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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

맑스 노동가치설과 게젤의 자유화폐론

by 홍차영차 2017. 7. 11.

맑스 노동가치설과 게젤의 자유화폐[각주:1]



잉여생산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혹은 잉여가치는 어디서 발생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항상 그 사회가 돌아가는 원리를 드러낸다. 고대 스파르타는 물질적 풍요가 정신을 나약하게 만든다고 여겼고, 아테네는 넘쳐나는 물질들로 예술의 정치를 시도했다. 또한 포틀래치는 분명 과도한 잉여물에 대한 위험성을 처리하는 방식이었고, 쿨라 역시 잉여물로 인한 전쟁을 피하기 위해 고안된 의례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실비오 게젤은 자유화폐론freigeld을 전개하면서 맑스의 <자본론>을 통렬히 비판한다. 왜냐하면 잉여가치에 대한 맑스의 해석이 더 이상 들어맞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잉여가치에 대해서 맑스와 게젤은 어떻게 다르고, 왜 다른 관점을 가졌을까.


맑스의 노동가치설 - 잉여가가치는 노동과 노동력의 차이에서 온다 

노동 가치설은 맑스(1818~1883) 이전 고전 경제학자들에 의해 이미 발견된 사실이다. 아담 스미스(1723~1790)나 리카도(1772~1823) 역시 노동 이외에는 어디서도 가치가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들은 여기서 멈췄다.

고전 경제학자들은 언제나 부르주아의 대변인들이었고, 잉여가치가 노동자, 자본가, 토지 소유자에 의해서 정당하게 분배된다고 말했다. 맑스가 주목한 지점이 바로 이곳이다. 엥겔스를 통해 맑스는 노동자들은 열심히 일한 것과 관계 없이 언제나 적은 임금을 받았고, 빈곤에 허덕이는 현실을 보았다. 무엇이 문제일까? 잉여가치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이며 그 비밀은 무엇일까?

맑스는 ‘노동력’이라는 독특한 상품에서 잉여가치의 비밀을 발견해 냈다. 노동력의 가치란 다른 상품들과 마찬가지로 노동력 상품의 생산 비용으로 계산할 수 있다. 즉 노동력의 생산이라는 것은 “개인 자신의 재생산, 즉 그의 생활의 유지”이고, 오늘의 노동을 마친 노동력의 소유자가 내일도 동일한 힘과 건강을 가지고 동일한 과정을 반복할 수 있는 상태를 만드는 것이다. 다시 말해 노동력 상품의 가치는 노동자가 매일을 살아갈 수 있는 생활수단의 비용이다. 여기에는 의복, 거주할 집, 음식에 대한 비용이 들어가 있으며, 세대를 넘어선 노동의 공급을 위한 자녀양육비용도 포함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잉여가치는 어디서 발생하는가? 노동력과 노동의 차이에서 발생한다. ‘노동’은 노동력의 실제적인 사용인데, 일단 노동력이 상품이 되면 얼마를 지불하고 구매했느냐에 상관없이 노동력의 소비는 구매자(자본가)의 재량에 달려 있다. 상품 구매자의 정당한 권리! 하지만 자본가의 입장에서는 노동력의 소비가 노동력의 가치만큼만 생산한다면 노동력을 구매할 필요가 없다. 쉽게 말해서 자본가는 분명 노동의 소비에서 노동력의 (재생산) 가치보다 큰  가치(잉여가치)를 만들어내야 한다. 그래야 이익이 발생한다. 반대로 노동자 측에서 보면 노동력의 재생산이 이루어지지 않을만큼 과도하게 노동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노동력이라는 것은 살아있는 인간의 신체 속에 존재하는 것인데, 과도한 노동으로 노동자의 몸이 망가진다는 것은 결국 육체적, 정신적 능력의 손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즉 자본가가 잉여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은 오로지 노동자의 과도노동에 의해서만 가능할 뿐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자본가가 말하는 ‘잉여’라는 말이 ‘착취’의 다른 이름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맑스 사전에서 잉여가치율은 착취율일 뿐이다.




