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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건강, 차이 있는 반복의 삶

by 홍차영차 2017. 10. 17.

건강, 차이 있는 반복의 삶




나는 어느날 아침에 본 나무 등걸에 붙어 있던 나비의 번데기를 떠올렸다. 나비는 번데기에다 구멍을 뚫고 나올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나는 잠시 기다렸지만 오래 걸릴 것 같아 견딜 수 없었다. 나는 허리를 구부리고 입김으로 데워 주었다. 열심히 데워 준 덕분에 기적은 생명보다 빠른 속도로 내 눈 앞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집이 열리면서 나비가 천천히 나오기 시작했다. 날개를 뒤로 접으며 구겨지는 나비를 본 순간의 공포는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가엾은 나비는 그 날개를 펴려고 몸을 파르르 떨었다. 나는 입김으로 나비를 도우려 했으나 허사였다. 번데기에서 나와 날개를 펴는 것은 태양 아래에서 천천히 진행되어야 했다. 그러나 때늦은 다음이었다. 내 입김은 때가 되기도 전에 나비가 집을 나서게 한 것이었다. 나비는 필사적으로 몸을 떨었으나 몇 초 뒤 내 손바닥 위에서 죽어 갔다. 나는 나비의 가녀린 시체만큼 내 양심을 무겁게 짓누른 것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에야 나는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행위가 얼마나 무서운 죄악인가를 깨닫는다. 서둘지 말고, 안달을 부리지도 말고, 이 영원한 리듬에 충실하게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안다.

-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에서 -



순리(順理)대로 살고 싶다. ‘살고 싶다’기 보다는 그렇게 살 수 밖에 없구나라는 실감. 순리를 맞지 않는 행동과 생각은 항상 병을 만들었고,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에 사건을 만든다. 경험적으로 그렇다(고 느꼈다). 세상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반복하고,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생로병사를 겪으면서 죽음을 맞는다. 자연의 법칙이란 단지 계절과 개인의 인생사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매일을 살아가면서 순리대로 행동하지 못했을 때에 벌어지는 결과들은 누구나 조금만 주의 깊게 바라본다면 예상할 수 있다. 매일 매일의 야근은 당연히 신체적 리듬을 망가뜨리고, 해소되지 않는다면 어느 순간에 분노로 폭발할 수밖에 없다. 아니 (살기 위해서는) 폭발해야 한다. 순리 맞지 않는 행동은 언제나 독기miasma를 만들기 때문이다. (이 독기의 원인은 다양하다. 차를 몰면서 새치기하는 차 때문에 뿜어낸 분노일 수도 있고, 직장 동료와의 불화때문일 수도 있다.) 신화적 해석에 따르면 신에게 미혹ate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리스 신화에서 인간이 미혹당하는 이유는 인간 스스로가 오만함hybris에 빠졌기 때문이다. 원인 없는 결과 없고, 이유 없는 미혹은 없다. 몸이 아프다는 것은 신호이다. 순리에 반해서 살고 있으니까 삶의 방식을 바꾸라는.

낭송을 통해서, 건강과 병에 대해서 고민하면서, 조르바의 삶을 낭독하면서, 자연의 법칙에 따라 산다는 것을 조금은 알게 된 것 같다. 낭송은 단순한 소리 없는 지식의 축적이 아니었다. 부분은 전체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한 부분을 낭송하기 위해 수 십, 수 백번 그 문장과 단어를 소리 내어 읽다보면 조르바가 보이고, 몸에 새겨진다. 삶을 바꾸는 것은 리듬을 바꾸는 것이고, 리듬을 바꾸는 것은 신체와 사유에 쌓이는 소리를 통해서 가능했다. 리듬에 맞춰 산다는 것은 어쩌면 아주 단순하게 항상 좋은 소리를 듣고, 말하고, 표현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건강은 자연의 리듬대로, 순리에 맞춰 사는 것이다.  건강하다는 것 그렇게 어렵지 않다.


