게 불리하다” 13.7%다. 그런데, 20대 남성들을 보면 “공정” 45.9%, “남성에게 불리” 29.2%, 그리고 맨 마지막이 “여성에게 불리” 16.9%다. 와우! 3) 마지막으로 “페미니즘은 남녀의 동등한 지위를 이루려는 운동이다.”라는 질문에 다른 세대와 달리 20대 남자는 41.5%가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20대 남성이 진정으로 특별한 집단이 되는 것은 남성 차별 문제를 무겁게 평가하기 때문이다. 차별받고 있다는 인식은 일관된 분노와 강한 결집력과 지치지 않는 지구력을 만들어낸다. 이것은 기성세대 남성에게서 찾기 어려운 인식이다.”

20대 남성 현상을 명확히 규정하기도 쉽지 않지만, 이에 대한 원인을 찾아 처방을 내리는 것은 더욱 더 어렵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들과의 소통에 첫걸음을 내딛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우선 20대 남성들이 우리와는 굉장히 다른 인식의 틀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재 우리가 서로 다른 인식론적 단절 속에서 마주서 있다는 사실의 인정에서부터 소통을 시작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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