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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

복종과 진리

by 홍차영차 2017. 4. 14.

복종과 진리는 다르지 않다




신학과 철학 사이에는 어떤 연관이나 친화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 철학의 목적은 진리 이외에 다른 것일 수 없으며, 신앙의 목적은 오직 복종과 경건이다.(p274) - 스피노자, <신학정치론> 14장


스피노자가 <신학정치론>를 쓰게 된 것은 심혈을 기울여 쓰던 <에티카>를 잠시 손에서 내려 놓을 정도로 네덜란드 정치 상황이 무질서해지고 난폭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에티카>에서 시종일관 차분하게 정의, 공리, 정리로 논지를 전개하는 것과 달리 <신학정치론>에서는 다소 과격한 문체와 논조들이 나타난다. 신앙은 복종을 요구하고, 철학은 진리를 요구한다는 매우 이분법적인 주장! 그렇다면 <에티카>는 이성적 논증을 시도하는 철학서이고, <신학정치론>은 정념에 사로잡힌 대중의 이해를 목적으로 쓴, 그렇기에 이성적 논리가 아니라 네덜란드 대중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단순하게 만들어진 것인가.

“그의 행위가 선하다고 할 것 같으면, 다른 신자들과의 교리에서 아무리 많은 차이가 난다 하더라도, 그는 여전히 독실한 신자다.” 구원이란 (행위로 드러난) ‘복종’이라고 스피노자 스스로가 정의한 것처럼 신앙의 본질은 단순한 인식이 아니라 삶으로 드러난 행위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스피노자는 <신학정치론> 13, 14장에 걸쳐서  반복해서 ‘복종’을 오로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이 공포로 인해서 행동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과연 성서가 말한 복종, 경건을 공포심으로 인해 강요된 행위로 볼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복종은 강요된 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행위에서 체화된 말씀logos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스피노자가 서로 다른 목적을 가졌다고 말한 신앙과 진리는 같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Moses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참으로 알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만 알고 있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쟁이요, 그 사람 속에는 진리가 없습니다.”[각주:1]라는 성경(<요한1서> 2장 3~4절) 구절을 인용하면서도 스피노자는 신앙은 복종이고, 철학은 진리라는 이분법을 설명한다. 신앙과 철학이 전혀 독립적인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는 말이다.  다시 정리해 보자. 스피노자가 내린 결론에 따르면 신에 대한 복종은 한 마디로 “네 이웃을 사랑하라”이다. 참된 종교, 보편적 종교로서 성서가 이렇게 단순한 문제(교리)만을 다루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성서에서 단어가 조금 변경되고, 언어가 바뀌어도 전혀 문제가 없다는 점도 역시 이를 근거로 하여 증명한다. 이웃 사랑의 핵심 논지만 변하지 않는다면 문제 없다는 것!

하지만 <에티카>를 대입해본다면 스피노자의 입장에 모순이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된다. <에티카>에서 스피노자는 분명 적합한 관념을 이야기 한다. 1종, 2종, 3종 인식을 이야기하면서 이성으로 매 순간마다 공통개념을 만들 수 있고, 이러한 공통개념이 커질수록 완전성 역시 더 큰 완전성이 된다. 개인들 역시 전체 속의 자신, 신 즉 자연 속에 필연성으로 운동하는 자신을 즐거워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유덕하다는 것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필연적 운동을 인식하고 살아가는 것 그 자체라고 말한다. 

앞선 복종과 진리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 자연의 필연성을 파악하고 그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자신을 즐거워하는 사람과 하나님의 말씀logos이 체화되어 말씀 가운데 복종하는 사람이 서로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 너무나도 왜곡되어 있기 때문에 스피노자 역시 의도적으로 현장의 유럽인들에게 즉각적이고도 자극적인 글을 쓰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모세처럼.

스피노자가 논증한대로 말씀logos을 단순하게 인식한다고 구원받을 수 없다. 말씀의 체화, 말씀으로 인해서 주체의 변화가 일어날 때 구원이 이루어진다. 조금 더 신앙적으로 표현해본다면 말씀으로 세상에 돈 예수를 구주로 고백한다는 것은, “네 이웃을 사랑”하는 행위가 자연의 필연성임을 스스로 확증할 때이다.[각주:2]


The Apostle Paul


마지막으로 스피노자는 보편 종교는 복종을 목적하기 때문에 그 교리가 매우 단순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철학과 신앙에 대해 마지막으로 “이성의 지도에 따라 덕성을 체득할 수 있는 사람은 인류 전체의 숫자에 비해 대단히 적은 소수의 사람인 반면 대부분의 사람은 이성의 도움 없이도 신에게 순종할 수 있기 때문이다.”(p289)고 말한다.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자주 고귀한 것은 드물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태만과 게으름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성으로 노력한다면 유덕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한다. 순간 순간 공통 개념을 형성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고. 하지만 방금 인용한 표현만 보자면,  기하학적 증명의 방식으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안한 <에티카>는 세계에서 ‘소수의 엘리트’들만 가능하다. 스피노자는 무엇을 말하려고 했던 것일까.

스피노자가 성서에 대해 증명했던 것 그대로 그의 책을 봐야할 것 같다. <에티카>와 <신학정치론> 전체의 일반적인 원리를 파악하고, 거기에서 벗어난 것들은 비유적인거나 맥락으로 판단해야 한다. 그가 바랐던 세상은 전쟁과 질투, 증오와 멸시가 없는 삶이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이런 세계는 초인적인 노력이 아니라 일상의 자연을 관찰하고,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여 주의를 기울인다면 가능하다. 이렇게 본다면 <신학정치론> 13, 14장에서 스피노자가 강조하고자 한 것은 당시에 미신적 광신으로 판단력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이성적 판단력을 가질 것을 설득하는 것이다. 그래서 스피노자 스스로가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13, 14장이라고 말하고, 특별히 “심사숙고하는 노고 아끼지 말”아 달라고 말했던 것이다.


2017. 04. 14


  1. 인용한 성서 자체만 보더라도 스피노자의 주장은 모순적이다. 성서는 계명을 인식하는 것만으로 신앙이 아니고 그 신앙이 행위로 드러나야 한다고 말한다. 어떻게 이것을 철학(진리)과 신앙(복종)의 이분법의 증거로 볼 수 있을까. [본문으로]
  2. 이 부분은 푸코가 <주체의 해석학>에서 이야기했던 자기 인식과 자기 배려의 차이와 연결해 보면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푸코 역시 데카르트적인 자기 인식으로는 진리와 주체가 아무런 연관을 갖지 못한다고 말한다. 푸코가 주장하는 자기 배려는 주체가 진실에 다가가면서 주체의 변화를 필수적으로 요청한다. 그렇기에 자기 배려를 통한 주체 생성이 가능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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