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그리스/플라톤

현재의 기획자, 플라톤 2

by 홍차영차 2015. 12. 4.

현재의 기획자(Praxis), 플라톤 2/2

- 부제 : 플라톤 <국가>를 변론하다 -







공동체 실험, 아카데메이아

플라톤이 시라쿠사 여행에서 돌아온 후 집중한 것은 교육을 통한 철학자 정치가 양성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테네로 돌아온 지 2년만인 기원전 385년에 아카데메이아를 설립하게 됩니다. 그는 단지 이론적인 수업만 진행한 것은 아닙니다. 플라톤은 아카데메이아를 공동체로 생각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소박한 음식을 통한 공동식사 그리고 대화법을 위주로 하는 교육을 통해 철학적 동지 양성에 전력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Plato's Academia mosaic from Pompeii

 

철학(덕)의 공유는 플라톤이 구상하는 <국가>의 실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이를 위해서 그는 철학적 동지들이 필요했습니다. 또한 플라톤은 아테네와 시라쿠사의 경험을 통해서 철학적 동지들이란 몇 마디 말이나 글 혹은 지식의 전달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함께 생활하는 공동체 속에서, 오랜 기간의 교유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공동체 혹은 철학적 동지에 대한 플라톤의 태도는 두 번째 시라쿠사 여행과 디온이 시라쿠사를 해방시킨 사건에서 도드라지게 나타납니다. 첫번째 시라쿠사 여행 이후 플라톤과 디온은 서신 연락을 하면서 교유를 지속하고 있었는데, 기원전 367년에 디오뉘시오스 1세가 죽은 후 디온은 시라쿠사로 와 줄 것을 플라톤에게 강력하게 요청했습니다. 디오뉘시오스 1세가 죽자 그의 젊은 아들 디오뉘시오스 2세가 참주 자리를 이어 받게 되었는데, 디온은 그가 플라톤의 철학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디온은 “한 사람만 충분히 훈련되면” 나라가 제대로 설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라고 생각했고, 디온의 간곡한 부탁을 받고 플라톤은 2번째 시칠리아 여행을 가게 되었습니다. 

플라톤이 시라쿠사로 다시 여행을 가게된 것은 단지 디온의 간청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플라톤은 기원전 387년 이후 아카데메이아에서 철학자 왕정을 20년 이상 지속해서 주장하고 교육했는데, 그것을 구현할 수 있는 기회를 거부한다는 것 자체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플라톤은 철학에 대한 비난을 일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직접 가서 철인왕에 대한 현실 정치 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시라쿠사의 상황은 좋지 않았습니다. 철학적 조예가 깊은 디온이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젊은 참주 디오뉘시오스 2세 주변에는 온갖 중상모략꾼들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디오뉘시오스 2세는 점점 커지는 디온의 권력에 두려움을 느꼈고, 드디어는 플라톤이 온지 4개월만에 모반에 대한 누명을 씌워 디온을 추방시키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디온이 플라톤의 시라쿠사행을 권할 때, 그가 한 말은 디오뉘시오스 2세가 철학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디오뉘오스 2세는 플라톤이 디온의 추방 이후에도 상관 없이 계속 있어주기 원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관심은 ‘철학’에 대한 관심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철학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은 ‘보여주기’를 원했습니다. 그가 필요했던 것은 플라톤의 명성을 통한 명분이었습니다.

이후 기원전 361년에 세번째로 플라톤이 시라쿠사를 방문하기는 하지만 디오뉘시오스 2세의 태도는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철학하기’를 시도하기 보다는, 철학하는 ‘척’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디온과의 관계는 점점 더 나빠지고 결국 디온은 자신과 동조하는 동지들과 연합하여 무력으로 시라쿠사를 참주에게서 해방시키게 됩니다. 이 때 플라톤이 디온에게 해준 말 역시 공동체, 철학적 동지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플라톤은 처음부터 정치체계를 변혁시키기 위해서 폭력을 쓰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벌어진 일에 대해서 플라톤은 디온에게 최선의 조언을 해주기를 원했습니다. 다시 말해 좋은 정치는 철학(덕)이 공유될 때에만 가능하고, 이는 물리적인 전쟁보다도 더 큰 싸움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지금 디온에게 필요한 것은 철학적 동지라는 것을. 현재 함께 하고 있는 동지들은 의기로 뭉쳤을 뿐이라고 조언해 주었습니다. 결국 디온은 최선을 다해서 시라쿠사의 해방을 위해 노력했지만, 자신이 동지라고 신뢰하던 칼리포스에 의해서 죽게 됩니다. 디온과 함께 했던 동지들 중 어느 누구도 설득으로건, 가르침으로건, 환대로건, 친분으로건 간에 통치의 협력자로 아무리 바꾸어 놓으려고 해도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당신이 돌봄을 베풀 줄 아는 정신이 적정선에 못 미치는 사람으로 비치고 있다는 것도 유념하세요. 그러니까 성과를 얻어 내는 것도 사람들을 만족시킴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 반면에 완고하면 고립되기 딱 알맞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제4편지> 321c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는 단순한 철학 학교가 아니었습니다. 그곳에서는 수업이 아니라 ‘생활’이 일어나는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플라톤은 아카데메이아라는 공동체에서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한 사람, 한 사람이 스스로 깨우쳐 공유하기를 지극으로 시도했던 것입니다.


