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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플라톤

[그리스철학] 옳고 그름, 법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

by 홍차영차 2015. 6. 16.

옳고 그름(경건함), 법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

- 플라톤 대화편 <에우튀프론> -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인 <에우튀프론>은 소크라테스가 사형 선고를 받은 기원전 399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대화의 주제는 ‘경건함이란 무엇인가’이지만 플라톤은 이 대화편을 통해서 소크라테스가 사형 선고를 받은 ‘불경죄’라는 것이 얼마나 근거 없는 것인지 그리고 그 재판이 얼마나 상황에 대한 고려 없이 진행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불경한 것’과 ‘경건한 것’을 어떻게 단칼로 잘라서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누가 경건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판단할 수 있단 말인가.





세 가지 불경건과 앎(episteme)

<에우튀프론>에는 총 세 가지 불경건(不敬虔)의 문제가 나타난다. 첫째는 <변론>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는 소크라테스의 불경건이다. 소크라테스는 신들에 대한 불경죄와 그로 인해서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는 이유로 고소당했다. 구체적으로는 소크라테스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때 영적인 것들이 수시로 자신에게 나타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와는 반대로 에우튀프론은 자신의 아버지를 불경건하다는 이유로 고소하는 입장에 있었다. 에우튀프론의 농장에서 일하던 한 사람이 노예에게 화가 나서 참지 못하고, 술에 취한 채로 노예의 목을 베어버린 사건이 발생했다. 에우튀프론의 아버지는 이 살인자를 어떻게 처리해야할지 묻기 위해 아테네로 사람을 보냈는데, 보낸 사람이 돌아오기 전에 굶주림과 추위, 포승으로 인해 그만 살인자가 죽어버렸다. 에우튀프론은  고의가 아니더라도 정당한 절차를 통하지 않고 누군가를 죽게 만든 것은 불경하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에우튀프론의 친족들과 마을 사람들은 에우튀프론에 대한 불경건하다고 비난을 퍼부었다. 아들이 아버지를 고소한다는 것 자체가 불경하다는 생각때문이었다.


1. 멜레토스   — 신들에 대한 불경죄 —>    소크라테스 (법적 해석)

2. 에우튀프론   — 죽음에 대한 독기 —>    아버지 (법적 해석)

3. 친척들   — 친족에 대한 불경 —>   에우튀프론  (관습적 해석)


여기서는 특히 멜레토스과 소크라테스, 에우튀프론과 아버지의 경우를 평행적으로 이야기해보고 싶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불경죄로 고소한 시인 멜레토스 언급하면서, 에우튀프론의 경건함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멜레토스에 맞서고 싶다면서 에우튀프론의 ‘경건론’을 듣고 싶어했다. 즉 에우튀프론이 아버지를 고소할 정도로 ‘경건한 것’과 ‘불경한 것’을 확실히 알고 있는 종교적 예언가라고 한다면, 에우튀프론의 논리를 가지고 자신의 ‘불경죄’를 풀 수 있다고 말하면서.  하지만 정작  ‘경건한 것이란 무엇인가’의 문제를 파고내려갈수록 에우튀프론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경건한 것에 대한 첫번째 정의로 에우튀프론 살인이나 성물(聖物)절취를 하지 않는 것 등의 사례를 열거했다. 당연히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경건의 사례가 아니라 사례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경건' 그 자체의 정의를 요청했다. 그는 이어서 모든 신들의 사랑을 받는 것경건함이라 올바름의 한 부분이고 여기서 올바름의 부분이란 섬김과 관계있다고 두번째와 세번째 정의를 제시한다. 소크라테스의 계속되는 반론에 그는 마지막으로 경건함이란 신들에 대한 섬김인데 그것은 바로 신들에게 재물을 바치고 기원을 하는 일종의 지식(episteme)라고 정의한다. 하지만 신들에게 하는 요청과 바치는 것에 대한 지식은 결국 신들에게 사랑받는다는 두번째 정의로 돌아가게 되면서 대화는 끝이난다. 친족들이 아버지를 고소한 자신을 미쳤다고 비난함에도 불구하고, 경건함에 대해서 우월한 자신감으로 차 있던 에우튀프론은 점점 더 말이 사라지게 된다.

소크라테스와 에우튀프론은 대화는 미궁에 빠졌지만 경건에 대한 기반에 앎(episteme)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그 앎은 계속적인 자기 성찰과 연관되어 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경건의 두번째 정의인 경건함이란 모든 신들에게 사랑받는 것이라는 주장에서 이런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 같다. 텍스트 자체에서 소크라테스가 즉각 반론했듯이 이는 명확한 정의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경건함이란 모든 신들이 사랑을 하기 때문에 경건한 것인지, 경건하기 때문에 사랑을 받는 것인지의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경건하기 때문에 신들이 사랑한다면 정의 자체-경건함이란 모든 신들에게 사랑받는 것-와 모순되고, 모든 신들이 사랑하기 때문에 경건하다면 신들이 사랑하는 것은 무언인가의 문제가 다시 발생하기 때문이다. 신들에게 재물을 바치고 기원을 하는 일종의 앎이라는 네번째 역시 소크라테스가 생각하는 ‘덕(arete)은 지식(episteme)이다’는 말을 떠오르게 한다.


