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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문화와 문자문화

동트기 전 한 시간

by 홍차영차 2023. 11. 28.

몸에 새겨놓고 싶은 말이라 요즘 자주 자주 읽어보는 시인의 말.

친구의 소개로 읽게 되었는데 다른 사람들도 읽어보면 좋을 것 같아서. ^^

처음 읽어보는 일본 시인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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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고이케 마사요, 한성례 옮김, 『동트기 전 한 시간』, 포엠포엠,2014.)

 

 

언어 이전

‘언어란 작은 돌과 같아서’라고 쓰는 순간, 금방 작은 돌의 이미지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이렇듯 언어는 늘 ‘의미’를 동반한다.

의미를 가진 작은 돌을 몇 개 짜 맞춰서 무언가를 다른 사람에게 전달한다. 어디서나 굴러다니는 그 작은 돌은 나 혼자만의 소유가 아니다. 그렇기에 모두에게 의미가 전해진다. 전해진다는 것은 반드시 의미의 전달만을 뜻하지 않는다. 다른 뭔가가 옮겨졌다 해도 마찬가지다. 이렇듯 우리는 한낱 작은 돌로써 존재를 움직이는 것이다.

감탄사를 올리며 놀라서 뒤로 넘어지고 전율하고 감동하고 격하게 울음을 터트리기도 한다.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무엇이 옮겨졌을까.

그것은 언어가 아니라 생생한 파동이다. 그 파동에 휩쓸려 감정이 고조되거나 과거의 갖가지 기억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되살아나기도 한다.

여기서 잠시 ‘자연’에 관해 얘기하겠다. 내가 자연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한 건 마흔이 넘어서였다. 젊어서는 산이나 바다, 초목 등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고 별로 흥도 없었다. 어느 순간 스위치가 켜지더니 사계절의 변화와 자연이 가슴 깊이 스며들었다. 그 후로는 세상사나 섭리 등을 볼 때 자연을 잣대로 삼았다.

중년에 접어들어 자연에 몰입한 데는 사람에 대한 혐오나 염세주의와도 연관이 있었다. 인간이 싫어지는 이유는 서로가 말을 주고받으며 관계를 맺기 때문이다. 말이 자아를 상처투성이로 만든다. 듣는 사람은 물론이고 자신이 뱉은 말에 자신이 상처를 입기도 한다.

자연을 한번 돌아보라. 자연 속에는 말이 존재하지 않는다. 산과 바다, 강과 초목은 묵묵히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 말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말이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이러한 자연의 이치 속에 인간을 어루만져주고 위로해주는 심오한 비밀이 있다고 믿는다. 위로라는 말만으로는 부족하다. 온화하게 어루만져준다는 말도 약하다. 산과 바다가 존재한다는 압도적인 침묵이 우리의 생명을 지탱하고 단련시킨다. 이처럼 나는 자연을 신뢰한다.

예컨대 여름날 아침에 활짝 핀 나팔꽃 서너 송이를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기쁘다. 기쁘기 그지없다. 처음에는 이러한 내 감정이 혼란스러웠다. 다 늙은 사람처럼 왜 이럴까 하고 자책도 했다. 그런데도 싫지 않다. 싫어질 리도 없다. 휴대전화는 오래 들여다보기 힘들지만 나팔꽃은 얼마든지 오래 바라볼 수 있다. 생명은 변화하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어떠한 말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와 나팔꽃이라는 생명이 직접 인연을 맺을 뿐이다. 나만의 버릇일지 모르지만 세상을 살면서 이따금 이러한 느낌이 들 때면 그 경험을 말로 표현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다. 이때 말의 세계로 돌아오려면 언어라는 티켓이 필요하다.

말에 상처받으면서도 결국 말에 포위당하는 인간에게 말이 없는 세계는 필요불가결이다. 자연계가 주는 풍부한 위로는 인간이 살아가는 데 절대적인 요소이다. 나는 시를 쓰는 일로써 말이 있는 세계와 말이 없는 세계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서 그 두 세계가 서로를 비추는 모습을 관찰해왔다.

언어는 언어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러한 뿌리가 없다면 언어는 한낱 떠도는 기호에 불과하다.

작품을 읽고 무언가가 전해진다고 했을 때 무엇이 전해질까. 내용을 섬세하게 음미하다보면 다양한 범주의 정보들이 쌓여 마침내 ‘전해지는’ 결과를 낳는다. 말로는 표현하지 못하는 무언가가 의미의 표층 아래를 통과한다. 저쪽에서 이쪽으로.

시인 가와다 아야네씨의 시 「카사블랑카」에 다음과 같은 시구가 있다.

시라는 말만으로도

격정처럼

뭔가를 허문다

읽지 않아도 시가

전해져서

손에 잡히지 않는 현실적인 뭔가를

얻은 듯했다

‘시는 읽지 않아도 전해진다’는 뜻이다. 우선 시 속의 상황을 설명하겠다. 아마도 시를 쓴 본인이 ‘카사블랑카’라는 이름의 팩스 송수신 가게에서 일본으로 시를 보낸 듯하다. 방금 시를 보냈다고 설명하자 가게에 있던 모로코 사람의 눈이 파르르 떨리며 반짝인다. 일본어라서 읽지도 못하는 시를 앞에 두고 그 모로코 사람은 무언가를 느낀다. 그 무언가를 느끼는 모로코 사람을 보고 작가는 다시 무언가를 느낀다. ‘시’라고 말했을 뿐인데 그 말이 차례로 벽을 허물어 간다. 그 기이한 광경을 이 시 속에 에둘러 표현했다.