음악은 힘이 세다

음악적인 사람으로 살고 싶다. 여기서 음악적이라는 말은 가장 아름다운 음계를 스스로의 삶에서,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상태로 조율할 수 있다는 말이다. 왜 글이 아니라 음악일까? 왜냐하면 소리(음악)를 통해서만 진정한 소통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랑의 세레나데, 노동요, 전투 전후에 불려지는 노래 혹은 구호를 떠올려 보자. 한 사람의 절실함을 보여주는 데 있어 노래보다 더 좋은 것이 있을까?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도 목숨을 걸고 전투에 참여하도록 하는데 심장을 관통하는 음악보다 나은 방법이 있을까. 우리는 글이 아니라 소리에서 말하는 사람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언어를 기호라고 할 때, 소리는 기호이자 동시에 의지이다. 락 콘서트장의 수 많은 사람들은 드럼 소리에 함께 움직이면서 자의식에서 벗어나 하나의 정신을 경험한다.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버리는 힘이 있다. 플라톤이 철인 통치자를 양육하면서 음악을 조심해야한다고 말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오래 전 그리스 비극 상연이 추구했던 집단의식이 바로 이 콘서트장에서 일어난다. 음악은 힘이 세다.

글과 변증법만으로는 소통할 수 없다. 소통하는 척 할 뿐이다. 소통이란 정보의 획득에 있지 않다. 말하는 사람의 의지, 그 사람의 삶이 전달될 수 있어야 한다. 소통은 지식과 지식의 만남이 아니라 의지와 의지가 만났을 때 가능하다. 소통은 말하는 사람의 삶이 하나의 음악으로, 리듬으로, 스타일로 드러날 때 완성된다. 

지식, 정보, 사실의 전달만으로 소통이 가능했다면 ‘문체文體style’는 없었을 것이다. 언어는 자의적이다. 자의적 언어를 가지고 대화한다는 것 자체도 기적이다. 하지만 자의적 언어로 상호 교감과 소통을 만들기 위해서는 스타일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 문체文體란 말 그대로 ‘글()의 몸통()’이라는 뜻이다. 아무리 많은 양의 글을 썼다고 해도 문체가 없다는 것은 읽는 사람에게 그 사람(의 몸통)이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읽은 사람을 움직하게 하는 것은 어떤 ‘사실’을 알았다는 데 있지 않다. 사람을 움직이는 동력은 그 텍스트가 만들어내는 스타일에 있고, 우리는 그 리듬에 반응하는 것 뿐이다. 

음악의 힘은 바로 여기에 있다. 구체적 언어가 모두 사라지고 오로지 소리로만 전달될 때, 추상적이라고 느낄 지 모르겠지만 바로 이때가 가장 직접적인 상호 소통이 이뤄질 때이다. 한 소절의 음악에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한 구절의 시가 수 백 페이지의 설명보다 공감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호모큐라스>에서 말했던 것처럼 소리는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심장에 박히고 뼈에 새겨지기 때문이다. 글을 쓸 때 자신의 의지를 새겨넣어야 하고, 글을 읽을 때 그 의지를 읽으려는 노력이 필요한 이유다. 리듬이 드러나지 않는 글은 누구도 움직일 수 없다.


건강은 리듬 속에 있다

양생養生이란 리듬에 맞춰 사는 삶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요즘 리듬을 바꾸려고 시도중이다. 대지의 리듬, 순리에 맞게 사는 것이 건강이라는 것을 체감하기 때문이랄까. 12시 이전에 자려고 하고, 새벽에 책을 읽으려고 노력중이며, 차를 탈 때는 급출발이나 급정지를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새로운 리듬을 만들려다보니 리듬이란 나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는다. 리듬에 맞춰 생활한다는 것은 나와 관계를 이루는 것들(사람을 포함하는 환경)과의 관계의 구성이다. 특히 중요한 것이 내 주변의 ‘사람들’이다. 나와 함께 사는 가족들과 어떻게 소통해야하는지, 함께 공부하는 친구를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지가 건강한 리듬을 만드는 데 핵심이다. 일찍 자고 싶다고 혼자서만 그럴 수 없는 법이다.