관습으로의 경건과 법으로서의 경건

사실 대화의 처음부터 경건론에 대한 대화는 딜레마에 빠져있었다. 에우튀프론이 아버지를 고소한 이유가 정당하다면 에우튀프론이 장담한 것과는 반대로 소크라테스는 유죄를 받아야 한다. 반대로 그가 아버지를 고소한 것이 잘못이라면 즉, ‘불경건’에 대해서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면 에우튀프론의 ‘경건론’을 가지고 자신을 변론하겠다는 소크라테스의 시도는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에우튀프론이 아버지를 고소한 이유를 살펴보자.

에우튀프론이 아버지를 고소한 것은 ‘아버지가 사람을 죽게 만들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가 보기에 어떤 경우에서건 ‘죽음’에 대한 독기(miasma)는 해소되어야 하는 것이다. 어떤 과정을 통해서 사건이 발생했는지, 또 왜 발생했는지는 그에게 있어 전혀 고려할 대상이 아니다. 그가 보기에 고소 대상이 ‘아버지’라는 것 역시 고려하면 안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에우튀프론은 불경건의 문제를 너무나 교리(법)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소크라테스를 고소한 멜레토스는 에우튀프론과 마찬가지로 마땅한 일을 한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예언자로서 종교에 일가견을 갖고 있던 에우튀프론은 대화 초반부에 소크라테스에게 고소의 이유를 이렇게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소크라테스가 사람들에게 말할 때 기존의 관습과는 다른 새로운 것들을 이야기 하는데, 이것은 자신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 수시로 자신에게 나타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라는 것. 이런 고백은 신성의 관점으로 보면 당연히 가장 불경건한 것이 아닐까. 에우튀프론이 아버지를 고소한 교리(법)적인 해석으로만 본다면 소크라테스의 재판은 너무나도 확실히 유죄가 된다.

두 사건의 고소는 모두 불경건의 문제를 너무나 교리적으로 해석했기 때문인 것 같다. 무언가를 명확하게 정의내리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일인데, 에우튀프론은 너무 쉽게 그 일을 해결하려는 것 같다.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그것에 대한 지속적인 앎과 관심일뿐인데. 에우튀프론은 종교 전문가로 자신의 아버지를 고소할 정도로 경건의 문제에 자신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불경건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내릴 수 없었다. 또한 소크라테스의 문제에서는 아버지를 고소한 사건과는 조금 다른 애정 깊은 시각을 보여주었다. 에우튀프론은 두 사건에 대해서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 다시 말해 그는 경건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무지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하고 있어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살짝 언급되었던 세번째 불경건 문제를 보자. 거기에서 중요한 것은 에우튀프론을 비난하는 친족들이다. 에우튀프론이 살인죄로 사람을 고소한 것은 ‘법적으로’ 올바른 일이다.  하지만 아들이 아버지를 고소한다는 것은 조금 더 고민이 필요한 지점이었다. 친족들이 비난했듯이 관습적으로 보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즉 친족들은 인간으로서 당연하게 해야 할 것들을 관습으로 판단하는 사람들을 보여주고 있다. 관습과 법 무엇이 우선된다고 확정할 수 없다. 관습이 사회적인 구속력을 갖게 될 경우 이는 ‘법’이 되고, 조직이 커질수록 관습보다는 법에 의지할 때가 많기는 하지만. 이 대화편은 다른 대화편에서도 계속 나오는 것처럼 ‘관습과 법에 대한 충돌’을 보여준다. <에우튀프론>이 결론을 보여주지 못하고 아포리아(aporia) 상태에 빠지면서 끝나는 것은 이런 이유때문인것 같다.


우리 나라 역시 요즘엔 모든 일들을 법적으로만 해석하고 판단하려고 한다. 인간적으로 말하고, 각각의 상황에 따라서 스스로 판단하던 시대는 지나버렸다. 결혼, 이혼뿐만 아니라 층간소음, 자동차, 앞 마당의 잔디밭까지도 이제는 스스로의 판단과 상호간의 대화를 통하기 보다는 ‘간단히’ 법을 통해서 말하려는 경향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 플라톤 역시 당시 판단하기 가장 까다롭다고 여겨지는 ‘경건함’에 대한 주제를 가지고 대화편을 쓴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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