일상이라는 껍질을 깨고 멀리서 직접 찾아오기도 하고, 실제로 읽지 않아도 시가 전해진다. 두렵긴 해도 내게는 매우 현실감 있는 말이다. 작가 가와다 아야네 씨도 선명하고 또렷한 감촉이라서 ‘손에 잡히지 않는 현실적인 뭔가를 얻은 듯해다’라고 표현했으리라.

시가 전해진다는 말이 바로 이런 것이다. 그 과정에는 말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가 깊이 관여한다. 시가 전해질 때 말은 말이 존재하지 않는 바다에 한 번 내동댕이쳐진다. 그 충격으로 발생한 파동, 즉 파문이 말을 에워싸서 읽는 사람에게 전해준다. 말이 일으키는 그 진동까지 고스란히 시로 전해진다. 언어의 에로스는 여기에서 태어난다.

나는 말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넓은 의미의 자연계라고 본다. 그건 산이고 바다이며 숲이다. 나를 포함하여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곳은 물리적으로 가깝지 않을지라도 실제로는 가장 직접적으로 마음과 이어져 있다고 단정한다. 자연계를 바라볼 때 나는 무엇을 보는 걸까. 풍경인가 아니면 풍경을 보고 되살아난 기억에 흔들리는 그 내면일까.

가령 내가 산을 본다고 치자. 두둑하게 올라온 흙과 그 곡선에서 편안함 이상의 자극을 받는다. 흙으로 덮인 둥그런 언덕이라 하면 일본에서는 고분을 연상하고, 고분에서 묘지, 묘지에서 죽은 이의 존재를 연상한다. 왜 그럴까. 자연을 보고 어째서 죽은 사람이 떠오를까. 옛날 사람들도 그 언덕을 보았다고 여겨서일까? 그 풍경 속에 죽은 옛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들과 내가 이어져 있다는 감정이 자연스레 솟아난다. 요컨대 나 자신도 눈앞에 펼쳐진 자연의 한 부분이며 그러한 연속성의 일부라고 느껴진다.

바다는 산보다 더욱 생생하다.

최근 몇 년 동안 나는 여름이면 이즈반도로 떠났다. 수영도 못하고, 강렬한 햇볕에 피부는 새카맣게 타고, 소지품은 모래투성이이고, 수영복을 입은 모습은 못 봐줄 정도이다. 주위에서 뭐 하러 바다에 가느냐고 핀잔을 줄 만큼 고된 체험이다. 그래도 떠난다. 그건 바로 바다가 무서워서다. 바다가 무섭다는 감정이 너무나 또렷하고 신선해서다. 나는 어렸을 때도 바다가 무서웠다. 무서워서 울었고 물속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바다에 오면 근원으로 돌아왔음을 감지한다. 기쁘다거나 기분이 좋다는 여유로운 느낌이 아니라 무조건 무섭다. 세상에 태어나서 한 번도 와 본적 없는 곳을 밟는 듯한 두려움이다.

무엇보다 가장 무서운 건 해변이 아니라 먼 바다를 바라보며 파도를 기다리는 동안의 시간이다. 저 멀리에서 나를 집어삼킬 듯 파도가 밀려오고 물이랑은 높게 너울대며 거세진다. 부서지기 직전의 물마루는 뿔처럼 뽀족해진다. 그럴 때면 그 고비를 견디는 파도의 리듬에 맞춰서, 아직 부서지지 않아, 조금만 참아, 하는 마음으로 함께 이겨낸다. 그러다 보면 두려움 속에서 엄청난 쾌감이 찾아온다. 파도와 내가 하나로 합쳐지는 오르가슴과 같은 쾌감이다.

해변을 돌아보면 막 고비를 넘긴 파도가 하얗게 부서지며 길게 꼬리를 끄는 광경이 보인다. 한껏 늘어지는 모습은 여성이 오르가슴을 맛본 후의 완만한 하강선을 연상케 한다.

파도가 어디에서 어떻게 발생하는지 나는 잘 모른다. 아마도 지구의 자전, 바람의 강약과 방향 등의 영향을 받으리라. 파도라고 한 단어로 말은 하지만 그 높이와 크기가 저마다 다르고 간격과 리듬도 일정하지 않다. 그러나 그 요동과 불규칙이야말로 파도 본연의 모습이다. 그 파도에 열중할 때면 순간순간이 새롭다. 쉬지 않고 밀려드는 파도는 결코 똑같지 않다. 그렇기에 싫증이 나지 않는다. 파도도 나팔꽃처럼 영원히 바라봐도 싫증이 나지 않을 듯하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생명은 다 마찬가지이다.

나는 종종 파도의 이랑 사이에 몸을 띄우고 생각한다. 가장 처음 쓰인 ‘시’는 여기에서 태어나지 않았을까. 시의 파동이 시작된 근원지는 여기가 아닐까. 자연과 우리의 마음은 이어져 있다. 바다에서 떨어져 도시에서 살지만 나는 파도의 일렁임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시의 첫줄을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말은 아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지만 그 예감은 충분히 무르익었다. 그런 시간의 웅덩이가 언어의 해변으로 출렁이며 밀려든다. 해변에는 언어가 있었다. 해변은 언어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곳에는 사람이 있고 사람의 얼굴이 보인다. 눈과 입, 코. 아아, 의미가 있다. 말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가 파도가 되어 의미의 해변으로 수없이 밀어닥친다. 의미를 허물 듯이. 허물어뜨리듯이.

모두 허물어뜨리고 나면 의미의 해변도 파도에 침식되어 허무로 변할까? 그 고비를 견뎌내듯이 자연에서 언어를 받는다. 시를 쓸 때면 나는 틀림없이 파도가 밀려오는 바닷가를 걷고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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