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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

사적 소유의 실질적 지양으로서 꼬뮤니즘 (How to read 마르크스)

by 홍차영차 2016. 3. 15.

사적 소유의 실질적 지양으로서 꼬뮤니즘

<How to read 마르크스>



인간의 자기소외로서의, 사적 소유의 실질적 자양으로서의 코뮤니즘, 그러므로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인간적 본질의 현실적 전유로서의 코뮤니즘 (…) 지금가지의 발전의 부 전체 내부에서 생성된 귀환으로서의 코뮤니즘. 이러한 코뮤니즘은 완성된 자연주의=인간주의, 완성된 인간주의=자연주의로 존재한다. <경제학 철학 초고>, 1844, 마르크스


<자본>을 왜 읽을 것인가, 마르크스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라는 문제는 마르크스 사전 세미나를 하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되는 질문이다. <평전>을 읽으면서는 마르크스의 삶 자체가 실제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와 관련없이 자본주의에 대한 ‘이론’만을 생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두 가지 점에서 마르크스를 그리고 <자본>을 더  잘 읽고 싶다. 

먼저 마르크스 본인은 노동자로서의 삶을 살지 않고 자본주의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비판을 이루었다. 피터 오스본은 마르크스를 ‘19세기 유럽 자본주의의 유일무이한 사상가’라고 부르지 않았던가. 어떻게 그는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삶을 누구보다도 더 철저하게 과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었을까? 마르크스가 섰던 그 자리에 서서 <자본>을 읽고 싶다. 그리고 그가 정의한 개념들, <자본> 및 그의 초기 저작들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이 지금 내가 이해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점. 마르크스는 분명 자본주의 사회를 하나의 구조로 설명하고 있지만 자본주의 이후에 대해서는 열려진 사고가 가능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포이어바흐에 관하여>에서 보여준 것처럼 그 형식에서는 완전하지만, 의미상으로는 완성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즉 마르크스가 바라본 시점에서 그의 개념들 특히 사적 소유, 임금노동을 조금 더 구체적을 생각해보면서 코뮤니즘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다.



칼 마르크스 (1818~1883)



부정어법으로 정의된 코뮤니즘

우선적으로 마르크스는 ‘사적 소유의 실질적 지양’으로 코뮤니즘을 정의한다. 즉 코뮤니즘이란 이것이다라고 말하지 않고 자신이 언급한 부정적인 측면, 특히 사적 소유의 철폐란 측면에서 코뮤니즘을 정의한다. 이렇게 정의하게 될 때는 명확한 테두리를 만들 수 없기에 어디로 가야할 지 길을 잃을 수도 있다. 하지만 반대로 이는 그가 말한 ‘사적 소유의 실질적 지양’이 어떤 방식으로 우리들 삶에서 펼쳐질 수 있는지가 급진적으로 생각되지만 아주 단순한 방식으로 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마르크스는 사적 소유로 인해서 발생되는 소외를 4가지로 규정하고 있다. 1) 노동 생산물의 소외 2) 활동 자체의 소외. 3) 인간의 유類적 존재에 대한 참여로부터 소외. 4) 인간 상호적 소외. 먼저 사적 소유의 지양이라는 것을 물질적이고 양적인 균등 분배로 보지 않고, 조야한 코뮤니즘이 아니라, 4가지 소외의 지양으로 보는것으로부터 출발할 수 있을 듯 하다. 이 중에서 노동 생산물의 소외나 노동 자체에서 소외된다는 부분은 지금 우리 실생활에서 많이 나타나는 바이고, 이런 점에 대한 지양이 ‘투쟁’으로 나타난다. 여기에서는 마르크스가 3번째 소외로 언급한 유적 존재에 대한 참여로의 소외의 지양은 어떻게 가능할지 생각해보려고 한다.

마르크스가 볼 때 인간은 노동하는 존재이다. 즉 노동 자체가 인간 보편성의 원천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런 (경제적 의미에서) 노동이 인간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회적 관계와 자연적 인간으로 실존해야 한다는 점을 이어준다고 말한다.

먼저 노동 그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에 많이 오염되어 있어서, 노동이란 말이 곧바로 ‘임금노동’으로 떠오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인간을 다른 동물들과 구별하는 것은 노동한다는 것, 자신의 생활수단을 스스로 생산한다는 점으로 정의했다. 그렇다면 노동은 인간으로서 인간의 인간됨을 보여줄 수 있는 가장 본질적인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 소외의 지양은 어떻게 가능할까?


노동하는, 활동중인 존재로서의 인간

지금 내가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 내가 노동하는 존재인가에 대한 질문이 생긴다. 그리고 조금 더 나아가서 노동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까지 의문이 발생한다. 마르크스의 정의를 근본적으로 생각해 볼때, 우리는 우리의 생활수단을 생산하고 있느냐는 말이다. 너무 원시적이고, 복고적인 생각이라고 나무랄수도 있다. 하지만 바로 그점이 우리가 회복해야 할 부분이지 않을까. 즉 인간으로서 자연적 생명을 지속하는 신체적 능력과 삶을 이어갈 수 있는 의지를 회복하는 것. 너무 뭉툭한가?

내가 생각하기에 노동하는 존재의 경제적 측면이 마르크스가 말하는 사회적 관계와 자연적 관계를 회복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것이 중요하다. 아무리 많은 소비와 생산이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자연적 인간으로서 내가 형성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 신체적으로 주어진 걷고 뛰고, 말하고 듣는 능력의 회복이 중요한 것 같다.

다른 한 가지로 의지의 문제. 이는 내가 노동하는 것, 활동하는 것이 얼마나 고립되지 않고 사회적 관계를 더 원활하게 생산할 수 있는지에 달려있다. 내가 더 많이 생산하는 것이 우리의 관계를 망가뜨리는지, 그리고 내가 소비하는 방식이 사회적 관계에 더 많은 위계를 생산하는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결국 노동하고, 활동하는 존재라는 것은 정해진 답을 좇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상태라기보다는 방금 언급한 신체적 능력과 의지적 측면이 관계와 역동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중이라는 지속이 중요하지 않을까.


마르크스에 관한 단 두 권의 책을 읽었지만, 그가 해체해 놓은 자본주의를 통해서 뭔가를 발견할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든다. 아니 사고의 한 부분이 열린듯한. 희미하고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는 것 같지만 계속 걷다보면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젖어드는 얕은 안개. 먼저 마르크스가 말하는 자본의 정체를 파악하여, 지금 이 시점까지 진보해온 어떤 것도 배제하지 않으면서 안개 그 자체가 우리에게 축복이 될 수 있기를 시도하고 싶다.


2016. 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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