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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조건으로서거짓

당신은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by 홍차영차 2023. 11. 26.

다들 이런 경험 한 두 번쯤 해보지 않았을까.

평소에 듣기 어려운 아주 낯선 단어나 말, 예를 들어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든다는 마부작침(磨斧作針)이 우연히 귀에 꽂혔는데 신기하게도 며칠 사이에 이 낯선 사자성어가 친구의 말, TV, 소설, 드라마를 통해서 자꾸만 나타날 때가 있다. 나한테는 지난 일주일이 그랬다.

 

 

꽤 오랫동안 문자와 언어가 가진 한계성에 대해서 허우적거리면서 절망감에 빠졌던 것 같다. 그래도 다행이었던 것은 인간이란 '자신의 충동을 있는 그대로 전할 수 없는 존재'라는 니체의 이야기에 위로를 받았고, 비존재와 죽음을 통해서 문자가 가진 딜레마를 너무나도 아름답고 적확하게 표현해준 모리스 블랑쇼의 세례를 받으면서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말은 나에게 존재를 주지만, 존재를 박탈당한 존재를 준다. 말은 이 존재의 부재이고, 존재의 무이며, 존재를 상실했을 때 존재에서 남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 사실일 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말한다는 것은 기이한 권리이다. 이 점에 관하여 휠덜린의 친구이자 동료였던 헤겔은 <정신현상학>에 앞선 글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아담이 동물들의 주인이 되게 하였던 최초의 행위는 동물들에게 이름을 부과하는 일이었다. 이를테면 그는 동물들은 (존재자로서의) 그들 실존 가운데서 소멸시켜버렸다." 헤겔이 의미하는 것은 이 순간 고양이는 그리하여 하나의 관념이 되기 위하여 유일하게 실재하는 고양이이기를 멈춘다는 사실이다."

모리스 블랑쇼 <카프카에서 카프카로> 1장 문학 그리고 죽음에의 권리 43쪽

 

이후의 마주친 거의 모든 텍스트 독해는 이러한 문자성의 한계로 읽혔고, 동시에 문자와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것은 없는 것이 아니라 잉여적이라는 다른 이름과 방식으로 존재하고 표현된다는 것을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스피노자도, 니체도, 들뢰즈도 이러한 관점에서 각각의 시대의 관점에서 표현된 문자성을 극복하기 위한 윤리학으로 보였다. 철학 텍스트뿐만이 아니다. 다양한 문학 작품뿐 아니라 음악, 미술, 영화까지도 모두 이런 관점에서 해석되기 시작했다.

문제를 인식했다는 것만으로 살아갈 힘이 되었다. 내가 이런 존재구나, 오로지 문자로 표현된 것, 측정 가능한 것만 존재한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오다가 사실 온 우주에서 문자화할 수 있는 것, 측정 가능한 영역이 얼마나 작은 부분인지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답답한 마음이 풀어졌다. 무의식에 대한 탐구 역시 여기에서 시작됐다. 프로이트가 밝혀낸 '의식은 인간 정신의 빙산의 일각'이라는 이야기가 이제는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예술구원론'이나 '생존욕구로서의 예술'이란 말을 하게 된 이유 역시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문자에 갇히게(?) 된 인간은 어떻게 자신 안에 있는 충동들, 무의식적인 자기를 표현하며 살아왔을까? 인간들은 문자를 갖게 되면서 집단이나 타자와 다른 독특한 자기 자신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지만 바로 그 순간부터 점점 더 문자 이외의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다행스럽게도 고대로부터 인간들은 시대마다 문자가 아닌 음악, 미술, 춤, 문학과 같은 예술로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을 발견했다는 사실이다. 특히 데카르트를 필두로 하는 과학혁명 이후에 근대적 주체들은 문자적 = 과학적 = 이성적 = 합리적 = 시각적(측정가능)으로 생각하면서 이전과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비문자적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놀라운 사실은 다른 한편에서는 이런 무능력을 회복하기 위해서 다양한 방식으로 예술이 폭발했다는 점이다. 회화, 클래식, 소설과 같은 장르와 그 변화들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근대 이전에는 예술이 삶의 부분이었기 때문에 따로 펼쳐낼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과학 혁명 이후에 사람들은 일상에서 문자로 표현되지 않는 세계를 믿지 않게 되었고, 무의식을 들여다보는 능력 또한 사라지면서 역설적으로 예술의 중요성을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산책을 하면서, 음악을 들으면서 또는 피아노를 치고, 글을 쓰면서 예술적 감각을 회복하고 있었다. 하지만 문자를 가졌다는 것이 결코 악(惡)은 아니라고, 예술을 보고 스스로 예술을 하면서 창조적, 생성의 삶을 살 수 있다고 글을 쓰고 이야기했지만 이런 작업은 적극적인 삶의 방식이라기보다는 더 이상 무너지지 않기 위한 몸부림처럼 느껴졌다. 너무나 감사하지만 문자화된 세계로부터 나를 보호하고 더 이상 망가지지 않게 하는 정도의 수비적인 방식처럼 느껴졌다.

