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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안다는 것에 대한 착각

by 홍차영차 2018. 5. 31.

우리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지 못한다

움베르토 마뚜라나 & 프란시스코 바렐라, <앎의 나무>, 갈무리 출판사








문탁네트워크(이하 문탁)는 기본적으로 인문학 공동체다. 문탁에서 공부가 끊어진 적은 없다. 물론 우리가 공부만 하는 것은 아니다. (탈핵에 대한 공부가 밀양과의 연대를 형성했으며, 다시 용인 지역 내에서 76.5일의 1인 시위를 진행했고, 수년간의 활동을 탈핵, 녹색 담론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공부하면서 알게 된 것을 활동으로 만들어 냈고, 활동의 마무리는 언제나 우리의 공부가 될 수 있도록 힘썼다. 이렇다보니 우리는 항상 ‘공부와 활동’, ‘이론과 실천’의 간극에 대해서 신경쓸 수밖에 없다. 우리는 곧잘 공부가 삶을 구원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삶을 구원하는 앎, 나를 바꾸는 인식은 어떻게 가능할까?

우리가 ‘마뚜라나/바렐라 읽기’를 진행한 것은 새로운 형태의 ‘미니학교’를 구상하면서였다. 우리는 공부하면서 삶을 유예시키지 않는 학교를 상상했고, 새로운 학교가 기존의 틀이나 고정된 철학에 얽매이지 않기를 바랐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다른 공부가 아닌 마뚜라나/바렐라의 <앎의 나무>였을까


인식이란 인간의 생물학적 공통성에 근거한 사회적 상호조정 속에 공동으로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성립하는 윤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 바탕을 둔다. 우리가 존재하는 세계란 우리가 타인들과 함께 만들어낸 세계이며 이 세계는 다시 우리에게 거꾸로 영향을 미친다. 이 사회적 세계에서 우리는 타인에게 의존하고 있으며 따라서 타인의 인정은 이 세계의 성립조건이다. (p14-15)


마뚜라나/바렐라를 처음 공부할 때 우리는 중학교 생물 교과서부터 다시 살펴봐야 하는 수준이었고, <앎의 나무>라는 책을 펴기 전까지 ‘마뚜라나 바렐라’가 한 사람인지, 두 사람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책을 구입하고서야 저자가 움베르토 마뚜라나, 프란시스코 바렐라라는 남미 칠레 출신의 생물학자‘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마뚜라나/바렐라의 출발점은 ‘인식’의 문제였다. 인식은 앎의 문제로 치환될수 있고, 앎은 곧바로 실천의 문제를 떠오르게 한다. 하지만 저자들은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 이 둘을 어떻게 일치시킬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는다. 저자들은 앎의 문제를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방식으로 풀지 않는다. 그들은 인식의 문제를 생물학적 현상으로 바라보고,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정의하면서 인식한다는 것이 생명의 행위임을 증명한다. 그래서 언제나 마뚜라나는 자신의 모든 강의에서 자신을 철학자가 아니라 생물학자로 소개한다.“내가 누구에게 말하건 간에 나는 한 사람의 생물학자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완전한 인식 - 확실성에 대한 유혹에서 벗어나기

이건 뭐지? 왼쪽 눈을 감고 십자가 모양을 바라보고 어느정도의 거리를 맞추면 갑자기 오른쪽의 검은 점이 사라진다. 분명하고 확실하게 종이 위에 찍힌 검은 점이 있는데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우리의 망막에는 시신경이 통과하면서 생기는 ‘맹점’이 있다. 당연히 이곳에는 시신경세포가 없어 상이 맺히지 않는다.

우리는 무언가를 인식한다고 할 때, 우리 신체가 외부의 대상을 받아들인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전제는 외부에 객관적인 물체가 있다는 생각이다. 마뚜라나/바렐라는 확실성을 ‘타인의 인지적 행위를 보지 못하게 하는 현상’으로 정의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간단한 실험을 통해 인식의 확실성이란 사실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 우리는 보통 자신의 생각과 판단은 확실하다고, 분명한 근거를 바탕에 두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앎의 나무>는 우리로 하여금 서로간의 소통을 막는 이런 확실성의 유혹에 넘어가는 버릇을 떨쳐버리기를 요구한다.

