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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

일에 대한 반시대적 고찰

by 홍차영차 2017. 5. 25.

일에 대한 반시대적 고찰

- <우리는 왜 이렇게 오래, 열심히 일하는가?> 읽기 1 -



“그럼에도 우리는 언젠가 <자본>을 문자 그대로 읽어야만 한다. 그 텍스트 전체 4권을, 한 줄 한 줄 읽도록 하자. 제2권의 밋밋한 고원에서 이윤과 이자, 지대의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기 이전에 앞에 있는 장들을, 혹은 단순 재생산과 확대 재생산의 도식들을 열 번씩 다시 읽도록 하자. 더욱이 우리는 <자본>을 불어 번역으로도 읽어야 하며, 적어도 근본적인 이론을 다룬 장들이나 맑스의 핵심 개념들이 나타나는 단락들은 독일어 텍스트로 읽어야 한다.” (루이 알튀세르, <<자본>을 읽는다>)


읽는다는 것은 해석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죽은 지 이미 오래전이고, 사회주의에도 희망이 없다는 체념이 한창이었던 1960년대 알튀세르는 왜 <자본>을 다시 읽자고, 그것도 1권만이 아니라 그 지루한 3권까지도 열 번씩 다시 읽자고 말했을까. 그는 처음부터 투명한 독해에 반대했다. 알튀세르는 “순수한 읽기란 결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범한guilty 독해’가 어떤 것인지 말하자.”고 했다.

죄를 범한 독해(유죄적 읽기)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입장’, 어떤 ‘문제의식’ 속에서 무언가를 본다는 말이다. 지금 우리가 어떤 것을 볼 수 없다면 그것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구조, 체계, 조명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무엇인가를 볼 수 있기 때문에,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다른 것을 볼 수 없다.[각주:1]

우리는 책을 읽을 때, 말을 할 때, 글을 쓸 때, 중립적인 시각으로 보고 싶다고 표현할 때가 많다. 하지만 어떤 독해이건, 읽기란 기본적으로 자신의 입장과 의지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판적) 읽기라는 것은 어떤 객관적 목적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조명으로 ‘해석’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제까지 보이지 않던 것을 보고 싶다면 지금까지 내리 비치던 조명빛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그 조명 자체를 바꾸는 작업이 필요하다.

<자본론>의 책 부제가 ‘정치경제학 비판’이었던 것처럼 마르크스는 노동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과 는 다른 해석에 주력했고,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역시 사회학적 분석이라기보다는 비판적 읽기, 다른 해석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그리고 케이시 윅스의 <우리는 왜 이렇게 오래, 열심히 일하는가?>는 마르크스와 베버 그리고 페미니즘 이론을 새로운 조명으로 비춰주면서 ‘일’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일에 대한 반시대적 고찰! 한 마디로 그는 탈정치화된 ‘일’, 하지만 우리 삶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는 일을 다시 정치의 장으로 돌려보내려고 한다.




이율 배반의 노동 윤리 -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직업calling에 담긴 의무라는 개념이 우리 삶 여기저기를 죽은 종교적 신념의 유령처럼 배회한다. 

-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마르크스가 생산수단에 집중하면서 재산을 가진 소유주와 재산이 없는 노동자 구도를 제시했다면, 베버는 두 계급이 어떻게 고용주와 피고용인의 의식을 갖게 되었는지 이야기한다. 사적 소유가 자본주의 착취의 기본이라고 할지라도 그것만으로는 지금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한, 복종을 넘어선 헌신을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오랜 시간의 고된 노동을 복된 것으로 인식할 수 있으려면 이와 다른 논리가 필요하다.

베버는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산업화 시대를 거쳐 탈산업화 시대에도 노동자들에게 동일한 요구를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먼저 소명으로서의 직업의식! 직업calling이라는 말은 원래 프로테스탄트에게 있어서는 소명calling, 부르심이라는 말이었다. 그런데 소명calling이라는 비합리적 기원을 가진 말이 직업calling이 되면서 사람들의 의식을 강력하게 사로잡게 된다. 

소명은 신의 부르심이기 때문에 자신의 능력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즉 프로테스탄트 윤리는 매우 민주적인 동인으로서, 자신이 어떤 일을 하는지 어떤 지위에 있는지와 상관이 없다. 중요한 것은 헌신하는 태도이다. 이렇게 되면 일에 헌신하는 것은 불확실성과 불안감 때문에 자신이 선택받았다는 믿음을 강화하는 방법이 된다. 즉 일 자체에 의례적 요소가 깃들게 된다. 의례란 자신이 하는 행동과 그 목표 달성 사이의 관계성을 모호하게 만든다. 기우제를 들일 때 비가 내리는 것과 그 행동 사이에는 사실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 하지만 계속해서 비가 내리지 않는다면 이는 기우제를 준비하는 개인의 태도가 문제시된다.

종교적 구원이라는 목적과 연결되었던 노동윤리는 산업화 시대에 사회 이동성이라 새로운 동력으로 변화했다. 산업화 시대의 노동윤리는 종교적이었던 에토스의 세속적 버전으로 내세의 이동이 아니라 현생의 성공에 초점을 맞춘다. 세속적 금욕주의! 청교도 노동윤리는 기본적으로 금욕적인데 “의지를 결집해 내면의 유혹과 외부의 고난”에 맞서 노동에 헌신하는 것이 도덕적 삶으로 칭송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청교도적 에토스는 고용주와 피고용인을 나눌 뿐 아니라, 같은 사람이 생산자와 소비자로서 재구성되는 것까지 핵심적 역할을 한다. 즉 포드주의 시대가 되면 한 계급은 생산하고, 다른 계급은 저축하는 대신, 생산자는 동시에 소비자로서의 역할까지 의무로 갖게 된다.