 

 

 

뭔가 바뀌기 시작한 시점은 프루스트였던 것 같다.

첫번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으면서 처음으로 '내가 나로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지 생각해 보았다. 또한 이성적이고 의식적인 생각도 중요하지만 내 안에 있는 무의식의 방대함과 차이에 대해서 체감했다. 오로지 이성의 얼굴만 보고 판단했던 것처럼 나는 나를 오로지 무의식의 표면인 의식만 보고서 판단했구나. 살짝이지만 내 안에 있는 무의식이 타자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과 무한에 가까운 무의식의 크기와 질적 차이를 보면서 뭔가 긍적적이고 생성하는 삶을 볼 수 있었다. 프루스트를 꼬박 일년동안 읽었는데, 더 읽고 싶어졌다. 더 깊게 읽고 싶었고, 그냥 스쳐지나갔던 아직 발견하지 못한 보물들을 이제는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프루스트를 두번째 읽고부터는 자주 이런 이야기를 했다. "시를 읽고 싶어졌어요. 평생 시를 쓰고 싶었던 적이 없었는데 자꾸만 시를 읽고 시를 써보고 싶은 욕망이 올라오네요." 피아노를 쳤던 것도 매일 매일 산책했던 것도 사실은 의식적인 처방이었다. 잃어버린 감각을 회복하려는 시도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프루스트를 한 번 읽고, 또 다시 읽으면서 내 안 저 밑바닥에 있던 무의식들이 움직이고 소용돌이치면서 새로운 욕망, 잠재성으로만 갖고 있던 욕망들이 올아왔다. 예전이었다면 시를 읽는다는 것도 그렇고 시를 쓴다는 생각만으로도 손이 오그라들고 뭔가 부끄러운 느낌이었다. 무엇이 바뀐 거지?

 

 

나는 종종 파도의 이랑 사이에 몸을 띄우고 생각한다. 가장 처음 쓰인 ‘시’는 여기에서 태어나지 않았을까. 시의 파동이 시작된 근원지는 여기가 아닐까. 자연과 우리의 마음은 이어져 있다. 바다에서 떨어져 도시에서 살지만 나는 파도의 일렁임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시의 첫줄을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말은 아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지만 그 예감은 충분히 무르익었다. 그런 시간의 웅덩이가 언어의 해변으로 출렁이며 밀려든다. 해변에는 언어가 있었다. 해변은 언어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곳에는 사람이 있고 사람의 얼굴이 보인다. 눈과 입, 코. 아아, 의미가 있다. 말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가 파도가 되어 의미의 해변으로 수없이 밀어닥친다. 의미를 허물 듯이. 허물어뜨리듯이.

모두 허물어뜨리고 나면 의미의 해변도 파도에 침식되어 허무로 변할까? 그 고비를 견뎌내듯이 자연에서 언어를 받는다. 시를 쓸 때면 나는 틀림없이 파도가 밀려오는 바닷가를 걷고 있으리라.