 파지스쿨을 운영한지 몇 년 되지 않았지만 마을교사들 사이에서 서로의 교육관때문에 가끔 충돌이 있기도 했다. 세미나 시간에 더 많은 이야기를 해 줘야한다는 마을교사가 있는가하면, 아이들이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침묵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마을교사도 있다. 각자가 이런 교육관(?)을 갖게 된 것은 개인이 지나온 경험을 바탕으로 각자가 서로 다른 구조를 갖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맹점의 실험은 바로 이것, “우리는 우리가 보지 못한다는 것을 보지 못한다.”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낯설게 만든다. 사람들은 외부의 대상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지각한다고 생각하지만, 거기에는 이미 ‘개인의 구조’가 또렷이 새겨져 있다. 개구리가 보는 세상은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과 같지 않다. 우리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시야(구조)’를 체험할 뿐이다. 완벽하게 다른 사람의 시야를 이해할 수는 없다. 내가 나만의 구조를 가지고 있듯이, 다른 사람들 역시 자신만의 구조를 만들어왔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가 어떻게 구성되는지 제대로 알고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서로가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질 수 있다.



오토포이에시스와 구조접속 - 생물학에서 윤리학으로 

우리는 우리와 무관한 객관적 세계가 존재한다고 확신한다. 그런데 외부에 나와 무관한 객관적이면서 변하지 않는 대상이 있다는 확신은 인식에서 맞고 틀림의 문제를 발생시킨다. 여기에서 기준이 되는 것은 외부의 대상이고, 인식(관념)은 대상과 얼마나 일치하는가의 문제가 된다. 그런데 인식을 이런 방식으로 접근하게 되면 각자가 갖고 있는 고유성을 고려하기 어렵게 된다. 왜냐하면 주변 환경과의 완전한 분리된 물체들, 특히 생명은 홀로 존재하지 않고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뚜라나/바렐라는 생명의 기원에 대해 다시 정의하면서 인식이란 외부 세계에 대한 단순한 재현(표상)representation이 아니라 우리의 생물학적 구조와 연결된 활동과정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생명이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생물과 무생물을 가르는 기준은 자손을 퍼뜨릴 수 있는가의 여부이다. 하지만 저자들들은 자율적 개체의 관점을 강조하면서 생명을 오토포이에시스(자기생성개체)라고 정의한다. 자기생성개체로서 살아있다는 것은 끊임없는 생성활동을 하면서 자기자신을 만들어내는 활동 자체를 뜻한다.






오토포이에시스라는 생명의 정의를 단세포생물에 적용해보자. 여기서 ‘이것’이 생물이 되게 하는 핵심 구성은 세포막이다. 막은 주변세계와 개체를 물리적으로 구분하기도 하지만, 막 자체는 화학적인 과정에도 참가하면서 끊임없는 개체의 변화를 만들어낸다. 단세포생물은 세포막을 경계로 삼아 주변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물리적, 화학적 활동으로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되면 자기생성개체의 존재와 행위는 나누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자기생성개체로서의 생명의 정의는 단세포에서만 가능할까? 저자들은 이 개념을 인간을 포함하는 다세포생물과 다세포생물들이 서로 엮여 있는 사회체계에까지 확장한다. 놀랍게도 이렇게 되면 생물학적 관점에서 출발했던 자기생성체계라는 생명의 정의는 ‘윤리’의 문제와 만나게 된다.


조직(organization)이란 어떤 것을 특정 부류에 속한 것으로 간주하기 위해 그것의 구성요소들 사이에 있어야만 하는 관계이다. 구조(structure)란 특정 개체를 구체적으로 구성하여 그 조직을 실현하는 구성요소들과 그것들 사이의 관계다. (p58)


단세포생물이 얇은 막을 사이에 두고 물질들을 상호교환하면서 존재했던 것처럼, 하나의 생명체가 자신의 존재를 유지한다는 것은 주변환경과 상호작용하는 활동의 지속이다. 생명활동은 홀로 작동할 수 없고 주변환경과 상호 접속된 채로 이루어진다. 이제 생명체에게 중요한 것은 이 무한한 세계 속에서 어떤 것들은 독이 되고, 어떤 것들은 영양물이 되는지, 어떤 것에는 긍정적으로 반응하고, 어떤 것에는 부정적으로 반응하게 되는지의 관계를 파악하는 것이다.

