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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

자유로운 인간이 되는 법

by 홍차영차 2017. 3. 27.

자유로운 인간이 되는 법



“인간은 이성의 지도에 따라 살아가는 한 본성상 언제나 필연적으로 일치한다.” (4부 정리 35)


스피노자가 말하는 이성에 따라 살아가는 자유로운 인간들은 하나의 일관성을 갖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만 그 일관성은 ‘기하학적 질서로’ 풀이되는 ‘신, 즉 자연’이라는 실체 가운데 스스로를 파악할 때 알 수 있다. 그런데 스피노자 역시 모든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이 왜 태어났는지, 어째서 이 가정 혹은 나라에서 태어났는지 그 발생적 원인을 아는 사람은 없다. 어떻게 하면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스피노자는 기쁨의 정서를 통한 촉발을 이야기 한다. 자유롭지 않더라도 기쁨의 정서를 경험할 수 있게 되고 이러한 기쁨의 정서는 개체를 좀 더 자유롭게 하고 확장시키므로 당연히 이후에도 또 다른 기쁨의 정서를 추구한다는 논리. 하지만 스피노자가 말했듯이 ‘작용받는’ 방식으로 얻게 되는 기쁨의 정서는 한계를 갖는다. 스스로부터 나오는 ‘작용하는’ 방식의 기쁨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성의 지도에 따라 살아간다”는 말은 뭔가 인간 외부적인 것의 지도를 말하는 것일까? 당연히 아니다. 여기서 ‘이성의 지도’라는 것은 <에티카> 1부에서 증명했듯이 하나뿐인 실체의 변용이자 양태로서 자연을 파악하고 또한 그 실체의 원리를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불리한 조건에서 태어난 인간이 스스로를 실체의 변용이자 양태로 파악할 수 있을까? 

스피노자는 이 원리를 ‘기하학적 질서’라는 말로 표현했는데, 공부 혹은 텍스트를 읽는 것과 관련해서 표현해보자. 모두가 텍스트를 읽지만 모두가 ‘읽은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수 많은 고전텍스트를 읽었지만 삶의 모습에서 변화는 보이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한다. 또한 똑같이 책을 읽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스피노자가 말한 것처럼 ‘전체’를 파악한 듯이 삶을 살아간다. 분명 ‘읽어버린 사람’은 자신의 관점이 열리고 스스로의 능력이 확장된다.

스피노자는 더 많은 개체와 더 많은 방식으로 만나면서 공통개념을 형성할수록 더 완전해진다고 말했다.[각주:1] 그러므로 텍스트를 통해 저자를 만나고 텍스트 자체와 공통개념을 형성하는 것은 ‘읽어버렸다’는 말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읽어버렸다’는 것은 스피노자 말로 ‘신 즉 자연’의 일부로 자신을 파악하는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에 던져진 자신을 파악할 때 인간은 정념에 휘둘릴 때가 많다. 그리고 이러한 정념이란 자신의  외적 조건들-남성/여성, 나라, 민족, 나이-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스피노자는 명확히 말했다. 정념을 벗어나서 사건과 개체에 대한 ‘적합한 관념’을 갖게 될 때 기쁨 가운데 있을 수 있다고. 그리고 어쩌면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에 대한 ‘적합한 관념’을 갖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인간이 이런 방식으로 정념을 벗어나 자신을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은 여러가지이다.[각주:2] 방금 언급했던 텍스트를 통해서, 예술작품을 감상할 때, 지나가는 개미 혹은 날아가는 참새(자연)에 집중할 때, 음악에 몰입했을 때 가능한 것 같다. 하지만 읽어버렸다고 해서, 잠시 그 순간을 경험했다고 해서 끝나지 않는다. 완전성이라는 측면에서 좀 더 자신을 확장해 가야한다.

스피노자는 인간은 본성상 정념에 사로잡히기 쉽다고 말한다. 정념에 사로잡히지 않은 스스로를 파악하게 될 때 인간은 ‘자유로울 수’ 있다. 아무런 외적 조건에 의해서도 좌우되지 않는 ‘내재적 독특성’을 스스로의 내부에서 발견할 때. 신 즉 자연의 일부로서의 자신! 이때 인간은 자신이 어떻게 다른 개물들과 좋은 마주침을 마주칠 수 있는가 알게된다. 이 순간 어떤 사물이나 동물과의 마주침도 그 인간을 해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자신을 전체를 구성하는 일부로, 전체이자 일부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단순하게 자연을 관찰하면서 외적/내적 조건에서 벗어나는 순간을 경험했다고 끝나지 않는다. 인간은 본성상 신체적 자극에 쉽게 충동되기 때문이다. 시간적으로 오래, 영원히 자신을 자연의 일부로 파악하기 위해서 지속적인 공부 혹은 수행이 필요하다. 수행방식은 개인에 따라 다양할 수 있다. 신체적인 면으로 몸을 쓰는 춤, 오랜 시간이 걸리는 기호같은 고전읽기, 시간예술인 음악이 아주 좋은 매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 최고의 복은 신을 인식하는 것이다. 왜? 인간은 물론 수동적인 기쁨의 정서를 경험할 수 있다. 하지만 스피노자가 말하는 지복은 외적 마주침에 의존하지 않아야 한다. 미신, 정념에 흔들리지 않는 자신의 능력으로 느끼는 기쁨이어야 한다. 자기 안으로부터 나오는 기쁨, 즉 이 순간에 스스로를 신 즉 자연으로 인식할 수 있을 때 맛보는 기쁨이 가능하다. 그리고 우리는 이때 비로소 완전한 인식, 제3종 인식을 소유하게 된다.

여기서 능동적이라는 의미도 다시 새겨봐야 한다. 능동적이라고 하면 자유의지 혹은 선택을 떠올릴 때가 많다. 하지만 스피노자가 말하는 제3종인식 상태를 능동적이라고 할 때, 이는 ‘기하학적 질서’를 가장 완벽하게 알고 이성에 따라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그 어떤 외적인 사건도, 내적인 동요도 ‘질서’를 무너뜨릴 수 없다. 적합한 관념이란 사물/사건의 발생적 원인을 파악하는 것이라고 할 때, 자신에 대한 적합한 관념을 갖는 것이 자유로운 인간이 되는 길이며, 제3종 인식 상태에서 활동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신이 ‘신 즉 자연’의 일관성을 소유했다는 확증하는 것은 가능할까? 제3종 인식에 있어서 이는 자신 이외의 그 누구도 확증할 수 없다. 오로지 스스로가 그 내재적 독특성을 확증할 수 있을 뿐이다. 의심할 필요 없다. 스스로가 확인하는 확증성으로 행동하는 그 순간 스스로가 그 일관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테니. 자유로운 인간이 되는 것은 스스로에 대한 ‘적합한 관념’을 파악할 때 가능하다.


2017. 03. 27

  1. 스피노자는 실재성과 완전성을 동일하다고 말했다.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은 완전하다는 뜻이다. 더 완전하다는 것은 불완전의 어떤 것을 상정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상태마다 존재마다 완전하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므로 스피노자의 논리에서 항상 그 단계가 완전하고 또한 더 높은 완전성으로의 변용이 가능하다. [본문으로]
  2. 소크라테스가 전쟁터에서도 12시간이 넘는 시간동안 서 있었던 것이나 <향연>에서 잔치에 가던 도중에 한동안 서 있었던 것 그리고 <데미안> 주인공이 자신을 찾으려고 했던 것이 바로 적합한 관념과 연관된 것 같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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