고이케 마사요 <동트기 전 한 시간> 시인의 말 中

 

그렇게 프루스트를 읽고, 산책도 하고, 시를 읽고 낭송도 하다가 마주친 것이 바로 (아뮤님이 올려준) 고이케 마사요 시인의 말이었다. "언어는 언어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말에서부터 금이 가기 시작했다. 나는 줄곧 문자(언어)를 갖게 되면서 겪게 된 어려움을 이야기하고 나를 보호할 방법만을 생각했는데, 시인은 언어로 이루어진 해변에서 언어[詩]만이 줄 수 있는 파동을 이야기한다. 이제 언어는 한계가 아니라 새로운 세계의 기원이 된다. 언어가 주는 파동은 다른 어떤 것도 대신할 수 없다. 자연 바깥의 인간이 아니라 자연 속의 인간을 보여준다. 의미를 만들면서도 허무에 빠지지 않는다. 시는 의미와 무의미의 견고한 경계를 한번에 허물어뜨린다. 온 우주에 오로지 인간만이 존재한다는 인간 중심주의가 아니라 언어를 가진 인간이 이 세계에, 온 우주에 줄 수 있는 또 다른 풍성함이 된다. 시인의 말은 프루스트의 말과 공명한다. 프루스트 역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마지막 편인 '되찾은 시간'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예술 덕분에 우리는 단 하나의 세계 우리만의 세계를 보는 대신 세계가 증식하는 걸 보며, 독창적인 예술가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 많은 세계를, 각각의 세계가 무한 속에 굴러가는 것보다 더 상이한 세계를 우리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고.

 

우연히 마주친 고이케 마사요의 이야기와 프루스트의 구절이 한동안 마음속에서 고요하게 움직이고[靜中動] 있었다. 고이케 마사요의 말을 읽은지 이틀 후였다. 큰 기대 없이 참석한 에세이 발표에서 금이 간 벽을 무너뜨리는 문장을 만났다.

2023년 양평에서 철학강의를 들었던 분들에게 세미나 방식의 공부를 제안했었다. 매번 다른 곳에서 강의를 할때마다 제안하지만 실제로 공부를 이어갔던 그룹들이 별로 많지 않았기에 별 큰 기대가 없었다. 신기하게도 9월부터 꼬박 3개월동안 세미나 방식으로 텍스트를 읽고 드디어 첫번째 글쓰기 마무리를 하게 되었다. 주제는 '공부와 좋은 삶'이었고, <데미안>, <김영민의 공부론>, <학교없는사회>, <무지한 스승>총 4권을 읽었다.

한 분이 헤세의 <데미안>과 <무지한 스승>을 중심으로 '폭력성'에 대한 글을 써오셨다. 철학강의 마지막에 강의 내용을 함축한 시(詩)를 써오셔서 놀라기도 했고,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스마트폰과 인터넷의 거의 사용하지 않는 모습에 어떤 글을 써오실지 궁금했었다.

 

보편적 가르침은 '인간은 서로 닮아 있는 존재라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너와 내가 다르지 않다는 굳건한 믿음은 곧 나도 느끼면 너도 느낄 수 있다는 평등함으로 발전한다. 보편적 가르침의 모든 실천은 하나의 질문으로 요약된다. 너는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건 우리 모두에게 동일한 지적 잠재성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만약 어떤 한 인간이 다른 인간보다 지적으로 우월하다고 가정한다면 그건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인간은 일평생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와 대화를 나누며 살아가야 한다는 이 끔찍한 비극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인가는 것이다.