마뚜라나/바렐라는 생명체가 주변환경과의 재귀적 상호작용 안에서 자신의 생명조직을 잃지 않으면서 생명활동을 하고 있는 상태를 구조접속(structural coupling)상태라고 정의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책상이라고 하면 그 ‘구조’는 다양할 수 있다. 세 발, 네 발, 여섯 개의 발의 책상 구조가 가능하고, 유리, 나무, 철제로 된 다양한 재질도 가능하다. 하나의 책상은 그 조직을 유지하면서 색을 다시 칙하고 재료를 바꾸고 책상 다리의 숫자를 바꿀수도 있다. 하지만 그 책상이 뭔가를 올려놓고 일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버렸다면 우리는 그 책상이 ‘조직’을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다세포생물이 되었다고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 다세포생물인 인간이 살아있다는 것은 나와 다른 인간을 포함한 주변환경과 재귀적 상호작용을 주고받을 뿐이다. 재귀적 상호작용이라는 말은 나도 환경에 영향을 받지만, 환경 역시 나로 인해서 변화한다는 뜻이고, 이런 상호작용이 지속된다는 뜻이다. 책상과 마찬가지로 인간 역시 환경과의 상호작용으로 구조가 바뀔 수 있다. 다칠 수도 있으며, 특정 물질에 알레르기가 발생할 수도 있다. 나와 다른 인간들과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조금 더 확장해본다면 수많은 인간들로 구성된 사회체계-공동체도 하나의 자기생성체계라고 볼 수 있다. 자기생성체계로서의 사회 역시 그 고유한 특징으로서의 생명조직을 유지할 때에야 역동적으로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들끼리 어떻게 지낼 것인가와 다른 공동체와 어떻게 긍정적 관계를 유지할 것인지를 고려해야만 한다. 바로 이 부분에서 윤리학의 문제, 정치의 문제가 고려될 수 있다.



함이 곧 앎이며 앎이 곧 함이다

다시 인식의 문제로 돌아가보자. 일반적으로 우리는 인식이란 외부에 주어진 대상을 지각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지각을 매우 수동적이라고 여긴다. 보는 것, 듣는 것, 느끼는 것, 모두 외부 대상이 원인이 되어 내게 자극을 준다고 생각한다. 외부의 대상을 오감의 감각세포가 받아들여 그 대상의 정보를 신경계를 통해 뇌로 전달하고, 그 결과로 운동세포가 반응한다는 것이 지극히 교과서적인 지각과 반응에 대한 설명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마뚜라나/바렐라가 정의한 자기생성개체로서의 생명활동은 주어진 환경을 수용하는 수동적 작용이 아니다. 왜냐하면 생물과 환경이 구조접속 가운데 있을 때, 그 생물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결정하는 것은 환경의 섭동작용이 아니라 그 생물 고유의 구조이기 때문이다.

책상 위에 사과가 하나 있다고 하자. 우리는 사과를 본다. 우리는 흔히 사과를 보는 시각의 원인이 사과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치자. 우리는 ‘사과 보기’의 원인인 외부의 사과로 인해 그 사과를 인식하게 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사과는 내 앞에 놓인 그 사과 하나 뿐이다. 그런데 ‘이’ 사과는 어디까지가 내 시각의 원인으로서의 사과고 어디부터가 내 인식의 결과로서의 사과일까? 우리는 입력으로서의 정보(사과)와 출력으로서의 행동(사과보기)을 명확히 구별할 수 없다. 우리는 외부의 사과가 사과보기의 결정적 원인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사과보기는 내 감각 세포와 뉴런의 활동 때문이지 사과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사과는 그 이전부터 줄곧 돌아가고 있었던 신경체계들의 활동에  합류한 것뿐이다. 이렇게 되면 외부의 사과는 시각 활동의 원인이 아닌 조건이 되고 ‘사과’와 ‘사과 보기’는 인과관계가 아니라 상관관계이다. 다시 말해 지각의 원인은 그 이전부터 계속되고 있었던 우리의 행동과 연결된 신경체계의 감각운동인 것이다. 이쯤 되면 이야기할 수 있다. 우리의 인식은 외부의 대상을 수동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역동적으로 자기를 생산하던 생명활동을 통해서 오히려 대상 혹은 세계가 지각된 것이라고.“함이 곧 앎이며 앎이 곧 함이다.”라는 책의 경구가 이제 조금 이해가 된다.

