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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

에콜로지카

by 홍차영차 2017. 12. 19.

에콜로지카의 심플한 철학


키워드 : 파괴적 성장, 생산적 탈성장, 가치 없는 부, 에콜로지카, 충분함, 본성, 배움의 연마, 지성=예술




앙드레 고르스가 <에콜로지카>에서 말하는 것은 심플하다. ‘충분함’의 규범으로 우리 전통과 생활양식, 일상문명을 살아가자! 그가 말하는 정치생태학이란 별다른 (어려운) 것이 아니라 이 ‘충분함’의 규범으로 인간으로서의 살아갈 수 있는 ‘생활세계’를 수호하는 것이다.

그런데 생활세계와 인간의 본성을 수호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김영민이 <공부론>에서 말했던 ‘지우면서 배우기’가 떠오른다. 지성이란 더 많은 지식을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자기 쇄신이어야 한다는 말. 고르스는 <에콜로지카> 후반부에서 성장과 노동에 대한 기존의 통념을 지우고 다시 생각하자고 말한다.

더 높은 성장률에 대한 이야기는 그리 낯설지 않다. 불과 10년 전 우리는 7% 성장률을 장담했던 후보를 대통령으로 뽑았다. 우리는 더 높은 성장률이면 OK라고 생각했다. 성장의 내용이 무엇인지, 그 성장이 우리에게 충만한 삶, 인간 사이의 소통, 더 느긋한 삶을 주는가에 대해서는 따져보지 못했다. 대통령이 바뀌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더 높은 성장에 목말라 한다. 하루에 필요한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하루에 얼마나 많은 돈을 벌 수 있는가를 생각하고 있다.

노동 역시 마찬가지다. 노동이 오로지 고용(임금)을 위한 조건이 되었을 때, 노동자와 자본은 같은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이윤을 얻을 수 있다며 자본과 노동자는 노동의 내용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더 이상 고민하지 않는다.

성장과 노동에 대해 다시 질문할 때다. 충분함의 규범을 생각하며 ‘어린이-되기’를 실천해보자. 순진한 척 하라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자신과 자신의 앎으로부터 자유로운free 상태에서 바라보자는 말이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 노동은 생명유지를 위한 행위였고, 18세기 노동은 자연을 변형시키고 지배하는 활동으로 이해되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노동을 어떻게 바라봐야할까?

생산성은 무한히 높아지고 있으며, 노동력이 생산에 기여하는 바는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 절망인가? 아니다. 고르스는 바로 이 지점이 우리의 유토피아를 실현할 지점이라고 말한다. 지금이 “인간의 활동을 고용의 독재에서 해방”시킬 때이다. 그는 생존소득(기본소득)이 주어진다면 우리는 “정신적 풍요를 안겨줄 활동”들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매 순간 들려오는 ‘성장’이라는 말은 단순한 예측이 아니라 하나의 이데올로기이다. 숫자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우리는 경제예측을 거부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거부는 기존 사회질서에 대한 거부이자 정치적 거부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더 많이 성장하고, 노동하고자 했던 이유를 고민해보자. 각자의 특이성을 잃어버리지 않으면서 고유한 토착가치를 만들면서 살고자 했다. 우리는 함께 더 잘 살기 위해서 노동했고 성장을 원했다. 노동과 성장이라는 말을 생태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본다는 말은 바로 이런 뜻이다. 

가치없는 부, 무용지물無用之物, 상품으로 되지 않는 활동을 말하는 앙드레 고르스! 고르스의 ‘에콜로지카’ 라는 말은 이제 나에게 지우면서 배우는 공부(지성) 혹은 (어린이-되기의) 예술(활동으)로 다가온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동굴 중 하나인 ‘라스코 동굴 벽화(의 활동/노동)’를 보면서 자본주의 시대의 잉여를 ‘저주의 몫’이라고 불렀던 바타이유의 통찰을 다시 새겨볼 시점이다.




2017. 1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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