점점 더 개인화되고 자유가 중요해지고 있는 탈산업화 시대에 노동윤리는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베버의 지적처럼 기본적으로 노동윤리는 개인화의 담론이었다. 종교적 구원이 개인적 책임을 강조했던 것처럼, 근면 성실한 태도와 성공은 다른 누구도 아닌 개인의 책임이 된다. 즉 노동윤리는 개인화를 촉진하는 담론으로 ‘착취’와 ‘불평등’을 정당화했다. 그리고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액체 시대에는 그 어떤 조직이나 권력도 노동을 설파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탈산업화시대이자 신자유주의 시대에 “노동자는 자기 자신을 더 잘 착취하기 위한 설계자가 되기를 기대”받고 있다. 

자기 실현 혹은 프로페셔널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개인은 자신의 삶이 되어버린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려고 한다. 고용주 역시 이제는 노동자가 그저 손으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와 가슴으로 일하기를 요구한다. 자신의 일을 소명으로 여겼던 노동자들은 이제 자신의 일을 커리어로 바라도로록 요구받는다. 노동자는 프로페셔널하게 일하면서 자율적인 삶과 독립을 꿈꾸지만 점점 더 일에 종속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자신의 생각, 상상, 관계, 정서까지도 이제는 노동윤리가 되었다.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 시장에서 일터로, 일터에서 가정으로

마르크스는 <자본론> 1권 2편에서 그 어떤 고전경제학자들도 풀지 못했던 잉여가치의 비밀을 풀 수 있다고 공언한다. 상품이 교환되는 시장marketplace 대신에 그가 주목한 곳은 상품이 만들어지는 “은밀한 생산의 장소”인 일터workplace였다. 법 앞에 평등해 보였던 두 명의 자산가(자본가/노동자)는 시장에서 정정 당당하게 등가교환에 나선다. 하지만 거래를 마치자 마자 두 사람의 얼굴표정과 태도는 극명하게 갈라진다. 거만한 미소를 띤 채 사업에 착수할 열의에 차서 걸어가는 자본가와 자신의 가죽을 팔아버리고 이제는 무두질만을 기다리는 초조한 노동자! 일터에서는 착취만이 아니라 위계가 형성되고 있었다.

나중에 마르크스가 ‘공포의 집’이라고 불렀던 공장에서의 노동 과정을 살펴보면서 그는 이윤 창조의 비밀이 바로 노동력과 노동력의 사용의 차이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각주:2] 비밀이 밝혀진 것은 맑스의 눈이 남달랐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고전경제학자와는 다른 조명으로 살펴봤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마르크스는 임금노동이 자본주의적 생산의 핵심 메커니즘이자 생명줄이라는 것을 밝혀낸다.


“노동자로서 겁에 질려 주춤주춤 걸어가던 노동자는 이제 앞장서서 활보한다.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거래에는 등장하지 않았던 제3의 인물이 이제 겁에 질려 뒤를 따른다. 두 손에 식료품과 아이, 기저귀를 들고서.” (Hartsock, 1983)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은 어디서 만났을까. 이제 장소를 옮겨 일터에서 가정으로 걸어가는 노동자를 살펴보자. 노동자가 장터에서 일터로, 일터에서 가정으로 옮겼을 뿐인데 여기에서 우리는 계급의 위계뿐 아니라 남성/여성 사이의 착취 형태를 목격하게 된다.  앞선 자본가와 노동자처럼, 법적 형식으로 평등한 남성과 여성은 가정(의 노동 분업)에서 임금노동을 하는 특권을 가진 노동자와 그림자노동을 하는 자로 나뉜다.[각주:3] 페미니스트들은 일을 공공화하고, 정치화하고,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통해 탈노동사회postwork에 대한 다른 시공간을 사유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마르크스주의가 산업 프롤레타리아트를 주목했던 이유는 그들이 잃을 것이 없기 때문이 아니었다.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새로운 세상을 창조할 힘을 갖고 있다고 보았다. 마찬가지로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은 마르크주의의 개념과 방법론을 새로운 영역에 접목하려는 노력을 통해 전통적인 일 개념에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데 성공했다. 더 이상 일은 부자유의 장소가 아니라 저항과 논쟁의 장소가 된다.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은 “잠재적으로 혁명적인” 노동자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인문학이 타자에 대한 공감이고, 소수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고, 자신의 지평을 넓히는 것이라면 그 시작과 끝은 페미니즘이어야 할 것이다.


2017.04.11






  1. 2016.3.7 문탁네트워크, 고병권 <자본> 1강 강의안 참조 [본문으로]
  2. 노동력이라는 상품은 두 가지 측면에서 특이성을 갖고 있다. 먼저 노동력은 다른 상품과 달리 후불제다. 상품을 사면서 그 상품의 용도를 다 쓰고 난 뒤에 돈을 지불하는 것이 있던가. 그리고 노동이 이루어졌을 때 노동력(상품)보다 더 이익을 얻어냈다면 그 계약에 대해 다시 논해야 하지 않을까. [본문으로]
  3. 임금노동에서 남성이 받는 임금은 집안에서 이루어지는 여성의 가정일(그림자 노동)과 아이에 대한 양육을 고려가 들어 있었다. (이반 일리치, <그림자 노동> 1981)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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