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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어려운 텍스트는 없다

by 홍차영차 2017. 11. 14.

어려운 텍스트는 없다


키워드 : 양식type-스타일, 디자인de-sign, 변덕-변화, 돌이킬 수 없는 변화, 영리한사람-현명한사람, 문사-무사, 글쓰기는 몸의 문제=버릇과 생활양식, 사람의 무늬를 조형하고 보살피려는 공부 




 <김영민의 공부론>(이하 <공부론>)은 읽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이는 개념이 어렵다기보다는 합리성으로 바로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함이 있다는 뜻이다. 단편으로 이루어진 김영민의 글은 사실 그 내용상으로 어렵지 않다. ‘양식과 스타일’, ‘디자인de-sign’, ‘영리한 사람과 현명한 사람’, ‘문사/무사’의 이야기는 개념상으로 이해못할 정도는 아니다. 그런데 왜?

너무 짧기에 강렬하고 집중적이기에 중화시킬 ‘시간’이 필요하다. 맞다. 시간이 필요하다. 녹여내고 소화시켜서 몸 속의 뼈에 새길 시간. 공부란 생각이 아니라 ‘몸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공부(쓰기)를 ‘버릇과 생활양식’으로 바라본다면 ‘돌이킬 수 없는 변화’란 생각이 아니라 습속의 변화로 드러나야한다. 그렇기 때문에 김영민의 글은 하나의 형이상학이 아니라 구체적인 상황을 펼쳐놓는다. 미야모토 무사시를 비롯하여 이소룡, 이종범, 차붐과 같은 현실적 인물이 많이 나오는 이유인 것 같다.

<공부론>에 엄청난 지식이나 놀라운 역사적 반전은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의 글에서 드러낼 수 없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그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그의 글쓰기는 스타일을 넘어 독특한 분위기(aura)를 느끼게 해준다. 자신이 쓰는 단어에 정밀하게 벼린 자신의 의지를 써 넣어서 만지거나 볼 수 없지만 글을 읽는 순간 빠져들어 계속해서 머무르게 하는 힘을 보여준다. 

읽혀지는 내용 자체가 아니라 그가 만들어내는 하나의 ‘무늬’에서 그는 읽는 사람이 자신이 말하고자하는 바를 읽어주기를 기대하는듯 하다. 이는 마치 오에 겐자부로가 겪었던 충격적인 독서 경험과 비슷하다. 중학생때 우연찮게 다자이 오사무의 책(<인간실격>). 소설 한 권 읽지 않던 중학생에게 무슨 책이 흥미로웠겠는가. 하지만 다른 책과 달리 다자이 오사무의 책은 자신에게만 말하는 것처럼 읽혔다고 말한다. “책이 쉽지 않고 사실은 조금 어렵지만 지금 읽고 있는 너라면 나를 이해해줄 수 있지 않냐”는 아주 개인적이면서도 자신의 의지를 전격적으로 드러내는 다자이 오사무의 글쓰기!

어려운 텍스트는 없다. 어렵다는 것은 “관념들을 섞는 재주”와 “글자들을 이어붙이는 재주”로 책을 읽었던 사람이 글자가 아닌 ‘몸을 섞기’를 요구하는 텍스트를 만났을 때이다. 철옹성 같은 나의 관념을 흔들것 같은 텍스트에 부딪혔을 때의 바로 보기 싫어지는 느낌.

나에게 지난 1년 동안 읽고 있는 스피노자의 <에티카>가 바로 이런 텍스트이다. 분명 기하학적 방식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읽기 어렵기도 했지만 나를 더 괴롭혔던 것은 스피노자가 던지는 몸짓이었다. 긍정의 철학자라 불리는 스피노자는 기존의 내가 가지고 있던 위계적 이분법에 커다란 구멍을 뚫어버렸다. 2017년 2학기 스피노자 세미나는 그에게서 저항하려는 무수한 싸움이었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이런 저런 변명들과 괴성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준 좋은 동학들과 함께 하면서 마지막 에세이까지 준비하게 되었다. 지금은 어떠냐고? 에세이를 다 쓰지 않았지만 분명 스피노자는 내 삶에 커다란 이동을 만들어내고 있다. 여전히 그를 읽는 것이 힘들지만, 그를 읽음으로 내가 지금과 다른 배치에서 나를, 다른 사람을 보게 되겠구나라는 것을 알게됐다. 다시 읽는 <공부론>이 나를 또 다른 축으로 바꿔줄 것을 기대해본다. 공부는 이동이다. 어려운 텍스트는 없다.


배운 것을 잊어버리기에 열중하겠다. 나의 내부에 침잠된 문화 신념 따위에 망각을 부여함으로써 발생하는 예측불가능의 수정상황에 흔쾌히 몸을 맡기겠다.

- 롤랑 바르트 (<김영민의 공부론>에서 재인용)




2017. 1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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