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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호메로스

'길' 위의 앎과 삶

by 홍차영차 2018. 8. 8.

‘길’ 위의 앎과 삶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보여지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느낄 수 없을 때 나타난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가 쓰여졌을 때는 이미 신과 인간, 인간과 자연 사이의 총체성을 잃어버릴 즈음이었고, 그리스의 반짝거리는 유산들은 실상 그리스인으로서의 자부심이 더 이상 드러나 보이지 않는 시점에 넘쳐나기 시작했다.

호메로스의 시대로 알려진 서사시의 시대는 총체성의 시대였다. 삶과 이상은 서로 떨어지지 않았으며, 서사시의 등장 인물 누구도 자연과 유리된 자신, 신과 인간, 인간과 인간이 서로 연결되지 않은 삶을 상상할 수 없었다. 총체성의 시대에는 누구도 삶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았고, 할 필요도 없었다. 인간은 홀로 존재하지 않고, 신과 자연, 인간으로 엮어진 촘촘한 그물망의 필연성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총체성의 시대는 찰나였고, 곧이어 사람들은 집단과 분리된 자아(개인-오뒷세우스)를 발견하게 된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져야했고,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들은 스스로가 던진 질문에 답을 찾지 못해 허둥대고 있다.

신화의 불이 꺼지고 이 어둠을 밝히겠다고 손을 든 것은 바로 ‘이성’이었다. 이제 사람들은 신화라는 가상에 의지하거나 속지 않으며 살 수 있으리라 기대했고, 계산되고 증명될 수 있는 것들에서만 자신들의 존재 이유를 찾았다. 하지만 이런 이성과 합리의 극단이 만들어 낸 것은 서로가 함께 잘 살 수 있는 새로운 총체성이 아니었다. 전쟁에서 전쟁으로, 그리고 또 다른 전쟁으로...... 이성의 시대에서 “인류는 진정한 인간적 상태에 들어서기보다 새로운 종류의 야만에 빠”져버렸다. 총체성이 무너진 시대에, 모든 것이 점점 더 분리되면서 원자적인 개인으로 세상에 던져진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야할까?



새로운 총체성의 시대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는 모두 호메로스가 썼다고 알려져 있지만, 두 책 사이에서 우리는 “우주가 변화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일리아스>와 달리 <오뒷세이아>에서는 더 이상 ‘고귀함’을 추구하는 영웅의 모습은 보이지 않으며, 명예를 얻는 장소였던 대규모의 전투도 나타나지 않는다. 생각과 행동은 점점 더 분리되고,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며, 신과 나, 자연과 인간 사이에 간극이 발생한다. 그렇다면 명성을 얻을 전쟁이 없어진 사회에서 영웅들은 자신의 존재(의미)를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위대한 <일리아스>의 영웅들은 화를 내고 완고하며, 좀처럼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반면에 <오뒷세이아>의 영웅은 고집부리지 않고, 인내하며, 현실 적응에 능수 능란하다. 아킬레우스와 달리 오뒷세우스는 왠지 모르게 왜소하고 소박하기도 하며 째째해보이고, 비겁해보이기까지 하다. 시인 호메로스는 서사시의 시대가 사그라들고 있던 시대에 <오뒷세이아>에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까?

‘신은 죽었다’는 초월적 규범과 신에 대한 최종 사형 선고가 내려지자 사람들은 스스로의 규범으로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아무런 제약이 없으니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성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아는 것이 많아지고 할 수 있는 일은 많아졌지만, 세상은 점점 더 팍팍해져만 갔다. 역설적이게도 현재 과도한 자유와 합리적 인식은 사람들에게 절망의 폭력으로 다가오고 있으며, 삶 자체가 짐이 되고 있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들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 시대에는 모든 것이 새로우면서 친숙하며, 모험으로 가득차 있으면서도 뜻대로 할 수 있는 소유물이다. 세계는 무한히 광대하지만 마치 자기 집에 있는 것처럼 아늑한데, 왜냐하면 영혼 속에서 타오르고 있는 불꽃은 별들이 발하고 있는 빛과 본질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이다. 세계와 나, 빛과 불은 서로 뚜렷이 구분되지만 서로 영구히 낯설게 되는 일은 결코 없다.”

(루카치,<소설의 이론>)


소박하면서도 일체감 있고 아무도 소외될 것 같지 않은 아름다운 세상이지 않을가. 루카치가 본 그리스는 “세계와 나, 빛과 불은 서로 또렷이 구분되지만, 서로 영구히 낯설게 되는 일은 결코 없”던 시대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루카치가 이 아름다운 문장을 쓰고 있었을 때(1914년), 그는 “세계의 상태에 대한 항구적인 절망의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말할 정도로 철저하게 부정적인 상태였다. 다시 말해 그가 그리스의 호메로스 시대에 주목하게 된 것은 개인들로 분화된 시대에서 파시즘과 전쟁의 광기에서 벗어날 어떤 갱신의 가능성을 찾기 위함이었다. 너와 나, 인간과 자연, 자연과 신(성)을 이어줄 ‘새로운 총체성’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 폴 고갱, 1897년



불확실성의 시대에서 살아가는 법

서로를 엮어줄 새로운 총체성이 필요하다고 명예를 획득하는 장소인 전쟁을 다시 일으킬 수는 없다. 현 시대를 역사적으로 바라보면서, 주체성을 버릴 수 없는 개인들이 어떻게 함께 할 수 있는지 상상할 수 있으면 된다. 상상이야말로 우리가 활용가능한 유일한 공간이라고 폴 벤느가 이미 말하지 않았는가? ^^

흥미롭게도 2차 대전의 말미인 1944년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계몽의 변증법>이라는 책에서 ‘이성’에 대한 혹독하고도 우울한 비판을 내리면서 이성의 방식으로 삶을 개척하기를 시도한 최초의 인간으로 ‘오뒷세우스’를 들고 있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신화의 시작은 사실 계몽(이성)이었으며, 이성이 다시 신화적 면모를 띠면서 광기로 나타난다는 것. 그렇다면 이미 이성의 극단에서 전쟁과 광기로 빠져드는 경험을 했는데, 여기서 우리는 왜 다시 오뒷세우스를 봐야할까.

10년간의 트로이아 전쟁을 승리하고 돌아가는 길 위에서 오뒷세우스는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완전히 달라진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인간', '용기', '정치', '우정', '사랑', '가족', '경쟁', '선물', '환대'의 의미가 혼란스러워졌다. 오뒷세우스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달라진 세상 속에서 낙담하지 않고 하루 하루를 돌보며 다른 영웅상을 만들어간다. ‘전쟁’에서의 영웅이 아니라, ‘일상’을 살아내는 영웅의 모습! 그는 알 수 없는 상황이나 장소에 도달할 때마다 절망하지 않고 이렇게 말한다. “어디, 내가 몸소 가서 보고 확인해봐야지!”(<오뒷세이아>, 6권 126행) 다시 말해 우리는 오뒷세우스를 이성의 대표 인물이 아니라 달라진 세계에, 불확실성이 점점 더 높아지는 세상에서 조심스럽지만 계속해서 뭔가를 시도하는 한 인간을 보고싶다. 오뒷세우스야말로 이미 만들어진 대로(大路)가 아니라 스스로 길을 내야했던, 자신의 행위로 삶의 정당성을 만들어 낸 최초의 모험적 인간, 실험적 인간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2018. 08.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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