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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고전

仁,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니다

by 홍차영차 2019. 1. 3.

,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니다








LY0523 子曰, “伯夷叔齊不念舊惡, 怨是用希.”

백이 숙제는 묵은 원한에 연연하지 않았다. 그러니 원망이 드물었다.

LY0715 冉有曰, “夫子爲衛君乎?” 子貢曰, “, 吾將問之.” 

염유가 말했다. 선생님께선 위나라 임금을 위해 일하실까? 자공이 말했다. 그럴듯한데! 내 곧 여쭤보지.

入曰, “伯夷叔齊何人也?” , “古之賢人也.” , “怨乎?” , “求仁而得仁, 又何怨? 出曰, “夫子不爲也.” 들어가 여쭈었다. 백이와 숙제는 어떤 사람인지요? 옛 현인들이시지. 원망을 하였던지요? 인을 구하여 인을 얻었으니, 또 무얼 원망할게 있었겠느냐. 나와 서 말하였다. 선생님께선 그를 위해 일하지 않을 것이네.

LY1612 齊景公有馬千駟, 死之日, 民無德而稱焉. 伯夷叔齊餓于首陽之下, 民到于今稱之. 其斯之謂與?

제경공은 천 대의 마차를 가졌어도, 죽던 날 백성들이 덕으로 칭송하지 않았다. 백이와 숙제는 수양산 아래서 주려 죽었으니 백성들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칭송한다. 그것이 이걸 두고 이르는 말일까?

LY1808 逸民, 伯夷, 叔齊, 虞仲, 夷逸, 朱張, 柳下惠, 少連.  子曰, “不降其志, 不辱其身, 伯夷 叔齊與!” 일민은 백이, 숙제, 우중, 이일, 주장, 유하혜, 소련이라. 그 뜻을 굽히지 않고 그 몸을 욕보지 않은 자는 백이와 숙제일진저!





전논어를 공부한 시즌에는 예()에 대해 이야기했다. 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항상 형식으로 표상되는 의례의 갑갑함을 느꼈는데, 공자가 말하는 예가 정말 그러한가를 알고 싶었다. 이제 1년에 걸쳐 <논어>를 다 읽고 나니, 이제는 인()에 대해 뭔가를 써보고 싶었다. <논어>에서 자주 언급되는 ‘백이숙제’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서 ‘인’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논어> 전체에 걸쳐서 공자가 평가한 백이숙제(伯夷叔齊)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보고서는 살짝 당황했다. 내 기억에는 분명 공자가 백이숙제를 칭찬하기만 하지 않고, 비판한 적이 있다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실제 <논어> 전체에 걸쳐서 백이숙제가 인용된 부분을 살펴보니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나는 실제 <논어>와 다른 기억을 갖고 있을까를 돌이켜 보니, 이는 <사기열전>에 나온 사마천의 평가와 공자의 평가가 섞였기 때문인 것 같다.

공자는 그들을 “옛 현인”이라 불렀고, “백이와 숙제는 묵은 원한에 연연하지 않았으니 다른 사람을 원망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라거나, “인을 구하여 그것을 얻었는데 또 무엇을 원망하겠는가?”라고 했다. 하지만 사마천은 이에 대해 다소 다른 평가를 내렸다. 사마천은 <채미가>를 근거로 백이숙제의 심경은 슬펐을 것이라고 판단한다.(사마천의 <사기열전> ‘백이열전’) 그러면서 사마천은 무명(無名)이었던 백이숙제가 이렇게 알려지게 된 것은 사실은 공자가 그에 대해서 언급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아마도 당시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마천처럼 백이숙제는 원망하면서 굶어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텐데, 공자는 그와 완전히 다른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렇다! 왜 공자는 당시에 이렇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백이숙제를 4번이나 <논어>에서 언급하면서 거듭 칭찬했을까.

어떤 사람의 사상을 논할 때 중요하게 살펴봐야 할 부분은 바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을 좋아하고 존경하는가이다. ‘자서전’을 남기지 않은 사람을 알아보는 방식 역시 그 사람이 어떤 사람들과 지냈는지를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다. 공자 역시 그렇지 않았을까? 공자는 고죽국의 백이숙제를 당대로 가져오면서 기존의 평가와 다른 평가를 내리면서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바를 드러내려고 한 것 같다.

