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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호메로스

'나'는 어떻게 '내'가 되는가

by 홍차영차 2018. 8. 29.

오뒷세우스’는 어떻게 ‘오뒷세우스'가 되는가







사람의 ‘말’을 믿을 수 없는 시대에 오뒷세우스는 어떻게 자신이 오뒷세우스임을 증명할 수 있을까? <오뒷세이아> 19권부터 24권까지는 마치 이런 질문에 대답이라도 하듯 구성되어 있다. 즉, 변화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오락가락했던 오뒷세우스는 행위(역량)와 흔적(이야기)를 통해서 자신의 새로운 정체성을 구성해낸다.

20년 만에 이타케로 돌아온 오뒷세우스는 ‘내가 이타케의 왕이(었)다’라는 주장으로 이 상황을 타파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기존의 질서와 기준이 무너져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내가 ‘이타케의 왕’이(었)다라고(본질) 외쳐도 이타케 공동체는 이를 순순히 인정하지 않았고 인정할만한 공동체적 역량도 갖지 못한 상황이었다. 오뒷세우스는 스스로가 이타케의 왕, 오뒷세우스임을 새롭게 입증해야했다.



오뒷세우스의 큰 활, being이 아니라 doing

우선 그는 자신의 존재를 자신만이 할 수 있는 특성(역량)으로 증명한다. 오뒷세우스의 활에 시위를 얹어 12개의 무쇠를 통과하는 것은 그만이 보여줄 수 있는 특성이기 때문이다. 텔레마코스가 퓔로스에 다녀오면서 성인으로서의 통과의례를 마친 것처럼, 오뒷세우스는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통과의례를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보여주어야 했다.

큰 활에 활시위는 얹는 것은 오뒷세우스의 힘(역량)을 보여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는 오뒷세우스가 그 활의 특성을 잘 알고 있다는 것, 다시 말해서 자신이 20년 전에 이타케의 왕이었다는 것을 본질적으로가 아니라 현행적으로 보여주는 행위가 된다.

여기서 역량, 힘, 능력을 절대적 크기로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오뒷세우스에게 이만큼의 힘이 있다는 크기도 중요하지만, 여기서 활에 활시위를 얹는 행위는 자신만이 가진 특이성을 보여주는 행위로 봐야하지 않을까.





흉터, 삶의 흔적으로 만들어진 이야기

다른 한 편에서 그가 오뒷세우스임을 증명하는 가장 큰 증거는 자신의 다리에 남은 흉터였다. 유모가 자신을 알아볼까 조심했던 것 역시 멧돼지에게 당한 흉터때문이었고, 돼지치기 에우마이오스를 비롯하여 자신의 친아버지인 라에르테스가 오뒷세우스를 알아보는 것 역시 다리의 흉텨 덕분이었다.

멧돼지의 흰 엄니에 부상당한 흉터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증거이기도 하지만 또한 그 사람이 거쳐온 삶의 흔적이라는 점이 더 중요한 것 같다. 신기한 것은 오뒷세우스가 흉터를 자신의 증거로 보여줄 때마다 어떻게 자신이 그 상처를 입었는지 이야기narrative를 자세히 들려준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다리의 흉터는 단순한 증거를 넘어서 오뒷세우스를 오뒷세우스이게 만드는 하나의 독특한 이야기로서 기능하고 있다.

(참고 : 호메로스 시대에 가인들이 들려주었던 이야기는 주로 전쟁 이야기였다. 그들은 한 사람의 전사로서 주체성을 갖고 전투에 임했다. 그렇기에 고대에 전쟁터에서 돌아온 전사는 오랜 항해에서 돌아온 선원처럼, 먼곳의 소식을 흥미진진한 일화와 함께 들려주는 이야기꾼일 수 있었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에서 돌아온 군인들은 아무런 이야깃거리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들의 전쟁 경험 속에는 주체성을 증명할 아무것도, 서사를 구성할 어떤 단편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문학과지성사)



나는 홀로 구성되지 않는다

내가 다른 사람을 ‘그’ 사람으로 알아보게 하는 것은 사실들의 모음이 아니다. 한 사람의 정체성이란 고정된 사실들이 아니라 그 사람과 나 사이에 있었던 삶의 흔적들을 공유하는 것이고, 이야기를 나눠가질 때 구성된다.

2018년 현재 우리는 내가 ‘나’임을 어떻게 증명하고 있을까?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최후에 자신이 자신임을 증명하는 증거로 내미는 것은 아마도 ‘주민등록번호’이지 않을까. “자, 나는 한국이라는 나라의 국민으로서 000000-0000000라는 13자리의 (주민등록)번호가 나를 보장하고 있다.” 그런데 만약 시스템에서 내가 제시한 번호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혹은 죽은 사람이라고 나타난다면 얼마나 당혹스러울까. -.-; 다른 측면에서 이 번호를 받지 못했거나(거부당했거나), 스스로 번호 받기를 거부당한 사람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할까.

정체성을 갖는다는 것은 하나의 어떤 본질을 소유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내가 다른 사람들과 만들어낸 독특한 관계이고, 상호간에 형성된 이야기의 구성이다. 내가 ‘뿔옹’이 되는 것은 나의 본질을 주장한다고 해결되지 않고, 끊임없이 주변의 타자들과 관계하면서 만들어낸 이야기, 사건들에 달려 있다. 이렇게 보면 정체성이란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항상 변화하는 것이고, 변화하는 것이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지난주에 이야기 나눴던 환대에 대해서 다시 말해보자. 환대를 논하면서 우리는 주로 환대하는 자(공동체)의 역량에 초점을 맞춨다. 하지만, 현실에서 환대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환대하는 자’와 ‘환대받는 자’ 모두의 행위(역량)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작은 환대의 요구가 큰 환대를 불러낼 수 있으며, 무조건적으로 보이는 환대의 행위가 또 다른 환대를 요구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 수 있다.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를 정도의 끊임없이 계속되는 환대의 순환과 시도가 필요하다.


내가 누군가에게 끌릴 때 그 사람이 나에게 긍정적인 신호로 반응한다면 우리는 더더욱 그에게 끌리고, 내가 더 크게 끌리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상대방도 나에게 더 강하게 이끌린다. 이처럼 서로의 반응에 반응하면서 반응은 더더욱 크게 확장되고, 각자의 반응이 향하는 방향은 이제 하나로 수렴된다. ... 그가 나를 존중하는 모습에서 나 역시 스스로를 존중한다. (김원영,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사계절, 69쪽)


정체성의 추구는 흔히 내가 무엇이다라는 본질적인 태도 혹은 기원적 태도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정체성을 존중한다는 것은 한 사람을 한 사람으로 대우하고, 그에게 알맞는 자리를 인정할 때에야 가능하다.

내가 어떻게 내가 될 수 있냐고? “타인이 나의 반응에 다시 반응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 우리는 타인을 존중하게 되며, 나를 존중하는 타인을 통해 나 자신을 존중하게 된다.” 나(정체성)는 홀로 구성되지 않는다.



2018.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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