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이란 사실 매우 모순적이다. 우리가 어떤 교육과정을 배우겠다고 정할 때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먼저 가치판단이 들어간다. "이걸 배우면 매우 도움이 되겠는걸!" 하지만 뭔가를 배우고자 한다는 사실은 내가 그것에 대해서 잘 모른다는 말이다. 모르기 때문에 배우는데, 배우기 전에 그 가치를 판단한다?
그럼, 배울 수 없다는 말일까? 사실 배움은 "잘 모르겠지만 해 보겠습니다"라고 할 때 일어난다. 내가 문탁네트워크에서 공부할 때마다, 그곳에서 '마을교사아카데미'를 마치면서 했던 말이 바로 이것이다. 생각해 보면 내게 배움은 그렇게 일어났다. 이걸 내가 왜 배워야할까? 아무런 도움(이익)이 되지 않을 것 같은데... 하지만 친구가 하자고 하니 그냥 해보자. 혹은 (신뢰하는) 선생님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하라고 하니 해보자고 하니 하자. 이렇게 내가 그 교육과정 혹은 세미나에 대해서 거의 전적으로 가치판단을 할 수 없었을 때 진짜 배움이 일어났다.
그런데 요즘엔 이런 방식으로의 배움은 매우 낯설고, 친구를 믿고서 혹은 스승(?)을 믿고서 배워보는 배움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금은 모두가 '소비주체'로서 교육을 '상품'으로 보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어릴 적부터 상품 소비에 익숙해진 아이들 그리고 그렇게 배우면서 자라난 성인들은 모두 상품 소비의 전문가(?)가 되었다. 가격에 해당하는 가치 혹은 그보다 더 큰 가치를 주는 것을 사는 것이 현명한, 합리적인 소비행위이다.(라고 생각한다.) 이런 친구들이 학생이 되면, 교육과정도 하나의 '상품'이 되어 버린다. 학생은 얼마나 좋은 상품(교육)인지 설명해보라는 소비자의 위치에 서게 되고, 선생님은 이제 교육외판원이 되어버린다. -.-;
여기에 앞서 이야기했던 모순이 생긴다. 대부분 자신이 사는 물품의 가치를 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가격에 구매하는 것이다. 하지만 교육은 자신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배우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설명한다고 하더라도 배우고자 하는 사람은 그 가치를 알 수 없다. 소림사 영화에서 무림 고수가 되기 위해서 스승을 찾아갔던 제자를 생각해보자. 그 제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무술이라곤 하나도 배우지 않았다. 물을 길어나르고, 청소를 하며, 빨래를 짜고, 벌을 섰을 뿐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제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고수'가 되어 있지 않던가. 그에게 무술 교육은 언제 일어난 것일까?
2017 파지스쿨을 앞두고 '마을교육포럼'을 진행했는데, 많은 분들의 질문에서 이런 답답함을 느꼈다. 배움은 언제 일어나는가? 파지스쿨에서 마을교사와 학생은 동등하다는데 결국은 마을교사가 가르치는 것이 아닌가? 소크라테스식으로 말해서 지식이란 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결국은 스스로가 깨달은 때에야 배움이 일어난다. 그리고 이런 배움은 스스로의 존재를 바꾸어 버린다. 배움이란 자신의 존재형태를 바꾸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런 배움은 어느 한 순간에 일어나지 않고, 삶의 양식을 통해서 드러날 뿐이다. 파지스쿨의 배움은 화/목요일 이틀, 4블럭의 세미나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 외의 시간들 속에서, 공동체적 삶을 통해서 드러날 뿐이다. 왜 이걸 여기에 적고 있는 것이지. ㅎㅎ
우치다 타츠루의 <하류지향>을 읽으면서 인상적인 부분을 적어보려고 했는데, 한탄 섞인 넋두리가 된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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