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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스토리

라캉과 철학자들 - 반철학자로서 라캉

by 홍차영차 2024. 2. 18.

 

 

이 책을 읽다보면 왜 1960년대 이후의 철학들이 정신분석과 함께하게 됐는지 알 수 있다. 저자의 말을 따라가보면 푸코도 들뢰즈도 모두 '프로이트의 우수한 독자들'이었다. 물론 이들이 프로이트를 새롭게 발견하게 된 것은 모두 라캉이 '프로이트로의 회귀'를 주장하면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을 정신분석답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철학이란 삶의 지혜이고, 이 지혜란 다름 아닌 문자가 발명되면서부터 갖게 된 자기의식에 대한 지혜일 것이다. 즉 '내가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내가 알고 있다'는 자기의식을 갖는다는 말은 속마음과 행동 사이의 간극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떻게 보면 소크라테스는 이런 자기의식을 최초로 대면하면서(face to face) 이 문제에 대한 지혜를 최초로 구했던 사람, 철학자가 되었다.

다만 문자(알파벳)가 생기고 나서 이런 자기의식은 곧바로 걷기 시작한 것은 아니다. 거의 2000년 정도는 그 간극이 급격하게 크지 않았다. 12세기 텍스트(visual text)의 발명, 인쇄혁명, 그리고 데카르트로 이어지는 선언을 통해서 자기와 자기인식간의 간극은 넘을 수 없는 강이 되어버렸다.

1900년 니체의 죽음과 1900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출판은 상징적으로 이러한 변화를 보여준다. 이제 자기와 자기의식간의 간극은 되돌릴 수 없음을 보여준다. 또한 20세기 이후 이성과 의식에 대한 연구가 아니라 무의식에 대한 탐구가 삶을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기예가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니체가 이성과 의식에 대한 철저한 비판을 수행하면서 무의식을 언급했다면, 라캉은 프로이트로의 회귀를 부르짖으며 무의식의 실질적인 존재양식에 대해서 실천적으로 탐구했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반철학자로서의 니체와 라캉!

책에 나오는 아래의 내용을 보면 마치 니체가 ‘인간이란 자신에게 일어나는 충동을 그 자체로 전달할 수 없는 것을 자신의 독특성으로 갖고 있는 존재’라고 인간존재를 재정의했던 것을 이어받아서 프로이트 라캉이 좀 더 구체적이며 이론적이며 실천적으로 무의식적 주체를 탐구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실재계란 말하는 주체의 말이 부딪히는 한계, 혹은 그 말이 자아내는 개인의 역사의 기원(더 이상 거슬러 갈 수 없는 지점)이다. 라캉은 이러한 의미에서의 실재계를 정신분석이 트라우마라 불러왔다고 이야기한다. 아무리 해도 그에 대해 말할 수 없다는 불가능성이야말로 트라우마의 본질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이러한 불가능성에서 해방된 완전한 언어란 대체 무엇일까, 혹은 자신의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그것을 말할 수 있는 주체란 존재할 수 있을까. 정신분석은 아니라고 대답한다. 무언가에 대해 끊임없이 어긋나게 말하는 것, 아무리 해도 말할 수 없는 것을 마냥 껴안고 있는 것, 이는 말하는 모든 주체에게 동등하게 부여된 조건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말을 할 수 있게 된 바로 그때부터 구조적으로, 트라우마를 품고 있다는 뜻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의 트라우마는, 그리고 트라우마로부터 비롯된 증상은 꼭 정신분석이라는 영역에만 한정되지는 않는다."(구도 겐타 <라캉과 철학자들> 154쪽)

라캉을 반철학자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철학과 정신분석은 앎이 존재하는 방식에 있어서 근본적인 차이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것. 즉 철학은 언제든 삶에 대한 모든것을 알 수 있다는 욕망을 가지고 있는 반면에 정신분석을 그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그 너머에 있는 것을 탐구하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지금부터의 철학, 프로이트 이후의 철학은 당연히 무의식을 품을 수밖에 없다. 19세기까지 없는 것으로 무시하고 배제해왔던 무의식, 하지만 자신에게 점점 더 큰 영향력으로 다가오는 비대해져가는 무의식적 주체, 해결되지 않는 욕망들의 문제에 대한 해결이 없다면 철학 역시 무용하게 되지 않을까.

"라캉은 정신분석의 실천에 대한 물음을 철학 안에서, 그리고 철학자가 제기했던 물음을 정신분석 안에서 재발견한 것"이라고 봐야한다.

철학과 정신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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