철인왕 통치에서 법치로

플라톤은 <국가>를 쓰면서 최선의 법으로서 ‘철인왕’을 내세웠습니다. 철학자 통치자를 비롯하여 모두가 각자가 자신의 성향에 따라 살아가는 이상적인 국가를 플라톤은 제안했습니다. 그러면서 아카데메이아에서  <국가>의 실현을 위한 공동체를 시도했습니다. 특히 플라톤이 구상한 <국가>에서 소문, 평판(doxa), 여론은 올바른 결정을 하는데 혼란을 일으키는 요소로 간주되었습니다. 하지만 시라쿠사에서 시도했던 두 번에 걸친 현실정치 참여는 플라톤으로 하여금 소문(doxa)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갖게 했습니다.


펠로폰네소스전쟁(기원전 431~404) 당시의 상황 : 시칠리아 동쪽에 시라쿠사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디오뉘시오스 2세를 처음 만났을 때 시라쿠사에서는 참주에 의해서 ‘플라톤이 죽임을 당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고, ‘디오뉘시오스가 플라톤을 끔직이도 따른다’는 정반대의 소문이 퍼지기도 했습니다. 앞서 말했던 대로 디온이 추방당했던 이유 역시 ‘플라톤과 디온이 모반을 꾀하는 자들이다’는 말들 때문이었으며, 디온이 참주로부터 시라쿠사를 해방시켰을 때에도 ‘디온 스스로가 참주가 되려는 음모를 꾸민다’는 중상모략을 들어야 했습니다. 디온의 죽음 역시 이런 방종에 젖은 시민들의 여론때문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디온과 아르퀴타스의 강권에 못이겨 세번째 여행을 할 때, 플라톤이 시라쿠사에 처음으로 도착해서 한 일 역시 ‘디오뉘시오스가 철학에 심취한고 있다’는 소문의 실체를 파악하는 일이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소크라테스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것도 소문과 그에 따른 여론 때문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플라톤은 시라쿠사 정치참여의 참담한 실패 그리고 디온의 죽음을 통해서 <국가>에서 내놓았던 해답과는 다른 시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철인왕이라는 최고의 법이 주변의 모략꾼과 철학적 동지들이 없는 환경에서 자랄 수 없다는 것을 명확히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기원전 360년 노령으로 접어들고 있는 플라톤이 시라쿠사 여행을 마치고 나서 쓴 책들을 보면 이런 그의 고민들이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플라톤은 이제 ‘철인왕’ 체제가 아니라 ‘법률’을 통한 통치를 제안하게 됩니다. 


그랬기에 그토록 여러 세대에 걸쳐 그 왕권이 좋은 명성을 갖고 유지될 수 있었던 겁니다. 참주인 사람들이 법들을 지배하는 왕이 된 것이 아니라, 법이 사람들을 지배하는 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제8편지> 354c

이제 한쪽 사람들에게는 자유가 생기게 하되 왕의 권력과 함께 성립하는 자유가 되게 하고, 다른 쪽 사람들에게는 권력이 생기게 하되 법의 지배를 받는 왕의 권력이 되게 합시다. 어떤 불법적인 일을 하는 경우에는 다른 시민들만이 아니라 왕들 자신까지도 법들의 절대적 지배를 받게 하면서 말입니다. <제8편지> 355e


<제8편지>에서 플라톤이 제안하는 정치 체제는 이런 변화의 실마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참주정과 민주파들이 끊임없이 싸우고 있는 혼란스러운 시라쿠사에 플라톤은 위의 인용과 같은 조언을 해줍니다. 플라톤이 이 제안에 대해서 ‘기도’한다고 말했는데, 그 제안이 실현되기는 어렵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플라톤은 이렇게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최선의 방안을 마련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아주 현실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정치철학

앞에서 거듭해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는 <국가>라는 저작을, 플라톤 철학을 ‘아카데메이아’라는 학교를 운영하면서 오로지 이론 수립만을 위해서 만들어 낸 것으로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플라톤 철학은 스스로가 젊었을 때부터 겪었던 아테네의 정치와 디온을 만난 후 시도했던 정치적인 시도들을 모두 겪고 난 후에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나름의 현실적인 대답이었습니다. 이데아가 너무나 이상적인 것이 아닌지 실존하는 것인지를 묻는 사람들이 있고, 철인왕이라는 이름 자체가 전제정치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결코 현실과 괴리된 생각이 아니라 당시의 아테네와 그리스 전체가 겪고 있는 현실에 대한 최선의 대답이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현실에서 한 치의 발도 빼지 않고, 그대로의 현실을 받아들인 결과가 바로 <국가>입니다. 지금 우리가 할 것도 바로 이런 태도가 아닐까요. 현실이 ‘지옥’이라고 해서 외면해서는 안됩니다. 즉각적이거나 단번에 무엇인가를 바꿀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맞이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과연 이 현실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고민을 멈추지 않는 것이 필요할뿐입니다. 우선은 “최대한 어떻게든 스스로가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있도록, 그리하여 믿을만한 친구와 동지들을 얻을 수 있도록 일상의 삶(생활)”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2015. 11.23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