유가를 대표하는 개념으로 인(), 의(), 예(), 지()를 들 수 있는데, 여기에서도 가장 논하기 어려운 것은 아마도 ‘인’이지 않을까. 나머지 세 개념은 옮음을 따지는 ‘의’, 형식을 말하는 ‘예’, 앎을 이야기하는 ‘지’라고 거칠게라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공자의 사상에 있어서 가장 핵식이라고 하는 ‘인’은 거칠게라도 혹은 퉁치고 싶어도 말하기가 쉽지 않다. 공자는 자신의 이전 시대에는 잘 쓰이지 않았다는 ‘인’을 들어서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혹은 왜 잘 쓰이지 않았던 글자를 가지고 자신의 이야기를 풀고 싶었을까? (철학은 개념의 발명?)


저 서산西山에 올라

고사리를 뜯네

폭력으로 폭력을 바꾸었건만

그 잘못을 모르는구나

신농(神農), 우, 하나라 때는 홀연히 지나갔으니

우리는 앞으로 어디로 돌아가야 하나?

아아! 이제는 죽음뿐

우리 운명도 다했구나! (사마천 <사기열전>에서 재인용)



바로 이 지점에 ‘백이숙제’가 서 있는 것 같다. 공자가 백이숙제를 자신의 논거로 데려왔다는 사실 자체와 평가 내용을 보면 ‘인’의 모습이 어느정도 보이는 것 같다. 분명 ‘인’이라는 개념을 하나의 고정된 형태로 표현되기는 어렵다. 하지만 말은 현실의 거울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안개처럼 잡히지 않는 혼란스러운 개념이라면 거울 속에서도 혼란스러운 그대로 반영되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다.

우선 공자는 백이숙제에게 기존과 전혀 다른 해석의 조명을 비춰준다. 조명이 바뀌면 사물을 다르게 볼 수 있다. 우리가 서로 소통하지 못하는 주요한 이유는 자신이 보는 사물이 절대적이라고, 자신의 생각은 확실하며 틀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공자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조명을 가지고 와서 현재의 우리의 생각이 틀릴 수 있다고 말한다. 백이숙제가 원망했는지 하지 않았는지는 그 관점에 따라서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공자의 인이란 고정되기보다는 유연한 사고를 전제하는 것 같다.

둘째 백이숙제는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바를 끝까지 실행한 사람들이다. 나라 전체를 생각하며 왕위를 탐내지 않았고, 나라의 질서를 세우기 위해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것에 대해 무왕에게 간언하기도 했으며, 마지막으로는 자신들의 생각대로 ‘고사리’를 먹다가 죽음을 맞이했다. 인이란 그저 말이나 생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크든 작든 자신이 할 수 있는 소임에 최선을 다하는 실천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는 듯 하다.

마지막으로 백이숙제는 과거에 연연하지 않았던 인물들이다. 공자 역시 그렇다. 고위 관직에 오르지 못하는 자신의 신세 한탄을 하면서 세월을 보낸 적이 없고, 오로지 과거의 영광으로 회귀하자는 방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또한 공자는 되지 않을 것이라고 해서 포기하지도 않는다. 공자는 백이숙제가 그랬던 것처럼 그 현실에 맞게, 현장에 맞추어, 사건에 따라서 옛것을 새롭게 구성해내고자 한다. 인이란 언제나 지금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있는 듯 하다.


어찌되었든 1년 동안 <논어>를 읽었다. 서양사유와 달리 동양의 사고는 언제나 나의 사고를 잡아끄는 힘이 있는 것 같다. 빨리감기와 건너뛰기에 익숙한 사고에 대해서 공자는 조금 천천히 가면서 그 과정을 바라보고, 다시 한 번 생각하면 좋지 않냐고 권하는 것 같다. 말로 할 수 없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 결과가 좋지 않더라고 좋을 수 있다는 점에 대해 이보다 더 잘 말해줄 수 있는 텍스트는 없는 것 같다. 땡큐, 공자! 땡큐, 리인학당!



2018. 1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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