게젤의 자유화폐freigeld - 잉여가치는 노화하지 않는 화폐로부터 발생한다

<자본론>에서 맑스는 화폐 그 자체가 잉여가치의 원천이 아니라고 봤다. 맑스에게 잉여가치는 분명 노동과 노동력의 차이에서 발생한다. 하지만 게젤은 이런 이야기는 이미 오래전 이야기이고, 지금은 썩지 않는 화폐가 잉여가치의 원천으로 작동한다고 말한다.

엔데의 인터뷰는 게젤의 이야기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자연계에 존재하지 않고 순수하게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세상에 존재한다면, 그것은 돈입니다.” 자연계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자연의 법칙’을 어긴다는 말이고, 노화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노화하지 않는다는 화폐의 특징은 시작부터 다른 상품과 비교우위에 서게 한다. 자연스럽게 화폐는 축적의 수단이 되고, (축적되기 때문에) 현실에서는 화폐를 희소하게 만든다. 시장에서 교환을 촉진하기 위해 만든 화폐가 오히려 교환을 방해하는 모순을 품게 된다.

화폐의 가장 큰 특징인 유동성과 희소성은 모두 죽지 않는 화폐의 특성 때문이다. 게젤이 보기에 시간의 힘을 이기려는 시도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말이다. 게젤의 화폐론은 분명 아르헨티나의 현실 경제를 경험하면서 파악한 것이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이론에 붙인 이름처럼 ‘자연 질서’를 몸소 겪으면서 체득한 것 같다. 그는 1906년 6년간의 농촌생활을 하면서 주요저서인 <자연적 경제질서>를 발간했다. 세상에 존재하면서 자연의 법칙을 따르지 않는다면 불의가 발생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각주:2]


다르지만 같은 곳을 바라본다

맑스는 산업자본주의 초기에 공장 노동자들을 보았고, 게젤은 20세기 초반에 공황을 거치면서 화폐의 위력을 실감했다. 맑스의 노동가치설과 게젤의 자유화폐론은 다른 것 같지만 사실은 같은 곳을 목표로 두고 있다. 맑스와 게젤 모두 인간 상호간의 관계와 활동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게젤은 화폐가 교환수단으로의 기능에 충실하기 원했고, 그렇게 교환을 통해서 사회가 역동적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또한 맑스가 “아침에는 사냥하고 오후에는 낚시하고 저녁에는 소를 치며 저녁 식사 후에는 비판하면서도 사냥꾼으로도 어부로도 목동으로도 비판가로도 되지 않는 일”을 언급했던 것 역시 이런 이유에서이다. 

맑스가 현재의 삶을 바꾸기 위해서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고 믿었다면 게젤은 화폐가 바뀌면 삶이 바뀐다고 생각했다. 화폐란 현행 자본주의 시스템의 근간이고, <화폐, 마법의 사중주>에서 잘 보았듯이 지금은 ‘화폐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화폐는 단순히 경제 부분만을 지배하지 않고, ‘사회적 총체적 사실’로서 근대 사회의 원동력으로 작동하고 있다. 그렇다면 만약 화폐가 변한다면, 시장 경제만 변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돌아가는 원리가 바뀔 수 있다. 게젤에게 화폐에 대한 새로운 사유는 결국 새로운 삶에 대한 사유이고 실천이지 않았을까.


2017. 07. 11

  1. 자유화폐라는 이름은 그 의미를 퇴색시키는 것 같다. 여기서 자유는 통화 발행의 자유(free)이기도 하지만 이자없는(free of), 노화하는 화폐라는 의미가 더 크지 않을까. [본문으로]
  2. 게젤의 이론은 그리스 신화의 미다스와 실레노스의 대화를 떠오르게 한다. 디오뉘소스의 종 혹은 사부라 불리는 실레노스를 잡게 된 미다스 왕이 물었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것은 무엇인가?” 계속해서 대답을 미루던 실레노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인간에 있어 가장 좋은 것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고, 그 다음으로 좋은 것은 죽음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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