마지막으로 <앎의 나무>가 쓰여진 방식과 이 책을 읽는 방식에 대해서 살펴보자. <앎의 나무>는 초반부에 ‘생명체의 조직’이라는 개념에서 출발하여 마지막 부분에서는 ‘사회적 현상’까지 발전시키고 있다. 하지만 저자들은 1장부터 10장에 걸쳐 나오는 개념들과 내용들을 각자 따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에 대해서 정의했던 것처럼 재귀적 상호작용 속에서 이 개념들을 파악해야 한다고 말한다. 생명은 자기생성개체로 이해한다는 것은 그물망 속에 서로 엮여져 있는 가운데에서 이 개념들을 파악할 때 가능하다. 

이는 단순히 책이 쓰여진 방식에서만이 아니라 책을 읽는 방식과도 연결될 수 있다. 마뚜라나/바렐라는 독자가 책을 대상으로 놓고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책이 나에게 영향을 주고, 다시 내가 책의 내용을 다시 파악하는 방식으로 읽어나가기를 바라는 것 같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오토포이에시스라는 관점에서 생명을 바라보고, 윤리를 다시 생각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2018 파지스쿨러 & 마을교사


처음 마뚜라나/바렐라를 읽고 출발한 미니학교는 어떻게 됐을까? <앎의 나무>를 읽었던 이유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새로운 학교 이름은 ‘파지(破地)스쿨’로 낙점되었다. 유명하거나 유능한 인물도 없었거니와 기반이 되는 훌륭하면서도 확고한 철학도 고수하지 않았던 파지스쿨은 흥행에 성공했을까? 

적은 인원이었지만 2014년부터 3년동안 작동했던 파지스쿨은 2017년에 문을 열지 못했다. 왜? 아무도 오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이상하게 아무도 오지 않던 그 기간에 문탁에는 더욱더 많은 청(소)년들이 들락날락거렸다. 그리고 2018년 파지스쿨은 일주일에 단 하루만 오는 단촐한(?) 방식으로 바뀌면서 다시 출발했다. 대신 파지스쿨의 청(소)년들은 문탁의 다른 세미나에서도 공부하고, 활동하면서 각자의 삶을 만들어가고 있다.

1년동안 학생이 오지 않으면 문을 닫는 것이 맞지 않을까,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데 학교를 유지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앎의 나무>에서 배웠듯이 문탁과 파지스쿨이 존재한다는 것은 특별한 이유와 목적때문이 아니다. 우리들은 함께 공부하고 삶을 고민하면서, 공부하면서 삶을 유예시키지 않는 방식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할 뿐이다. 개인적으로는 파지스쿨이 5년차가 되면서 이제야 다른 양식의 삶을 살아보려고 시도가 조금씩 생활이 되는 것 같다. ‘생활이 되었다’는 것의 방점은 이제 힘을 주지 않게 되었다는 것에 있다. 이제야 뭔가를 이뤄야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 같다. 그래도 학교에 대한 그림을 그려 볼 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다. 그것은 파지스쿨을 만들어 가는 이들의 공부와 삶이 일상 속에서 엮여 가며 그 활동의 강도를 높여 갈 것이라는 점이다. 모든 생명체가 그러하듯이 끊임없이 자기를 조직하면서 학교의 모습을 생성해 나갈 것이다. 공부하고 뭔가를 조직하는 일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일임을 <앎의 나무>가 잘 증명해주는 것 같다.




*서평을 쓸 일이 있어서 일단 파지스쿨과 연계하여 초안 작성.


2018. 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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