만약 누군가가 혼자만의 리듬을 고집한다거나 자신과 너무다른 리듬에 몸을 강제로 맞추려 시도하다 보면 몸과 마음이 망가질 뿐이다. 리듬은 상호적이다. 일리치 역시 건강을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고, 성장하고 나이를 먹으며, 치유하고, 고생하고, 죽음을 평화 속에서 기다리는” 능력이라고 보았다. 질병은 독립된 실체가 아니다. 누구나 자신의 몸 속에 병균을 갖고 있지만 질병은 그 상호 관계가 무너졌을 때 발생된다. 건강 역시 마찬가지다. 건강은 내가 나와 맺는 관계, 타자와 맺는 관계에 달려 있다. 상호적인 리듬을 만들어 낼 수 있을 때 건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나에게 오는 다양한 마주침들, 고통, 질병, 죽음의 경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것들과 끊임없이 소통하며 살아갈 수 있는 능력에 있다.


앤디 워홀



차이 있는 반복의 삶

소리가 음악이 될 수 있는 것은 듣는 사람이 그 소리를 맥락 속에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음악을 듣다보면 수직적 화성의 조화와 수평적 선율이 어떨지 예상할 수 있다. 지나온 음과 들려올 음을 함께 그려볼 수 있기에 순간의 소리는 우리에게 음악으로 들린다. 건강한 삶 역시 그렇지 않을까? 지나온 삶은 바로 다가올 인생 역시 예상 가능케 한다. 건강한 삶이란 예상가능하지만 그 속에 있는 차이를 즐기며 사는 것이다. 단번에 변화를 꿈 꿔서는 안 된다. 변화는 가능하다. 하지만 급격한 전조는 음악(삶)을 망쳐버릴 뿐이다. 아름다운 전조는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서서히 이루어져야 한다. 서서히 이루어지는 자기 수련과 일상 기술의 획득을 통해서.

소크라테스는 한 번도 시(음악)를 짓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시를 지을 필요가 없었다. 그의 삶 자체가 하나의 음계를 드러내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는 예상 가능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의 삶에 지루함이란 없었다. 전쟁에 나간 소크라테스는 한 겨울에 신발도 없이 몇 시간동안 걸어도 아무 탈이 없었고, 다친 동료를 위험한 전장 속에서 끝까지 데리고 오는 용기도 보여주었다. 이는 분명 소크라테스 스스로가 건강한 삶을 살아온 사람임을 증명하는 사례로 볼 수 있다. 그는 신을 무시하지도 않았고, 아테네의 (악)법도 존중했다. 그는 자연적 리듬과 사회적 리듬에서도 전혀 소홀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일평생동안 음악적인 삶, 조화로운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아프다는 것은 뭘까. 첫째, 신체적 조화가 무너졌다는 뜻이다. 환절기에 찬바람 한 번 불면 감기에 걸리는 나는 계절의 변화 아니 매일매일의 날씨에 민감하다. 그래서 더운 여름에도 외투를 가지고 다니며, 추운 겨울에는 끊임없이 물을 마신다. 바람에 민감한 내 존재를 그대로 인정하면서 변화하는 대지의 리듬에 맞추기 위한 작은 노력이라고 할까. 둘째, 아프다는 것은 내 몸에 뭔가 변화하고 있다는 뜻이다. 오래된 건물을 리모델링하는 것 조차도 귀찮고 피곤한 일이며, 이사 한 번 하는 것도 힘이 든다. 하지만 살아가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아프다는 것은 신체가 새로운 변화에 맞춰서 몸을 다시 만들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나의 탄생! 어쩌면 아프다는 것은 나를 이전에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삶의 신세계로 데려다주는 통과의례라고 할 수도 있겠다.

고통과 슬픔은 건강의 반대말이 아니다. 실상 건강하다는 말은 아픔을 포함하는 말이(어야한)다. 아프지 않으려는 시도는 생노병사(生老病死) 자연스러운 리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헛된 시도이고, 행복의 길에서 점점 더 이탈해가는 모순적 노력일 뿐이다.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아니, 아프더라도 리듬을 탈 수 있다면 건강하다는 것이고 행복하다는 것을 잊지 말자!


2017. 10.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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