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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고전

禮, 타자성의 인정

by 홍차영차 2018. 6. 17.

, 타자성의 인정 

- 다른 사람이 살고 있소이다







<논어>를 읽는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은 ‘고리타분’하며 ‘시대에 맞지 않는’ ‘가부장적 유교사상’을 떠올린다. 특히 나를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에 대한 부분이었다. 가 나올 때마다 체면상 치뤄야했던 수많은 허례허식(虛禮虛飾)과 예의범절이라고 들이밀면서 규율을 강요받았던 지난 시절이 떠오른다. 란 기득권층(정치지도자, 부자, 남성, 어른)이 요구하는 복종의 의식에 분홍분을 바른 것에 다름 아닐까?

<논어>에서 공자가 강조하는 , , 에 대해서는 반감이 그리 크지 않았다. 인, 의, 지가 무엇인지 한 마디로 말할 수는 없음에도, 어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거나, 옳은 일에 함께 하며, 항상 배우면서 살아가자는 것에 반대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는 다르다. 규율이나 지나친 법규처럼 느껴지는 예가 지금도 필요할까? 삶에 짐이 되거나 장애물이 아닌 예는 어떻게 가능할까?



는 형태다

하나의 개체 혹은 공동체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것이 다른 것과 구별되는 어떤 형태가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형태라는 것은 단지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모습뿐 아니라 그것을 떠올릴 때 머릿 속에서 그것을 다른 개체와 다른 것으로 구분할 수 있는 모든 이미지를 포함한다. 물론, <논어>나 다른 동양 고전에 단독자로서 개인individual은 없다.(고 한다.) 나는 어머니의 아들이며, 남편이고, 아버지일뿐 아니라 친구이고 스승이자 제자이고, 경쟁자이다. 집단 속에서 관계를 유지하면 살아가는 내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관계 속의 ‘나’라는 것도 전체 집단의 형태가 있어야 하고, 그 속에서 다른 타자와 다른 차이가 드러날 때 파악할 수 있지 않은가.


子曰 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

나는 열다섯에 배움에 뜻을 두었고, 삼십에는 섰고 사십에 의혹하지 않았다. 오십에는 천명을 알았고, 

육십에 귀가 순해졌으며, 칠십에는 마음이 하자는 대로 좇아도 경우를 넘지 않았노라. (2.4)


<논어>에서 가장 유명한 문장 중 하나인 위정편의 문장을 보자. 공자는 ‘열다섯에 배움에 뜻을 두고, 삼십에 섰다’고 말했다. 즉 그는 공동체 속에서 배움으로 공동체 속의 자리를 취했고, 삼십에는  자신의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이라는 것은 흔히 말하는 공동체와 떨어져서 ‘홀로, 독자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현재 구성된 공동체의 형태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고 자리잡았다는 말이 아닐까.

<논어>에서 장례식을 중요시하는 이유 역시 형태성으로 볼 수 있다. 장례식에 참여해보면 그 공동체가 혹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그 형태를 직접 경험하면서 알 수 있다. 여기에 참석한 한 사람 한 사람은 장례식을 통해서 전체 공동체 속에서 자신을 바라볼 수 있다. 하나의 형태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구성요소가 필요하다. 여기서 중요하지 않은 것, 필요없는 것은 없다. 각자가 자신의 자리를 굳건히 지킬 때 그 형태가 더 공고해진다. 혹은 다른 형태로 바뀔 수 있다.






는 항상성이다

형태를 갖춘다는 것은 분명 외부와 경계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 경계는 고정된, 불변의 틀이 아니다. 경계가 존재하지만 이 경계는 나와 타자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아니다. 경계의 형성은 홀로 형성되지 않는다. 또한 다른 사람/공동체와 아무런 차이가 없어서는 경계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아니 홀로 있을 때에는 경계가 필요없다. 

형태를 구성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과 구분되면서 유지되는 무엇인가(항상성)가 있어야 한다. 개체, 공동체의 항상성이 있어야 한다. 경계와 형태는 나와 다른 사람의 끊임없는 관계 속에 상호간의 힘의 의지 속에 구성된다. 는 항상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子曰 恭而無禮則勞 愼而無禮則 勇而無禮則亂 直而無禮則絞

공손하되 예가 없으면 수고롭고, 신중하되 예가 없으면 불안하고,

용맹스럽되 예가 없으면 난폭하고, 곧되 예가 없으면 강퍅하게 되느니. (<논어> 8.2)



생명, 살아있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유연성이다. 항상성을 유지한 유연성! 공자는 를 고정된 것으로 보지 않았다. 매번 주어진 상황과 사람들간의 관계 속에서 를 새롭게 구성했다. 왜냐하면 경계가 너무 공고하면 경계 내부의 개체(공동체)는 아무런 변화를 받아들일 수 없고, 이는 곧 죽음의 다른 이름이 된다. 반대로 경계가 너무나 느슨해도 마찬가지다. 무엇이든지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은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는 말과 같은 말일뿐이다. 무조건 공손하고, 신중하고, 용맹하고, 곧은 것은 위험할 수밖에 없다. 타자와 관계를 인식하지 못한 상태일 뿐이다. 바로 이것이 텍스트에서 ‘를 중용 의 보호장치’라고 부른 이유가 아닐까.



군자란 의식하지 않는 예로 장착된 몸


子曰 興於詩 立於禮 成於樂

시에서 일으켜, 예에 서며, 악에서 이루느니라. (<논어>, 8.8)


형태를 구성한다는 것은 매번의 긴장이고 규율일 수밖에 없을까? 공자의 삶을 보면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공자는 <논어>에서 여러번 에 대해서 말했는데, 흡사 를 넘어서는 마지막 단계로 에 대하여 말하는 것 같다. 사실 예와 악은 상호 부조화처럼 보인다. 딱딱한 음악, 틀이 잡힌 음악은 연주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누구도 즐겁지 않다. 하지만 예 없는 악 또한 상상하기 힘들다.

<논어> 태백편에 나와 있는 ‘예에 서고, 악에서 이룬다’는 말을 보자. 다른 학문과 달리 악은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이해해야 한다. ‘악에서 이룬다’는 말은 몸 전체로 소리를 받아들여서 조화로이 즐길 수 있다는 말이고, 예가 몸에 각인되어 이제는 예를 따로 생각할 필요가 없는 상태가 아닐까.


라는 것은 따르고 싶으면 따르고 하기 싫으면 그만 둘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살아있다면 나는 항상 를 드러내고 있는 중이다. 나와 타자와의 경계지음으로, 내가 속한 공동체 속의 나의 모습으로. 

불과 100년 전만하더라도 우리는 깊은 공동체 의식 속에 살았다. 그들은 삶의 많은 방식을 법으로 규정하지 않아도 수많은 의례 속에 사는 법을 알 수 있었다. 강한 공동체 의식의 좋은 점은 공동체가 무너질 수 있지만, 나만 무너지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기둥과 받침돌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각자가 너무나 다른 종류, 특징, 재질의 자신만의 형태를 만들기를 주장한다.  이렇게 각자의 주체성을 강하게 주장하는, 아니 주체성 중독처럼 보이는 주체성 과잉의 시대에 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현대의 삶이란 개인의 의 충돌의 연속처럼 느껴진다. 지금 필요한 는 서로의 같음을 주입하는 방식이 아니라 서로가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는 장으로서 가 마련되어야 하지 않을까? 지금 중요한 것은 어떤 를 지키자가 아니다. 를 지킨다는 것은 바로 타자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부터 출발한다는 사실이다.



2018. 06.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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