무엇보다 보편적 가르침은 이성적 존재들 사이의 소통을 중요시한다. 인간의 지능은 앎을 비교하고 이해하는 능력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포괄적인 의미의 지능은 타인에게 자신을 이해시키는 능력을 말한다. 나와 타자 사이에 존재하는 생각을 언어라는 물질적 도구를 이용해 이해 가능한 표현과 이미지로 빚어내는 것이다. 생각은 이야기가 되고 그 이야기는 타자에 의해 번역 된다. 모든 말은 하나의 번역이라고 했다. 번역은 타자를 이해하려고 언어적 기호에 매달려 짐작하려는 의지다. "지능의 시중을 받는 의지로서의 인간"은 협력의 관계에 놓여 있다. 이야기하기와 짐작하기의 상호작용을 통해 생각은 어떤 형태로 창조된다.

위니 <보편적 가르침을 통해 바라본 인간의 폭력성> 양평철학스터디모임 - 사색과놀이, '공부와 좋은삶' 에세이 중

 

자크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은 사실 만만치 않은 텍스트다. 단편적으로 보면 19세기의 자코토라는 인물을 통해서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을 가르일 수 있다는 '무지한 스승'의 '보편적 가르침'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하지만 '보편적 가르침', '지능은 동등하다', '전체가 전체 안에 있다'라는 이야기들은 쉽게 해석되지 않는다. 당연히 인문학 텍스트를 처음 읽는 분들이, 게다가 세미나 방식으로 공부를 처음하는 분들이 어떤 글을 쓸지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인문학 공부를 시작한지 10년이 되어가면서 여러번 경험했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다시 이런 선입견을 버리지 못했던 것 같다.

"인간은 일평생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와 대화를 나누며 살아가야 한다는 이 끔찍한 비극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인가는 것이다." 처음에는 이 문장만을 보면서 크게 동감했다. 위니님도 나처럼 느끼셨구나. 위니님도 언어의 한계성에 절망했었구나라고. 나는 보고 싶은 것만 보았고, 내 생각에 동의하는 문장에만 크게 반응했다. 그런데 자세히 이 앞에 있는 문장을 보면서 깜짝 놀랐고, 또 나는 이런 사람이 아니라는 변명의 말들이 계속 새어나왔다. 앞에는 다음의 문장이 있었다. "만약 어떤 한 인간이 다른 인간보다 지적으로 우월하다고 가정한다면 그건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위니님 이야기대로 말을 한다는 것, 문자를 사용한다는 것은 풍부한 잉여의 배제로만 볼 수 없다. 반대로 문자란 '기호에 매달려' 타자를 이해하려는 몸부림이고, 나와 타자 사이에 뭉개뭉개 피어나는 생각들을 서로가 "이해 가능한 표현과 이미지로 빚어 내려는" 춤이자 기우제다. 위니님은 그러면서 인간의 폭력성은 소통의 단절에서 비롯된다고 말하고, 순간순간마다 마음 속에 물음표 하나를 기억하자고 말한다. "당신은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지난 몇 년동안 고민했던 문제들이, '삶의 조건으로서 거짓'이라고, 떼어낼래야 뗄 수 없는 딜레마라고 하면서 그렇게 힘들어하고 하소연했던 문제의 실마리가 3일동안 몇 번에 걸쳐서 우연히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위니님이 건너준 단순하고도 평범한 문장이 마음속에 깊이 박혔다. "당신은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이 질문에는 어떤 선입견도 어떤 추측도 없다. 자크 랑시에르가 가정했던 것처럼 '나도 느끼면 너도 느낄 수 있다'는 아주 평범한 진리의 표현이다.

 

이제 조금씩 문자가 주는 절망과 한계가 아니라 문자만이 줄 수 있는 생성과 생동이 무엇인지 알듯하다. 구술성과 문자성, 정신의 발견, 자아,  뇌과학과 정신분석까지 돌아왔던 공부에 햇살이 살짝 비추는 것 같다. 신기한 것은 여기에는 우연적인, 아주 우연적인 만남이 몇 번이나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제 다른 사람을 만날 때, 그것도 아주 낯선 타자를 만날 때, 이 물음표 하나는 잘 기억하고 싶다.

 

"당신은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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