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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다한이야기

은행 없이 1억 구하기

by 홍차영차 2020. 5. 3.

은행없이 1억 구하기







겁도 없이 이사갈 집을 먼저 계약했다. ‘2달이 넘게 남았는데 전세계약이 안 되는 일은 없겠지’라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이사 갈 날짜가 다가오는데 계약이 쉽게 성사되지 않았다. -.-;;; 집을 보러 오는 사람들은 몇몇 있었지만 이사 날짜가 정해져 있어 계약이 성사되지 않았다는 부동산 중개인의 문자만 계속해서 돌아왔다. “이런! 이러다가는 전세보증금을 은행에서 따로 구해야할 수도 있겠는데……”






이사 날짜까지는 아직 한 달이 넘게 남았지만 집 계약에서 4주 정도가 거의 마지막 마지노선이기에 보증금을 따로 구해보기로 했다. 돈을 빌리는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집을 보러 오는 사람들을 보면 짧으면 2~3일, 길면 2~3주 정도면 충분히 전세계약이 이뤄질 것 같았다. 이 정도 기간이면 어디서라도 돈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아니 이제서야 그 문제를 실감하게 됐다. 생각해보니 난 이 사회에서 아무것도Nobody 아니었다. 은행에 대출 상담을 하니 직장을 다니지 않기에 거의 사람 대접을 받지 못했다. 직장도 없고 (개인) 사업자 등록 번호도 없으니 금융권에서 나는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었다. 어디서라도가 아니라 어디에서도 돈을 구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 그나마 나에게 호의를 보여준 곳은 오랫동안 사용한 카드 회사에! 20년 정도 별탈 없이 사용해서인지 ‘우량고객’이라는 이름으로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약8.5%의 낮은(?) 금리로 1900만원까지 대출을 해준다는 기쁜(?) 소식을 접했다. 나머지 돈을 어디서 구하지? 이러다가 이사고 뭐고 난리 나겠는데…

여기까지 도달하니 어쩔 수 없이 가족이 떠올랐다. 그런데 묘한게 가족에게 돈을 빌리는 마음이 그리 편치 않았다. 말을 꺼내는 것도 쉽지 않았고 이런 말을 하는 나의 감정도 묘했다. 당연히(?) 빌려주지 않겠어라는 희망의 마음과 빌려주기 어렵다고 말할 때에 받을 (서운한, 슬픈) 감정들! 결과적으로 가족에게는 큰 돈을 빌리지 못했다. 다들 사정이 겹쳤고, 다양한 이유가 있었다. 서운한 마음이 더 커질 사이도 없이 다른 대안을 찾아야 했다. (인문학 공동체) 문탁네트워크 친구들에게 이야기해봐야겠다. 여기밖에 없었다.



평상시 세미나에서 아무렇지도 없게 ‘우정과 선물’로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 친구들이기에 돈에 관해서도 투명하게 서로가 서로에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는데, 정작 내가 이런 상황이 되니 쉽지 않았다. -.-; 평생 아쉬운 소리 하기 싫어하던 내가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 공부를 통해서 변해서일까 아니면 절박한 상황때문이었을까. 생각보다 쉽게 ‘돈을 빌려줄 수 있느냐’는 말을 꺼낼 수 있었다. 어째서지?

내가 왜 이렇게 편하게, 아니’ 사심없이’ 다시 말해 자아의 ‘정서적 요동 없이’ 친구들에게 돈에 대해서 말할 수 있었을까? 문탁네트워크 초기부터 공부가 삶과 유리되지 않는 삶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 했고, 그렇게 살고 있는 사람들을 경험했다. 우리는 계속해서 공부공동체를 넘어서 서로의 삶을 의지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경제공동체’에 대해서 이야기했고, 그런 실험의 일부로 우리는 지금도 ‘무진장’이라는 한 통장의 실험을 하고 있다. 우리는 서로의 집 밥 숟가락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어느정도의 상황과 정서를 공유하고 있었다.

열명이 넘는 친구들에게 돈을 빌려줄 수 있는지 물었다. 전후 사정을 설명하고 500만원이면 20명, 1천만원이면 열명만 구하면 된다고 하면서. 놀랍게 하루만에 1억 정도를 빌릴 수 있었다. 작게는 200만원에서 2천만원까지. 물론 이런 과정에서는 빌려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친구도 있었고, 생각보다 많은 돈을 빌려준 친구도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말에서는 감정의 요동이 크지 않았다. 이곳에서 내가 경험하기로 친구는 개체들의 연합이기보다 ‘공동체적 자아’였기 때문이다. 부분의 필연성과 전체의 필연성은 그리 크게 대립하지 않는다.






결론을 말해서, 나는 친구들에게 돈을 빌리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이렇게 보증금을 확보(?)하게 된 다음날에 우리집 계약이 성사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신기하면서도 흥분되는 경험이었다. 왠만한 공부밀도를 넘어서는 경험이었고, 나의 밀도가 바뀌는 하나의 서사였다. 질문도 여럿 생겼다. 우리가 돈을 빌릴 수 있는 곳이 왜 ‘은행’으로 한정되었을까? 왜 나는 돈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가족들에게, 동료들에게 하기를 어려워할까? 우리가 물만 먹고 사는 요정도 아닌 이상 분명히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이 있음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짧은 경험이었지만 이걸 통해서 ‘돈’이란 그저 멸시하고 피해야할 것이 아니라 더 다양한 사용의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어떻게 돈을 버는지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돈을 써야 하는지, 어떻게 돈이 순환될 수 있는지를 더 많이 고민하고 실천해야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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